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88화 (88/285)

제88화. 화해냐 다툼이냐, 공생 던전 (1)

장채원은 책상에 앉아 밀린 견적서를 뽑기 시작했고, 천마는 응접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고은진은 새로 들여놓은 책상에 앉아 던전 관리팀에 보낼 물품 리스트, 완료 확인서 등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최근 복복 인테리어엔 시공 의뢰를 위한 견적서 요청이 밀려들었다.

거기다 던전 관리팀의 의뢰까지 더해지자, 장채원은 파트타임 직원인 고은진을 불러 던전 관리팀에 보낼 서류 작성을 시킨 것이다.

“으음.”

장채원은 연신 서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고은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관공서 일이니만큼 재료를 갖다주는 것으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의뢰비를 받기 위해서는 던전 재료 관리팀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을 작성해야 하며, 세금계산서도 발행해야 한다.

‘은진 씨가 일은 참 잘한단 말이지.’

그리고 고개를 돌려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도 서류 작업을 잘하면 좋을 텐데,’

천마는 몸을 쓰는 일은 곧잘 하지만 서류 작성 같은 일은 시킬 수가 없었다.

글자를 읽고 말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글씨를 쓰면 죄다 한문으로 출력되었기 때문이다.

“그쪽이 여기 사장이십니까?”

서류 작성을 하던 고은진은 문득, 멀뚱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천마를 노려보았다.

“왜 거기서 노십니까?”

“후임자로서 예의를 갖춰라, 요괴.”

“선임몬 님. 왜 업무 시간에 잡지를 읽느냔 말입니다.”

천마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덤덤히 말했다.

“인테리어 시공이라는 건 고도의 지식을 요구한다. 네놈처럼 머리가 텅 비고, 음식에 집착하는 녀석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

“뭐? 뭐라고요?”

“이렇게 틈틈이 지식을 쌓아두어야 시공에 지장이 없는 거다. 잘 알겠나?”

고개를 든 천마가 고은진을 바라보며 텅 빈 종이컵을 가리켰다.

“잔이 비었군.”

“어쩌라고요.”

“녹차 한 잔. 미지근하게.”

“웃기지 마십쇼! 내가 왜 차를 갖다줘야 합니까?”

“업무의 일환이다. 선임자의 잔이 비었으면 채워주는 것은 기본 아니냐.”

그러자 견적서를 작성하던 장채원이 책상을 탁 치며 말했다.

“바빠 죽겠는데, 업무 시간에 왜 싸우고들 그래? 천마, 차 같은 건 네가 혼자 타 먹어. 은진 씨 서류 작성하는 거 안 보여?”

그리고 다시 고은진에게도 말했다.

“천마는 우리 매장의 전문 시공자예요. 시공일이 없으면 인테리어 책을 보는 것까지는 허용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요.”

복복 인테리어의 점심 메뉴는 늘 그렇듯이 중국 음식이다.

후루루룩.

짜장면을 입으로 가져간 천마가 단무지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아삭아삭 소리와 함께 남은 단무지 두 개를 모두 씹어먹자, 고은진이 짜증을 냈다.

“단무지를 왜 혼자 다 먹는 겁니까.”

“마지막 남은 한 젓가락에 맞춰 먹은 것뿐이다.”

“무슨 개소리십니까? 두 개 남아 있음 하나만 먹어야죠?”

천마는 낮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억울하면 빨리 처먹으면 되지 않나.”

“처먹? 그쪽도 처맞아 보시겠습니까?”

‘아.’

볶음밥이 담긴 숟가락을 입에 가져가던 장채원이 벙어리 탄식을 내었다.

천마와 고은진, 두 사람의 사이는 견원지간이 따로 없다.

아니, 실제로 개와 원숭이를 마주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이 정도로 싸우진 않을 것이다.

“에잇, 더러워서 못 먹겠습니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 고은진은 젓가락을 짜장면 그릇에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너나 다 드십쇼!”

“본좌는 다 먹었다.”

“앞으론 너랑 같이 밥 안 먹는단 뜻입니다. 알겠습니까?”

“바라던 바다.”

장채원은 얼마 전 TV 채널에서 쌍둥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고충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운 적은 없지만, 망나니 아들딸이 있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 것이다.

“들었나, 점주. 앞으론 이 요괴를 본좌와 겸상시키지 마라.”

“사장님. 앞으로 선임몬이랑은 밥 안 먹을 겁니다!”

동시에 소리친 천마와 고은진의 말에 장채원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점심 식사를 마친 장채원. 힘없이 자판에 손을 올렸지만 손가락이 선뜻 나가지 않는다.

“끄윽.”

갑자기 속이 더부룩하고 신물이 목구멍에서 올라온다. 아무래도 볶음밥을 먹다 얹힌 것 같다.

최근 매장에서 천마와 고은진과 함께 점심을 하면서부터 이런 증상이 잦아졌다.

“음.”

잔뜩 인상을 찌푸린 장채원은 아래쪽 서랍에서 액상 소화제 하나를 습관처럼 꺼내 마셨다.

꿀꺽꿀꺽. 타악.

탁자에 올려둔 파란색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식후엔 좀 걷는 게 어떤가.”

“어?”

“그렇게 약으로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건 좋지 않다. 그러다 보면 장기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지.”

순간 장채원의 코끝이 화가 난 호랑이처럼 찌그러졌다.

‘뭐야, 지금 누구 때문에 소화불량에 걸렸는데!’

버럭 소리치려던 그녀는 책을 내려둔 채 자신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붉은빛이 도는 눈매는 험악하기 짝이 없지만, 매우 진지한 시선이다.

그 눈동자를 보자 장채원은 조금 화가 누그러졌다.

“알았어. 참고할게.”

“아니면 따뜻한 차를 마셔도 좋다.”

“고, 고마워.”

장채원은 끝끝내 성질을 꽉 눌렀다.

천마가 웬일로 자신을 신경 써주었기 때문에? 아니면 한의사처럼 따듯한 조언을 해주어서?

결코 아니었다.

-점주, 이자는 안 된다!

고은진을 채용하기 전, 천마는 몇 번이나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래. 넌 부득부득 반대했었지.’

이렇게 싸울 줄 알았다면 채용하지 않았을 거야. 천마,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자포자기한 미소를 떠올린 장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현장 좀 둘러보고 올게.”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위장병에 걸릴 것만 같다.

장기건강을 위해, 그리고 정신건강을 위해. 장채원은 천마의 말대로 잠깐 걷고 오려는 것이다.

* * *

“그, 그랬남?”

어느 구축 아파트 인테리어 시공 현장.

철거한 벽에 시멘트를 척척 발라 타일을 붙이던 김찬원은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을 줄은 몰랐구먼.”

장채원의 하소연을 모두 들은 김찬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장채원이 가장 원망하는 건 김찬원이었다.

명확한 이유 없이 취업하려 했던 고은진을 채용한 건 김찬원의 조언이 가장 컸으니까.

-환진일족은 자존심이 강하구먼. 결코 매장에 해가 되진 않을 것이여.

하지만 막상 결과를 보니 시한폭탄 두 개를 나란히 세워둔 것만 같다.

“힘들어서 직원을 뽑았더니 더 힘들어진 셈이에요. 업무량은 확실히 줄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해 검게 그을린 장채원의 눈 밑은, 쌓여 있는 스트레스 수치를 그래프로 보여주는 듯했다.

“크허험.”

당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린 김찬원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일은 잘하지 않능가? 천 씨의 말을 들어보니, 수습 기간도 필요 없을 만큼 이것저것 잘하는 것 같더만.”

사실 김찬원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매장에 해는커녕 일도 잘하고, 서류 작성도 능수능란하게 한다.

다만 천마와 사사건건 부딪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러게요. 일은 참 잘하더라고요.”

하루 종일 커다란 곰 한 마리를 업고 다니는 듯, 지친 얼굴로 중얼거리는 장채원의 표정을 보자 김찬원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미안하게 됐구먼. 천 씨랑 그렇게 싸울 줄은 나도 생각을 못 했네그려.”

“방법이 없을까요?”“회식은 어뗘? 뭐니뭐니 해도 술 한잔 하면…….”

장채원은 두 손을 휘휘 저었다.

“밥을 먹는데도 저렇게 싸우는데 술자리에 데려갔다간… 병으로 머리나 안 내리치면 다행일걸요.”

“그, 그럼 서로 얼굴을 한동안 안 보게 할 순 없남?”

“원래는 가능해요. 은진 씨는 필요할 때만 부르는 자율근무로 채용했으니까요.”

“그럼 해결됐구먼. 한동안 은진 양은 부르지 않는 게…….”

“하지만 요새는 시공 견적 의뢰랑 던전 관리팀 서류 작성만 밀려 있어요. 천마가 할 만한 시공일도, 재료 채취 의뢰도 없고요.”

“으음.”

턱을 쓰다듬던 김찬원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거긴 어떤감?”

“뭐가요?”

“공생(共生:함께 살다) 던전에 보내는 방법은?”

“공생 던전이요?”

장채원은 머릿속에 있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공생 던전.

오직 두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반드시 힘을 합쳐야만 클리어할 수 있는 규칙 던전이다.

또한 던전에 진입한 자의 머릿속 욕망으로 함정이 만들어지는, 매우 독특한 던전이었다.

“그랬다간 두 사람은 영영 던전을 빠져나오지 못할걸요?”장채원이 단호하게 도리질을 했다.

반드시 두 사람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클리어할 수 없는 공생 던전.

자칫 협력이 안 되면 공생 던전은 때론 공사(共死:함께 죽다) 던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천 씨도 은진 씨도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닐 것이여. 막말로다가 나갈 방법이 없으면 천 씨가 어떻게든 수를 쓸 테고.”

그렇다.

천마의 능력이라면 최악의 경우라 해도 어떻게든 던전은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두 사람을 보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공생이 되든, 공사가 되든 말여.”

“공생이 되든 공사가 되든… 말인가요.”

“그랴. 규칙 던전 안에서도 서로 싸우기만 하고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같이 일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김찬원의 은근한 말에 장채원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 상황에서도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그려, 아쉽지만 은진 씨는 복복 인테리어의 직원이 될 순 없는 거겠지.”

입맛을 다신 김찬원이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절대 무명 녀석을 데려가게 하면 안 될 것이여. 어떻게든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줄 테니.”

깊이 고민하던 장채원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 * *

다음 날 아침.

“공생 던전 말이십니까?”

책상에 앉아 아직도 잔뜩 밀려 있는 던전 관리팀 서류 작업을 하던 고은진이 눈을 깜빡였다.

“거길 왜 갑니까?”

“그곳을 클리어하면 나오는 유물이 필요하거든요.”

“거기 클리어해 봤자 나오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 하나인데…….”

공생 던전을 클리어해 봤자, 두 개를 붙였다 떼어냈다 할 수 있는 돌 하나뿐이다.

한때 많은 각성자들이 ‘우정의 증표’라 불리는 이 돌을 얻기 위해 공생 던전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맞아요. 그 유물이 필요해요. 천마와 함께 가져다줄 수 있겠어요?”

장채원의 미소를 본 고은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던전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눈치도 빨랐다.

대번에 장채원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진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싫습니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장채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응접 테이블에 앉아 있는 천마를 향해 말했다.

“천마야. 은진 씨는 가기 싫다는데 어쩌지?”

“맡겨둬라. 금방 처리해 두지.”

“거기, 두 사람이 들어가야만 클리어할 수 있는 곳인데?”

꽉꽉부기를 잡을 때를 말끔히 잊어버린 듯 천마는 혀를 차며 말했다.

“본좌가 말하지 않았나. 결국 이 녀석은 남의 것을 주워다 파는 수준밖에는 안 되는 거다.”

“수준? 말 다했습니까?”

“다 안 했다.”

천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점은 자선 업체가 아니다.”

“무슨 헛소리십니까.”

“점주의 업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직원으로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알겠나?”

고은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겨자씨만큼도 반박할 수 없는 옳은 말이다.

실제로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불통인 천마조차 업무 명령에 관해서는 군소리 없이 따르고 있었다.

물론 신뢰와 금전을 얻지 않으면 내공과 라마스 수리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지만.

“공생 던전이 어떤 곳인 줄이나 아십니까?”

“어디든 상관없다.”

팔짱을 낀 천마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던전이든 본좌는 돌파할 뿐이다.”

“…후회하지 마십쇼.”

이를 깨문 고은진의 말에 천마가 코웃음을 쳤다.

“후회? 본좌는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 * *

후회했다.

공생 던전 입구 앞에 선 채 고은진의 설명을 듣던 천마는 그제야 뒤늦은 후회를 했다.

“네 녀석과 마음이 통해야 돌파할 수 있는 던전이라고?”

“그렇습니다. 어지간히 맘에 맞는 사람끼리 들어가도 클리어하기 어렵습니다.”

“흐음.”

천마는 낭패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장채원의 꾐에 넘어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고의적인 의뢰군. 어쩐지 무명을 데려가지 말라고 하더니만.”

“그러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팔짱을 낀 고은진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서로 그럴 확률은 없잖슴까? 게다가 여긴 품고 있는 욕망을 구현시켜서 함정을 만든단 말입니다.”

“욕망을 구현시킨다고?”

“그렇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 설명은 고은진의 실수였다.

공생 던전의 특성이 오히려 천마의 승부욕과 호기심을 돋워 버린 것이다.

“재밌겠군.”

“예? 뭐가 말입니까?”

“네 녀석의 욕망 따윈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본좌도 모르는 욕망이라니. 한 번 보고 싶군.”

“방금 설명 못 들었슴까? 서로 간의 욕망이라고.”

“상관없다. 본좌는 무엇이든 돌파할 수 있을 테니.”

던전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천마가 고개를 돌렸다.

“두려우면 포기하라. 말리지 않을 테니.”

“우이쒸.”

환진일족은 그야말로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산다.

천마의 도발 버튼에 홀라당 넘어간 고은진이 눈에 불을 켜고 소리쳤다.

“좋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