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꽉꽉부기의 알 (2)
“군집형? 그건 또 뭐냐.”
천마의 물음에 무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수의 개체가 정신과 육체를 공유하는 몬스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저 곤충과 인간을 섞어놓은 듯한 백 마리의 몬스터가 하나의 ‘까망병사’라는 뜻입니다.]
무시무시한 히든몬스터가 등장했음에도, 천마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육체를 공유한다라. 그렇다면 하나만 죽이면 백 마리가 다 죽겠군.”
[그 반대입니다. 백 마리를 빠짐없이 죽여야 모든 개체가 소멸됩니다. 그것이 저게 위험도 1만에 육박하는 이유이고요.]
즉, 한꺼번에 죽이지 않는 한 끊임없이 부활한다는 뜻이었다. 소수정예로 돌아다니는 각성자들에겐 악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대체 한 번도 보기 힘든 히든몬스터가 왜 갑자기 등장…….]
낮게 중얼거리던 무명은 문득 던전 곳곳에 찍혀있는 거대한 주먹과 손자국들을 발견했다.
바로 일전에 들어왔던 천마가 쏟아낸 회심절기, 권마칠식의 흔적들이었다.
[아.]
무명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가 강력한 힘을 사용할 때면, 대체로 이런 부작용이 일어났다.
“대체 뭡니까. 저런 히든몬스터가 왜 여기서 등장하는데?”
다가오는 까망병사들을 바라보던 고은진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저런 거 난 질색입니다! 먼저 중심부로 가 있을 테니, 알아서 오십쇼.”
[위험합니다!]
그때.
-쿠루루룩!
기괴한 소리와 함께 달려온 까망병사가 사마귀의 앞발과 같은 날카로운 손을 고은진에게 휘둘렀다.
지이잉.
그 순간, 고은진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달려오는 까망병사를 통과하듯 지나쳤다.
[와아, 저건 S급 다중 스킬인 페이징(물질 통과)과 비슷하군요.]
고은진은 놀랍게도 각성자들의 스킬과 비슷한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명의 탄성에 달려가던 고은진이 소리쳤다.
“흥, 난 5초 동안 사용할 수 있다고.”
페이징은 지속시간이 3초 내외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고은진은 페이징 스킬을 능가하는 지속시간을 가진 셈이다.
지이잉.
또다시 흐릿한 형태가 되어 까망병사 사이를 통과한 고은진을 바라보며, 무명이 중얼거렸다.
[저렇게 연달아 페이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다칠 일은…….]
“야,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쿠루루, 쿠루룩!
통로 끝자락에 도착할 무렵, 고은진은 까망병사에게 둘러싸였다. 스킬의 성능은 뛰어나지만, 재사용 대기시간은 오히려 스킬 사용자들보다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징그러! 저리 가라고!”
능력이 비활성화되자,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꼴이 되었다.
[역시… 재사용 대기시간이 생각보다 긴 것 같군요. 저런 실력으로 어떻게 민간군사기업에서 용병생활을 한건지…….]
무명이 열심히 고은진의 능력을 분석할 무렵.
“이익!”
까망병사에 포위된 고은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순간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투명한 그림자가 그녀의 몸에서 분리되듯 튀어나왔다.
환진일족의 고유 능력, 정신력으로 육체를 창조하는 신병기사를 소환한 것이다.
지이잉!
투명한 안개처럼 떠다니던 신병기사는 일순간 육체를 만들어 까망병사 무리를 우수수 쓰러뜨렸다. 그렇게 포위망이 뚫리자 고은진은 재빨리 반대편 통로에 도착했다.
-쿠루룩!
목표를 잃어버린 까망병사들은 주위를 둘러보다 멀뚱히 서 있는 천마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흥.”
코웃음을 친 천마가 일권을 쭈욱 뻗어냈다. 퍼엉 소리와 함께 달려오던 까망병사 무리가 우수수 쓰러졌다.
그렇게 바닥에 쓰러져 비틀거리던 까망병사는 이내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뛰어오기 시작했다.
-쿠루루루룩!
어느새 백여 마리의 까망병사들은 천마를 둥글게 포위했다.
“권마칠식, 권마무도!”
수백 개의 손 그림자가 천마의 등 뒤에서 펼쳐지더니, 까망병사에게 한꺼번에 쏟아졌다.
파파파파팍.
순식간이었다.
백 마리의 까망병사들에게 빠짐없이 일권씩 격중되면서 전부 쓰러져 버린 것은.
하지만 운 좋게 완벽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까망병사가 남아있는 탓에 하나둘씩 부활하기 시작했다.
“꽤 단단하군.”
일 갑자도 채 되지 않은 내공으론 백여 마리의 까망병사를 절명시킬 수 없었다. 다시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바라오는 천마는 긴 호흡을 들이마셨다.
어쩔 수 없이 천마대능력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때 무명이 재빨리 천마를 제지했다.
[천마 님. 저희 목적은 어디까지나 꽉꽉부기의 알입니다. 이곳에서 헛되이 체력을 소모할 필요 없습니다.]
“흠.”
잠시 고민하던 천마는 땅을 힘껏 박차 까망병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쿠룩!
까망병사들 역시 허공에 뛰어올라 천마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야월극속을 펼친 천마는 빛처럼 반대편 통로로 쏘아져 나갔다.
길고 긴 통로가 이어질 무렵, 따라오던 까망병사의 등이 풍뎅이처럼 불룩해졌다.
-부우우웅.
불룩해진 갑주에선 시꺼먼 날개가 튀어나오더니, 천마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쫓아오잖나.”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군집형 히든몬스터들은…….]
대답하던 무명이 입을 다물었다. 까망병사 한 마리가 천마의 뒷등까지 바짝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퍽.
천마의 왼 주먹이 반원을 그리며 까망병사의 안면을 후려쳤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깨진 까망병사는 금세 육체를 부활시키고 다시 날아왔다.
“흥!”
마치 벌떼처럼 달려드는 까망병사들을 바라보던 천마의 눈에서 혈염광휘가 솟구쳤다.
“천마대능력!”
파앙!
타오르는 불꽃이 천마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 뒤를 바라보던 무명의 눈 센서에서 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한 놈이…….]
날아오는 까망 병사의 숫자를 대번에 파악한 무명이 소리쳤다. 그 숫자는 99마리. 즉, 어느 한 놈이 몸을 숨겨, 부활의 능력을 유지시키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천마 님! 병사 중 한 마리가…….]
“권마칠식, 천수공파!”
하지만 천마는 이미 공격을 시작했다.
비처럼 권력을 쏟아내는 권마무도 대신, 단숨에 모든 범위를 쓸어버리는 천수공파를 사용한 것이다.
[안 됩니다!]
하지만 무명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콰앙!
천수공파의 막강한 힘이 쏟아졌다.
[어, 어라?]
무명이 눈을 깜빡였다. 모든 걸 파괴하는 천수공파의 힘이 까망병사들이 아닌 천장으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콰르르르릉.
좁은 통로의 천장이 무너지자 달려오던 까망병사들은 돌무더기에 막혀 더 이상 날아오지 못했다.
-키에에에에!
몸은 단단하고 팔은 예리하지만, 강력한 근력이 없는 까망병사들은 돌무더기를 치우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한 마리가 모자라단 걸, 천마 님도 발견하셨군요.]
“네 녀석이 아는 걸 본좌가 모를 리 있나.”
[그런데 까망병사들의 근력이 돌무더기를 들지 못할 만큼 약하다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설명을 드리지 않았는데…….]
천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오만 시러베자식 잡놈들과 싸워보면 알게 되지.”
엄청난 연산능력과 다양한 센서들을 장착한 무명.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천마 역시, 무명에 못지않은 안력과 분석,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천마 님에게 잡놈 소리를 듣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군요.]
문득, 무명은 일격에 하늘을 찢어발기는 듯한 괴력의 천마에게 덤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렇다면 그자는 단순한 잡놈은 아닐 것이다.
“무슨 소리냐.”
이런 무명의 헤아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마는 무심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바라보며 무명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엔 정말 위험했습니다. 갑자기 던전 속에서 히든몬스터가 등장하다니…….]
순간 무명의 머릿속엔 의문이 들었다. 혹시 천마가 던전의 벽 곳곳에 흔적을 남긴 것 때문에 히든몬스터가 등장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천마 님은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세계의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답은 알 수 없었다. 문득 무명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들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위험할 것도 없었다.”
천마는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떤 상황에서도 활로를 찾고 승기를 잡아낼 자신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고금제일인인 천마였다.
마침내 천마가 던전 중심부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하자, 몸을 웅크린 고은진이 손가락에 입술을 대었다.
“쉿. 조용히 오십쇼.”
“뭔가.”
“저 녀석,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슴돠.”
그녀가 가리킨 곳엔 까마득히 먼 곳엔 접시 형태의 앞에 올라가 있는 꽉꽉부기가 있었다.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탓에 깨알 같은 점으로 보였지만, 천마와 무명 그리고 고은진은 꽉꽉부기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보았다.
[역시나 중심부 입구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꽉꽉부기는 알은 깨지 않는군요.]
하지만 던전 중심부로 들어가는 이 입구만 넘어서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알을 깨뜨리는 녀석이었다. 근처에 무슨 감지 센서라도 달린 걸까? 하지만 그럴 리 없다.
각성자들조차 속이는 천마의 은신술, 그리고 안개처럼 몸을 감출 수 있는 고은진의 신병기사.
이 두 가지 기술은 설령 S급 감정 스킬을 가진 각성자라 해도 단시간에 알아챌 수 없다.
그런데 고작 B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감지한다니? 어불성설이다.
위이이이잉. 끼리리릭.
무명에게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주변을 살피던 무명의 눈 센서에서 흘러나오는 빛 깜빡임도 잦아졌다. 던전 중심부를 샅샅이 조사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고도의 연산 작업을 마친 무명이 마침내 눈 센서를 번뜩였다.
[드디어 저 꽉꽉부기의 비밀이 풀린 것 같습니다.]
“정말? 그게 뭔데?”
고은진의 물음에 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분석결과, 꽉꽉부기는 각성자들의 침입이나 기척을 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응? 그럼 뭘 감지하는데?”
[의지입니다.]
“뭐?”
[꽉꽉부기는 알을 채가려는 의지를 감지할 수 있는 겁니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고은진은 입을 벌렸다.
“그게 말이 돼? 그럼 쟤는 이미 우리의 의지를 느끼고 알을 깨뜨려야 하잖아?”
[꽉꽉부기가 의지를 감지할 수 있는 범위는 아마도 400미터 전후, 즉 던전 중심부에 들어서기 전까지겠죠. 때문에 던전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겁니다.]
고은진은 벌린 입을 다물었다. 무명의 추리는 황당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정신력으로 존재를 형상화하는 신병기사를 찾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무명은 아까 고은진이 발휘한 신병기사의 형태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것은 어떠한 센서나 감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독특한 형태였다. 설령 꽉꽉부기에게 감지 스킬이 있다 해도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도감에는 이런 것들이 안 적혀있지?”
[꽉꽉부기는 대한각성자협회의 관심 대상이 아니니까요. 돈이 되지 않는 몬스터나 유물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도 미비한 편입니다.]
눈 센서를 축소시킨 무명이 자못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꽉꽉부기의 알을 채취할 수 있는 작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던전 입구로부터, 알을 탈취하려는 타인의 의지를 감지할 수 있는 꽉꽉부기. 그것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무명은 천마와 고은진의 능력을 이용해 알을 채취할 전략을 설명했다.
[…이 계획대로라면 반드시 온전한 알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설명을 마친 무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지만 성공 확률은 30퍼센트 남짓으로 예상지만요]
“30퍼센트? 왜?”
고은진의 말에 무명이 천마를 힐긋 바라보았다.
[성공을 위해선 두 분의 완벽한 합이 필요하니까요.]
그렇다. 쳐다보기만 해도 서로 혐오스러운 표정과 거북한 눈빛을 쏘아대는 천마와 고은진.
이런 상태에서 완벽한 합이 나올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30퍼센트라.”
고은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잘은 모르지만 느낌적으로 이 나노봇의 분석은 꽤나 정확한 것 같다.
나노봇의 말대로라면 마음가짐을 바꿔먹지 않으면 이 작전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흠흠. 그래도 오늘 꽤나 같이 고생하지 않았슴까?”
헛기침을 한 고은진이 천마에게 다가와 한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감정은 접어두고. 어떻습니까? 제대로 해보는 건.”
“뭐냐.”
하지만 천마는 그녀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고은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 쪼잔한 자식! 사람, 아니 요괴가 먼저 화해를 신청했는데 감히 무시해?’
내민 손을 회수한 고은진이 이를 깨물 무렵.
[천마 님. 고은진 님은 천마 님에게 화해의 뜻을 보낸 겁니다. 저 손을 내미는 걸 악수라고 하고요.]
‘엥?’
뭐야, 그럼 악수가 뭔지 몰라서 ‘뭐냐’라고 한 거야?
고은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벌릴 무렵, 천마가 낮게 말했다.
“희망적인 말 따윈 필요 없다.”
“무슨 말입니까?”
“행동으로 보여라. 회색눈깔 요괴.”
줄곧 그녀를 회색눈깔이라고 불렀던 천마가, 처음으로 요괴단어를 하나 더 붙여주었다.
고은진은 그것이 천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의(和議:화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좋습니다. 선임몬.”
근육몬에서 선임몬으로 별명을 변경한 고은진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느긋하게 탑 위에 서 있는 꽉꽉부기를 바라보며 손바닥과 주먹을 마주쳤다.
“행동으로 보여드리죠.”
* * *
강력한 요력을 뿜어낸 고은진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웅혼한 요력과 환진일족 특유의 정신 파동이 교차하자, 하얀 안개가 그녀의 등 뒤에서 피어올랐다.
지이잉.
낮음 떨림과 함께 마침내 그녀의 머리 위에서 투명한 신병기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신병기사를 꽉꽉부기가 있는 탑으로 보내시되, 절대로 알을 뺏는다라는 의지가 아닌, 가까이 다가간다는 생각만 하셔야 합니다.]
무명이 말에 눈을 번쩍 뜬 고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투명한 신병기사는 꽉꽉부기가 있는 접시탑 위로 훨훨 날아갔다.
“과연, 알을 파괴하지 않는군.”
투명한 신병기사가 등 뒤에 바짝 서 있음에도, 꽉꽉부기는 알을 부수지 않았다.
오직 강탈의 ‘의지’를 감지한다는 무명의 추리가 들어맞은 것이다.
[천마 님. 준비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천마의 몸에서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바람과 붉은빛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천마대능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고은진 님. 이제 천마 님이 전력을 다해 탑으로 날아갈 것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고은진의 눈은, 신병기사를 부리고 있는 탓에 옅은 회색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후우.”
깊은 심호흡을 한 천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혈광이 더욱 짙어졌다.
쩌저적.
전력을 다해 야월극속을 끌어올리자 천마가 내디디고 있는 땅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입니다!]
콰우웅!
귀가 찢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천마의 몸뚱이가 접시탑으로 쏘아져 나갔다.
번쩍!
은신술을 펼치지 않은 탓에, 꽉꽉부기는 전력으로 날아가는 천마를 한눈에 발견했다.
-꾸우!
붉은 구름이 되어 쏘아오는 천마에게 강탈의 의지를 감지한 꽉꽉부기가 비명을 지르며 알을 꽉 쥐려는 찰나.
지이잉.
모습을 드러낸 고은진의 신병기사가 꽉꽉부기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꾸후후후후!
간지러움을 못 이긴 꽉꽉부기가 알을 놓치는 순간이었다.
그때.
휘리릭.
쏘아진 천마의 붉은 신형이 들고 있던 알을 낚아채었다.
“됐다.”
천마의 손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사실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지만) 꽉꽉부기의 완벽한 형태의 알이 들려 있었다.
샤라라라랑.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시각각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 빛은 무심한 천마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고은진이 무명을 번쩍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해냈어! 해냈다고!”
-꾸-후!
반면 알을 뺏긴 꽉꽉부기는 탑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구슬피 울었다.
* * *
목함을 열자 커다랗고 둥그런 알이 반짝이고 있었다.
“와아…….”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내 뿜는 꽉꽉부기의 알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탄성을 질렀다.
“이게 이렇게 빛을 내었구나.”
꽉꽉부기의 알은 사람의 시선을 홀리는, 보일 듯 말 듯한 빛을 뿜어냈다.
“아무도 온전한 알을 얻은 적이 없어서… 몰랐던 거야.”
넋을 잃고 알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다시 조심스럽게 목함을 닫았다.
“수고했어!”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천마의 어깨를 토닥인 장채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히 정말로 온전한 상태의 알을 가져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고생 많았어. 던전관리팀에서도 좋아할 거야.”
그리고 멀찌감치 서 있는 고은진에게도 말했다.
“은진 씨도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별 말씀을요.”
‘고생을 같이 하니 금세 친해졌나? 이젠 안 싸우네?’ 하고 생각하던 장채원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을 무렵.
“다 본좌의 덕택이다. 감사한 줄 알아라, 회색눈깔 요괴.”
“무슨 헛소리십니까? 알 깨지는 걸 막은 건 납니다. 선임몬.”
“본좌의 신법만이 그만한 속도를 낼 수 있지. 요괴.”
“의지를 갖는 창조물인 신병기사는 나만 만들 수 있잖습니까. 근육몬 인족?”
어느새 새로 추가된 별명으로 부르며 으르렁대는 둘을 보며 장채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상한 별명 좀 부르지 마’
그때 고은진이 장채원을 바라보며 회색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럼 저도 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에요. 이미 던전에 갔을 때 직원으로 등록해 놓은걸요.”
장채원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던전 식재료라면 언제든 채취할 수 있도록, 신계의 허락도 받았고요.”
“정말입니까?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은진 씨.”
“넵! 열심히 하겠슴다!”
깍듯이 경례를 올려붙인 고은진은 아이스박스를 짊어지곤 뒷문으로 향했다.
“그럼 오늘은 다른 일은 없으니, 재료 좀 채취하고 와도 되는 거죠?”
“네? 근데 정식 출근은 다음 주부터 하신다고…….”
하지만 고은진은 이미 뒷문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에고고.”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처럼 탄식을 내뱉은 장채원은, 문득 응접 테이블에 앉은 천마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건 꼭 물어보고 싶단 말이지.’
그녀는 무심하게 앉아있는 천마의 얼굴을 보자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때?”
“뭐가 말인가.”
“은진 씨 말야.”
그 순간, 책장을 넘기던 천마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장채원의 질문엔 여러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천마는 어떻게 대답할까? 그녀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
“말투도 이상하고 말허리를 자꾸 끊어먹더군.”
“말허리를 끊다니?”
“‘너만 힘듭니까? 나도 그렇슴돠.’ 같은 이상한 화법과 말투를 계속 번갈아 사용한다.”
“그게 다야? 다른 건 없어?”
장채원의 시선을 피한 천마는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렸다.
“상당히 건방지고 머리통엔 우동사리만 들은 것 같다.”
“또?”
“육체단련도 게을리하는 것 같고, 일전에 보니 꼬치요리를 제외하곤 요리 솜씨도 별로인 것 같더군.”
“그게 다야?”
“흠. 사리분별을 못 하고…….”
집요한 장채원의 눈빛에 천마는 침음을 내었다. 이대로 계속 말했다간 영원히 문답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눈치도 없는 것 같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책장을 넘기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아주 쓸모없진 않더군.”
“그래?”
마침내 원하는 대답을 들은 장채원은 두 손을 턱에 괸 채 만개한 장미처럼 활짝 웃었다.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