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던전 앞 자원봉사자 (2)
“상처를 입은 건가.”
“응?”
천마의 시선이 자신의 뒷등에 고정된 것을 본 김찬원이 쑥스럽게 웃었다.
“아아, 별거 아니구먼. 아주 예전에 다친 거여.”
땀에 젖은 김찬원의 런닝셔츠 위로 선홍빛 흉터들이 어지럽게 튀어 올라 있었다. 맹렬히 회전하는 불꽃이 뒷등에 새겨진 듯한 상처다.
“화상이군.”
천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바람을 부리는 김찬원의 뒷등을 녹일 정도라면 자연적인 불꽃은 아닐 것이다.
“마물이었나.”
“아아, 그렇지 뭐어.”
“김 씨의 몸을 태울 정도라면 상당한 마물이었던 것 같은데.”
“별거 아닌 놈이었어. 다만 그 시절엔 요괴라는 걸 부정하고 평범하게 살았던 시절인지라…….”
“요괴라는 걸 부정했다?”
“으응? 아, 아녀, 아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김찬원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요 앞에 부대찌개 아주 얼큰하게 잘하는 집이 있어. 늦으면 사람들이 줄을 서니께 얼른 가서 한 그릇 하고 오자고.”
김찬원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작업복의 겉옷을 걸쳤다.
하지만 눈 밑에 드리운 그늘을 발견한 천마의 눈동자가 또다시 가늘어졌다.
“김 씨.”
“응?”
김찬원의 어깨를 붙잡은 천마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말이다…….”
* * *
D급 던전, 바람개비.
던전 내부엔 몬스터들보다 다양한 식물들이 피어 있는 탓에 각성자들이 거의 찾지 않는다.
때문에 불법으로 히든몬스터들을 불러내 유물을 얻으려는 범죄자들에겐 최고의 장소이기도 했다.
미등록 각성자, 강경수가 바람개비 던전을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런, 씨부랄.’
바람개비 던전 내부.
투명화 스킬을 발휘하고 있던 9급 각성자인 강경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몇 년 전, 투명화 스킬을 이용해 은행을 턴 혐의로 각성자 등록을 취소당한 범죄자였다.
얼마 전 출소한 그는 감방 동료에게 히든몬스터를 불러내 유물을 챙기는 방법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던전에 몰래 들어와 히든몬스터를 소환한 것이다.
‘너무 욕심을 부렸어!’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불나방을 바라보던 강경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람개비 같은 D급 던전 입구 안에서 밖을 향해 이산화탄소 소화기를 뿌리면 히든몬스터, 불나방이 소환된다고 한다.
밖에서 소환된 히든몬스터가 던전 내부로 들어오면 일정 시간 동작을 멈춘다는 법칙을 이용, 날갯짓을 하지 않으면 열기를 배출할 수 없는 불나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서 죽게 된다고 했다.
‘적당히 했었어야 했는데.’
강경수는 이를 깨물었다.
불나방의 유물 ‘화정석’을 잔뜩 얻을 욕심에, 그는 스무 개의 이산화탄소 소화기를 던전 주변에 마구 뿌렸다.
‘젠장. 왜 이리 큰 놈이 나타난 거야?’
그 결과 불나방 스무 마리가 아닌, 거대 불나방 한 마리가 소환되었다.
심지어 던전 안에 들어와도 금세 죽지 않는 엄청난 생명력을 가진, 거대 불나방이 말이다.
‘이 녀석. 내가 투명화 스킬을 펼친 걸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입구를 돌고 있잖아.’
불나방은 몸집만 커진 것이 아니었다.
동작도 매우 빨라지고 지능도 높아졌는지, 강경수가 투명 스킬을 사용하자 숨을 죽이며 던전 입구를 맴돌았다.
‘소리만 내면 불꽃을 뿌려대겠군.’
허공에 떠 있는 거대 불나방을 노려보던 강경수가 이를 깨물었다.
F급 투명화 스킬을 가진 탓에 움직이면 모습이 바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아주 천천히, 조용하게 이동해 재빨리 던전을 나가 구조 요청을 하는 것뿐이다.
‘뭐, 또 감옥에 가겠지만…….’
부르르르.
그때 거대 불나방의 몸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급격히 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생명력이 다 되어 고통스럽게 숨이 멎어가는 것 같았다.
‘됐, 됐다!’
히든몬스터가 던전 안으로 들어오면 죽는다는 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다만 몬스터에 따라 죽는 시간이 차이가 났을 뿐.
부르르르르.
그런데 몸부림치는 거대 불나방이 입구 근처에 숨어 있는 강경수의 앞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강경수는 재빨리 투명화 스킬을 풀고 입구로 냅다 뛰었다.
그러자 거대 불나방도 강경수를 따라 똑바로 날아갔다.
“오지 마!”
재빨리 밖으로 나온 강경수는 바람개비 모양의 던전 입구를 손으로 힘껏 밀었다.
치익.
“으아악!”
강경수의 손바닥은 순식간에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거대 불나방이 뿜어대는 고열로 인해 입구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다.
“으으으.”
하지만 그는 죽을힘을 다해 던전의 문을 밀었다.
여기서 문이 열리면 죽어가는 불나방이 다시 생명력을 되찾을지 모른다.
그러면 구조 요청은커녕 집요하게 쫓아오는 불나방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죽어! 거기서 그대로 죽으라고!”
치이이익.
하지만 문에선 더욱 강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고, 불나방이 몸부림치는 진동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오!”
그때 멀리서 비명 소리를 들은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던전을 돌아다니며 봉사를 하는 9급 각성자, 김광욱이었다.
“도와줘요! 거대 불나방이 던전 밖으로 나오려고 해요!”
“불나방?”
강경수의 외침에 김광욱은 헐레벌떡 뛰어와 바람개비 모양의 문에 손을 뻗었다.
동시에 치익 소리가 들리며 김광욱은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꼈다.
“흐으윽.”
“잘 막아야 해요! 이 녀석이 튀어나오면 끝장이에요.”
“알, 알겠소.”
전력을 다해 문을 밀고 있던 김광욱이 외쳤다.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빨리 구조 요청을 하시오! 어서!”
“알, 알았어요.”
손을 뗀 강경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김광욱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금 뭘 하는 게요? 어서 빨리 구조 요청을…….”
“저, 가석방 중인데다 각성자 등록이 취소된 상태라.”
“뭐라고?”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강경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 이보시오!”
문을 밀고 있던 김광욱이 그 모습을 보고 엉겁결에 팔에 힘을 빼자,
쿠쿵.
그 사이, 커다란 진동과 함께 바람개비 던전의 문이 열리며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으윽.”
뒤로 쓰러진 김광욱이 눈을 뜨자,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불나방 한 마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던전에 숨어 있던 자가 김광욱이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허허. 이게 내 마지막인가.”
언제든 죽을 각오는 되어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나방 형태의 몬스터를 바라보자, 오히려 김광욱은 편안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내게 어울리는 최후구먼.”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
그렇군.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고 마음먹게 된다면,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거였나…….
김광욱의 입가엔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시뻘건 불꽃이 시야를 뒤덮자,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허업!”
그런데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김광욱의 등 뒤로 시원한 바람이 쏟아졌다.
후우우우웅!
맹렬한 바람과 함께 눈앞으로 쏟아지던 화염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하늘 위로 올라갔다.
“으응?”
눈을 뜬 김광욱의 앞에는 깡마른 남성이 우뚝 서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더러운 작업복 같은 옷에, 얼굴에는 이상한 주전자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누, 누구시오?”
김광욱이 더듬거리자 주전자 가면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또박또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나가는, 각성자입니다.”
끝말을 높이 올리는, 매우 어색한 말투였다. 마치 사투리가 심한 사람이 억지로 표준말을 하는 듯하다.
초점 없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던 김광욱이 고개를 숙였다.
“감, 감사하오. 덕택에 살았구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삐그덕 거리는 동작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주전자 가면이 갑자기 김광욱의 몸을 자신의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화르르르.
어느새 다시 돌아온 거대 불나방이 시뻘건 불길을 쏟아낸 것이다.
“허업!”
하지만 주전자 가면이 한 손을 가볍게 휘젓자 쏟아지는 불길이 다시 되돌아갔다.
투르르르.
쏟아내는 불꽃이 번번이 빗나가자, 거대 불나방은 화가 났는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조, 조심하시오.”
김광욱의 말에 주전자 가면이 덤덤하게 말했다.
“걱정일랑 하덜…. 험험. 걱정하지 마십세요.”
주전자 가면이 횡설수설하며 이상한 말을 할 무렵, 하늘에선 하얀 연기와 뜨거운 불꽃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치이이. 두두두둑.
뜨거운 열기와 불꽃이 하늘에서 쏟아지자, 주전자 가면은 양손을 잠시 눈앞으로 세웠다.
그러자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끝에 바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쿠우우우.
미풍처럼 불어오던 바람은 이내 폭풍과도 같은 사나운 바람으로 바뀌었다.
“이여업!”
기합 소리와 함께 양손에 맺혀 있던 바람을 쏟아내자 사나운 바람이 하늘 위로 쏘아졌다.
콰르르르르.
거대한 바람은 거대 불나방이 쏟아내었던 불꽃과 연기를 모조리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투르르르.
“흥.”
놀란 불나방이 동작을 멈출 무렵 주전자 가면이 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쩌억.
칼날 같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거대 불나방은 허공에서 두 조각이 되었다.
우수수수.
바닥에 떨어진 거대 불나방의 몸에서 붉은 돌이 와르르 쏟아졌다.
바로 각성자 상점에서 고가로 팔리는 던전 재료, 화정석이었다.
“대, 대단하시오. 아주 놀라운 스킬을 가지셨구려.”
놀라움이 뒤섞인 탄성을 뱉은 김광욱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힘들게 스킬을 허비해 가며 이 늙은이를 구해줘서 참말로 고맙소이다.”
그리고 한 손을 뻗으며 빙그레 웃었다.
“별거 아닌 9급 각성자 김광욱이라 합니다. 그쪽 분께서는…….”
“별말씀을요. 저는 그냥 주전자라고 불러주십쇼.”
주전자 가면이 양손을 휘휘 젓자 김광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젊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목소리가 꽤나 탁하고 손등에도 성긴 주름이 많았다.
“그렇구려. 정말 감사드리오.”
“그런데 왜 혼자서, 위험하게 던전을 돌아다니시는 것입니까.”
주전자 가면의 물음에 김광욱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게 말이오. 예전에 오랜 동료에게 도움을 받아서… 저도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거지요.”
“자세히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겠습니까.”
주전자 가면의 말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김광욱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말이오.”
“꼭 듣고, 싶습니다.”
“으음. 하긴 생명의 은인이시니…….”
김광욱은 짧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주전자 가면이 김광욱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외다. 뭐든 편하게 말씀하시구려.”
“저도 과거에 비슷한 일을 겪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전자 가면의 스피커에선 아주 작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광욱 씨를 도와준 친구분은 분명히 광욱 씨가 괴로워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그거야 그렇겠지요.”
“아니, 제대로 들으십시오. 만약 이 일로 광욱 씨가 평생 동안 괴로움에 빠질 거라는 걸 알았다면, 불길 속에서 웃을 수 있었을까요?”
그 순간 김광욱은 자신에게 미소를 보이며 손짓하던 동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의 표정은 고통보다는 오히려 기쁨에 가까웠다. 그것은 분명 기꺼운 미소였다.
“그렇다고 해도… 믿었던 동료를 배신한 내가 어찌 마음 편히 살 수 있겠소이까.”
“배신은 믿음을 저버릴 때가 배신입니다.”
주전자 가면이 김광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친구는 분명 광욱 씨가 무섭고 두렵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 입구에 들어가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길을 몸으로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무슨…….”
“그렇게 몸이 날래고 눈치가 빠르다던 친구가, 광욱 씨가 그곳에 먼저 들어가려는 걸 몰랐을 리 없을 테니까요.”
주전자 가면에선 엄숙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미 알고 있기에 웃을 수 있었을 겁니다. 어차피 그 출구는 두 명이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김광욱 씨가 꼭 무사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순간 김광욱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위로의 말이었다.
하지만 주전자 가면의 목소리에는, 수십 년간 뿌리박혀 있던 죄책감을 녹여주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친구도 괴로워서 눈을 감을 수 없을 겁니다. 그걸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전자 가면의 목소리에 김광욱의 한쪽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이 흘렀다.
“고맙구려.”
다시 고개를 숙인 김광욱이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소만… 그 친구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려.”
“알았다면 이제부터 지발 편하게 살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주전자 가면의 스피커에선 매우 낯익은 억양과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함을 느낀 김광욱이 고개를 들자,
“…라고 친구분은 말했을 것입니다.”
휘이이잉.
던전 입구 근처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주전자를 뒤집어쓴 그림자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 폭풍과도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세찬 바람이 사라지자 간신히 눈을 뜬 김광욱이 주변을 살펴봤지만, 주전자 가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선술집 노병, 창가 구석 자리.
타타타탁.
테이블 아래에 설치된 작은 화로에서 구수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여러 가지 꼬치구이가 올려진 화로를 내려다보던 김찬원이 천마에게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바로 천마가 일일일선에게 빌린 주전자 가면이었다.
“덕택에 잘 썼어. 잘 닦아서 다시 포장했구먼.”
“그냥 가져가라. 본좌도 선물 받은 거니까.”
“으응? 그, 그려.”
김찬원이 다시 보따리를 내려놓자 천마가 말했다.
“그런데 왜 모습을 숨긴 건가.”
“으응?”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김 씨의 모습을 보였다면, 그 양반도 마음이 편했을 텐데. 아닌가?”
천마의 물음에 김찬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구먼…….”
잔에 가득 채워진 삼복구를 쭉 들이켠 김찬원이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잘못된 판단 때문에 수십 년 하루도 편히 산 적이 없다는 친구 녀석에게… 어떻게 지금에 와서 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나.”
고개를 숙인 김찬원의 눈에선 굵은 눈물방울이 쏟아졌다.
김광욱을 도와주었던 당시의 친구이자 동료는, 천마의 예상대로 김찬원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김광욱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던 천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 씨의 능력이라면 그깟 불 좀 쏴대는 마물을 치우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왜 그런 행동을 한 건가.”
천마의 물음에 김찬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에 내는 그저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을 했었구먼. 그래서 총을 들고 인간들과 함께 싸웠지. 하지만…….”
깊은 심호흡을 한 김찬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던전이 안정화되지 않는 한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당시의 신분을 모두 버리고, 요괴 본연의 모습으로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잡고 인간들을 구했어.”
늙어버린 김광욱의 얼굴을 떠올린 김찬원이 통곡 같은 탄식을 했다.
“하지만 그 친구가 그 일로 지금까지 괴로워할 줄 몰랐구먼. 알았다면… 그렇게 훌쩍 떠나지 않았을 게야.”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라.”
“아니, 너무 늦어부렀어.”
김찬원은 취기가 올랐는지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던전이 출현한 초창기 시대엔 각성자들도 몬스터 취급을 받을 때가 있었지. 그리고… 요괴들도 마찬가지였어.”
“무슨 말인가.”
“눈앞에서 불타버린 친구가… 사실은 요괴였다고. 그동안 요괴라는 걸 속였다고 하기엔 너무 늦은 게지.”
삼복구가 담긴 주전자를 집어 잔을 채우는 김찬원의 눈동자는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내는 요괴라는 걸 알리기 싫어 광욱이를 찾지 않았구먼. 하지만 그것이 그 친구를 더 괴롭게 만들었을 줄이야.”
쿵.
결국 김찬원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마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쭉 들이켰다.
“으음.”
독한 삼복구의 풍미가 입 안으로 넘어갔지만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맺혀 있는 김찬원의 얼굴을 보자, 오열하듯 지난 이야기를 꺼내던 김광욱의 모습이 떠올랐다.
“옳은 말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
괴로움에 지쳐 잠든 김찬원의 표정을 바라보던 천마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천마의 손에는 자색의 빛이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마물로부터 세상을 지켰으니, 좋은 꿈을 꿀 권리쯤은 있겠지.”
혼신의 힘을 다해 내공을 끌어올린 듯 천마의 눈에선 혈염광휘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곳에서라도 해후하기를.”
그리고 손에 머무른 자색의 광채를 김찬원의 머리에 주입시켰다.
* * *
맹렬한 바람과 함께 눈앞으로 쏟아지는 불나방의 화염이 순식간에 하늘 위로 올라갔다.
“으응?”
눈을 뜬 김광욱의 앞에는 깡마른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머리만 희끗할 뿐, 장년의 피부를 가진 노인의 옆얼굴을 바라본 김광욱은 펄쩍 뛰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수십 년간 가슴에 한이 되었던 장본인, 김찬원의 얼굴이 아닌가?
“자, 자네는…….”
“오랜만이구먼. 그동안 잘 지냈능가?”
고개를 돌린 김찬원이 씩 웃자 김광욱의 눈에선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자네가 어떻게…….”
김찬원은 오열하는 김광욱에게 두 팔을 벌렸다.
“그동안 맴 고생이 정말 많았지?”
오랜 친구의 품을 꼭 끌어안은 김광욱.
그러다 김찬원의 목 뒤로 붉게 타버린 상처를 발견하고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미안하네. 자네를 두고 가서…….”
“아니여. 나도 자네를 속여서 미안허이. 그토록 힘든 날을 보내게 해서 정말 미안혀”
“아니야. 아니야.”
김광욱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에게 이렇게 직접 사과할 수 있어서 정말 꿈만 같네. 정말 다행이야.”
김광욱은 평생 김찬원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전쟁터에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을 이끌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김찬원을 찾아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광욱이, 우선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지.”
“그, 그러자고.”
김찬원과 김광욱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나갔다.
오늘 두 사람은 밤을 지새우며 통음을 할 것이다. 수십 년간의 묵혀둔 우정과 추억을 안주 삼아.
비록 이곳이 현실이 아닌, 꿈속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