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꽉꽉부기의 알 (1)
[놀랍군요. 천마 님을 쫓아다니며 부산물을 줍던 각성자가 요괴, 그것도 환진일족이었다니요.]
지금까지 줄곧 침묵하던 무명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하필 저희 매장의 직원이 될 줄이야… 정말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어젯밤, 무명은 천마에게 모든 사정을 들은 터였다. 그런데 직접 보니 두 사람의 사이는 이야기를 들은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특히나 환진일족은 매우 자존심이 강한 요괴다. 그런데 오만함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천마와 일을 한다면? 사사건건 부딪칠 것이 불 보듯 빤했다.
“본좌도 이해가 안 간다.”
무명의 말을 잘못 해석한 천마가 입맛을 다셨다.
“점주에게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저 능력 없는 요괴를 왜 뽑았는지 도저히 모르겠군.”
[그렇지 않습니다. 환진일족은 풍령일족과 더불어 상급요괴 중에서도 최상급의 힘을 가졌습니다. 아직 정확한 실력은 아직 가늠할 수 없지만, 최소 B급 던전 정도는 홀로 클리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본좌가 죽인 마물의 부산물을 줍는 녀석이 말인가.”
[이곳으로 이동할 때의 속도를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무시무시한 각력(脚力:다리힘)만 보더라도 3급 각성자의 육체에 버금가는 수준입니다.]
천마는 지금까지 이 세계, 특히 던전이나 각성자에 대한 질문을 극도로 자제했다. 인테리어 업무와 상관이 없는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관심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요괴, 고은진을 칭찬하는 무명의 말에 문득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던전과 각성자들의 등급이라는 것 말이다.”
[네? 등급이요?]
“그렇다. 본좌는 이해가 잘 안 가는군.”
[아, 그러셨습니까?]
무명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던전과 각성자.
이 두 가지에 대해선 무심하다 못해 냉정할 만큼 관심이 없던 천마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
[그럼 먼저 각성자 등급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래야 던전 등급 설명이 이해가 빠를 테니까요.]
“마음대로 하라.”
[먼저 각성자는 9급부터 1급까지 나뉩니다. 각성자의 등급은 육체 등급과 스킬 등급을 총점으로 평가합니다. 등급에 영향을 크게 끼치는 건, 아무래도 육체 등급보다 스킬 등급이고요.]
“육체 등급?”
[그렇습니다. 육체 등급은 신체 능력이 얼마나 진화했는가를 퍼센트로 표시한 겁니다. 스킬 등급은 지금까지 발현된 스킬들의 위력, 범위, 희귀성 등을 고려해 F부터 SSS등급까지 분류되어 있습니다.]
천마는 이해력이 매우 빨랐지만 단번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육체 등급이 낮고 스킬 등급이 높다면, 최종 등급을 어떻게 정하나.”
[아주 좋은 질문이십니다! 하지만 S급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육체각성의 시작점인 11퍼센트 정도로 각성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체로 스킬 등급이 높으면 육체 등급도 높게 나타납니다.]
“간단하군.”
[하지만 예외도 있습니다. 천마 님의 말씀대로 육체 등급이 낮은데 높은 등급의 스킬이 발현되는 경우죠.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 등급을 정해줍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무명이 곧 쉬운 예시를 들었다.
[예를 들어 저희 앞집에 사는 초홍 씨는 SS급의 정신 조작 스킬을 보유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육체 등급이 현저히 낮아 3급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초홍의 스킬은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협회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한 무명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흠.”
곰곰이 이야기를 듣던 천마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등급은 한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 건가?”
[대체로는 그렇습니다.]
“듀라한에 시달리다 광전사의 갑옷 스킬을 얻은 말총머리 놈과, 메탈 K로 인해 소음공해 스킬을 얻은 녀석이 있잖나.”
[아, 그건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각성자들은 때때로 재각성 혹은 극한각성을 하거든요. 일전에 TV에 나와 인기를 끌었던 <나는 오늘도 살아있다>의 작가이자 1급 각성자 윤지환 씨처럼요.]
“재각성과 극한각성이라. 본좌의 귀에는 비슷한 말로 들리는군.”
[아닙니다. 재각성은 갖고 있지 않은 새로운 스킬을 얻는 것이고, 극한각성은 갖고 있는 스킬이나 육체 등급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천마의 눈에 살짝 흥미가 떠올랐다.
무림인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재각성은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 것. 극한각성은 갖고 있는 무공을 한 단계 더 증진시킨다는 뜻이었다.
“그런 게 있다면 왜 다들 등급을 올리지 않는 거지.”
[방법을 모르니까요.]
무명의 목소리엔 다소 민망함이 섞여있었다.
[재각성이나 극한각성이 왜 일어나는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아직 밝혀진 바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극한의 육체 단련을 통해 각성이 일어난다고 하기도 하죠.]
천마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이곳의 각성자들이나 무림인들이나, 결국 생각하는 건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들이 하는 짓은 다 똑같군. 무림인들도 십대검객이니 백대고수니 하면서 등급을 정해두곤 했으니.”
[네?]
“무공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한 치의 발전도 없는 시기가 온다. 범인들은 그걸 ‘한계’라고 말하며 노력을 멈추지. 그리고 마치 근수에 따라 분류된 가축들처럼 스스로의 등급을 못 박더군.”
천마는 실드의 빛깔과 겹쳐 보이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스운 일이지. 본좌는 발전을 가로막는 ‘그것’을 오히려 도약의 발판이라고 생각했다. 가로막는 것이 있다는 건, 밟고 오를 수 있는 위가 있단 뜻이니까.”
[아…….]
천마의 말을 음미하던 무명이 탄성을 질렀다. 보통 한계에 도달하면 그것을 ‘부순다’ 혹은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천마는 애당초 ‘한계’라는 것을, 오히려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로 인지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천마가 고금제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비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천마 님께 아주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감탄한 듯 무명은 한동안 침묵하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럼 각성자 등급에 대한 건 이해가 되셨습니까?]
“그렇다.”
[그럼 좋은 말씀을 들은 보답으로 몬스터의 위험 등급에 대해 아주아주 상세히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던전 등급의 분류 방법도 이해가 될 겁니다.]
무명은 다시 신이 난 목소리로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먼저 몬스터 위험 등급, 즉 ‘위험도’라는 것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계속하라.”
[위험도라는 것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 몬스터를 상대했을 때, 인간에게 끼칠 수 있는 피해의 추정치입니다. 즉 위험도 5천이면, 일반인 5천 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거죠.]
“흠.”
[물론 이 위험도라는 건 절대적이진 않습니다. 지금까지 쌓여있는 몬스터의 데이터를 편의적으로 분석한 협회의 추정치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정식 명칭은 ‘추정 위험도’입니다. 대체로 두루뭉술한 느낌이 있지만 각성자들은 용케 잘 알아듣더군요. 자, 그럼 다시 던전 등급으로 돌아와서…….]
“됐다.”
천마는 설명을 듣는 게 지겨운 듯 손을 저었다.
“이제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들었다.”
[네? 아직 던전에 대해선 설명도 안 했는데요.]
“빤한 이야기가 아니냐. 듣자 하니 던전의 등급도 몬스터의 위험도와 여러 가지 상황을 분석해서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것이겠지.”
천마의 말에 무명은 머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님은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헤헤.]
사실 무명은 각 던전 등급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육체 등급나 스킬 등급에 따른 몬스터 처리 수준.
그리고 각성자들과 각성자들의 전력 비교 등등. 던전과 각성자들의 전반적인 지식들을 상세히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천마의 표정을 보건대 이미 흥미를 잃었고, 말을 해도 가만히 듣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신가요?]
잠시 고민하던 천마가 별사탕 던전의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분석한 회색눈깔의 등급은 3급 각성자 수준이란 말이겠군.”
결국 천마가 궁금한 것은 저 고은진의 능력.
“그럼 온전한 알을 가져올 수 있는 건가?”
무명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고은진 님은 분명 실패할 겁니다. 꽉꽉부기는 매우 독특한 능력과 성질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렇군.”
[하지만 천마 님께서도 실패할 겁니다.]
“무슨 소리냐.”
[물론 천마 님은 1급 각성자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졌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던전이라는 것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많죠. 그리고 꽉꽉부기의 알은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혼자 힘만으론 온전한 상태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헛소리를 하는군.”
[천마 님. 제 설명을 조금만 들어보시면…….]
“시끄럽다.”
무명의 말을 싹둑 자른 천마가 던전 입구를 바라보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고 봐라. 그 요괴가 처참하게 실패한 꼴을 감상한 후, 보란 듯이 본좌가 온전한 알을 갖고 올 테니.”
* * *
고은진은 실패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처참하게 박살 난 알을 손에 쥔 채 털레털레 던전 밖으로 나왔다.
“젠장. 신병기사를 불러서 접근했는데도… 알아챌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신병기사. 요력과 정신력을 뒤섞어 또 하나의 강력한 존재를 창조하는 환진일족의 기술. 그것은 안개와 같이 형체가 없다가도, 실제 육체와 같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꽉꽉부기는 형체가 없는 신병기사를 대번에 감지하고 알을 파괴한 것이다.
울상을 지으며 좌절하던 고은진은 천마의 시선을 느끼곤 다시 주먹을 쥔 채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조, 좋습니다. 다시 한번 도전하겠습니다.”
어차피 침입자가 사라지면 알은 금세 리스폰되니까.
“크하하하하!”
비웃음을 한껏 끌어모은 천마가 호탕한 웃음으로 실패를 축하해 주었다.
“고작 그런 실력으로 본좌와 내기를 하려 했다니. 한심한 요괴로구나.”
“이게 그렇게 쉬운 줄 아십니까? 어디 한번 직접 해보십쇼.”
“좋다.”
혈염광휘를 뿜어낸 천마가 던전의 입구로 들어가며 싸늘하게 말했다.
“잘 봐둬라. 회색눈깔. 본좌가 온전한 꽉꽉부기의 알을 가져오는 것을.”
당연하게도 천마 또한 실패했다.
한 점의 기척까지 소멸시키며, 육체를 자연과 합치시킨다는 천하제일의 은신술, ‘사황잠행은형’을 사용했지만 꽉꽉부기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알을 치켜들었다.
방법이 없던 천마는 전력을 다해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렸다.
그러곤 곧바로 밤하늘의 달빛을 추월한다는 마도 최고의 신법, 야월극속을 극성으로 펼쳤으나, 간발의 차로 꽉꽉부기의 알은 깨졌다.
“거리가 너무 멀군.”
접시를 세워놓은 듯한 형태의 구조물에 올라와 있는 꽉꽉부기.
던전 중심부 입구에서 구조물까지의 거리는 450미터 정도.
침입자를 발견한 꽉꽉부기가 쥐고 있는 알을 깨뜨리는 순간은 2초에서 3초 남짓.
결국 꽉꽉부기가 갖고 있는 온전한 알을 빼앗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뿐이었다.
시간을 멈추거나 혹은 초속 450미터, 시속으로는 약 1,6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이동하거나.
“공력만 온전했어도……”
던전 밖으로 나온 천마는 양손에 든 꽉꽉부기의 알의 잔해를 바라보며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가까스로 낚아챘음에도 겉면이 반쯤 으스러져 있었다.
[그래도 대단하신 겁니다. 천마 님.]
내동댕이치기 전, 전력으로 신법을 펼쳐 알을 낚아챈 천마. 그 속도는 SS급 고속이동 스킬인, ‘음속돌파’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니까.
[천마 님이 가져오신 알의 상태는 1급 각성자로 구성된 팀이 통째로 움직여야 가능한 수준입니다.]
사실이었다. 물론 1급 각성자들이 돈도 안 되는 꽉꽉부기의 알을 찾으러 단체로 오는 일은 없겠지만.
“그게 온전한 꽉꽉부기 알입니까?”
어느새 다가온 고은진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져온 건 그렇게 비웃더니. 꼴이 좋습니다.”
“본좌가 가져온 알은 형체를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완벽한 상태의 알을 가져온다고 했잖습니까? 그게 완벽한 알입니까?”
“…좋다.”
몸을 일으킨 천마는 다시 던전 입구로 걸어갔다. 하지만 극한의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려 전력을 다한 신법을 펼친 탓에, 다리에 미세한 경련이 느껴졌다.
[천마 님.]
“시끄럽다.”
[안 됩니다.]
대번에 천마의 몸 상태를 파악한 무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천마 님은 좀 전에 전력을 다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가신다 해도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흥, 방금 본좌는 고작 삼 할의 힘을 썼을 뿐이다.”
실제로는 죽을힘까지 끌어 쓴 상태였으나, 천마는 뻔뻔하게 말했다.
“이젠 오 할의 힘을 사용해서 도전해 보도록 하지.”
[천마 님.]
“그만. 더 이상 나서지 마라.”
그러자 무명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님은 장채원 님에게 완벽한 상태의 알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무모하게 도전만 하신다면, 결국 며칠을 시도해도 실패하실 겁니다.]
순간 천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실패. 그것은 천마의 사전에선 삭제된,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하지만 제겐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필승의 전략이 있습니다.]
무명은 결코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침음을 한 천마가 나직이 말했다.
“말하라.”
무명은 대답 대신 멀찌감치 서 있는 고은진을 바라보았다.
“뭡니까?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무명의 뜻은 분명했다. 실패할 것인가. 아니면 저 건방진 요괴와 손을 잡을 것이냐.
천마는 무림에 출도한 이래, 처음으로 선택을 망설이고 있었다.
* * *
B급 던전 별사탕 내부.
커다란 돌을 깎아 만든 듯한 내부는 별사탕 같은 무늬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양각과 음각 무늬가 뒤섞여 더욱 기괴한 분위기가 흘렀다.
“흠.”
던전을 걸어가던 천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바로 옆에는 아이스박스를 짊어진 채 헬멧형 나노봇을 뒤집어쓴 고은진이 뒤따라 걷고 있었으니까.
결국 천마는 실패라는 치욕적인 결과보다, 반쪽의 승리라는 씁쓸한 과실을 택한 것이다.
[아까 천마 님이 몬스터를 싹 쓸어버린 탓에 던전이 쾌적하군요.]
무명의 위로에도 천마는 콧방귀만 뀔 뿐이다.
텅 비어있는 통로를 바라보던 무명이 다시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던전 중심부에 도착합니다.]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무명이 고개를 돌려 고은진을 바라보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중심부에 진입하시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제가 꽉꽉부기의 감지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니까요.]
무명은 천마와 고은진에게 기발한 전략을 알려 주었다. 다만, 그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선 꽉꽉부기의 반응속도와 감지 능력을 무명이 다시 한번 분석해야만 했다.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고은진이 무명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근데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네?]
“기껏해야 전투력 분석이나 해주는 나노봇이 전술을 짜는 게 말이 돼?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어휘 구사력은 뭔데?”
[후후후, 저는 나노봇이 아닙니다.]
가느다란 양팔을 뽑아 팔짱을 낀 채 음험하게 웃는 무명이 천마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저는 무명입니다.]
-우우웅.
그때 땅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반대편 통로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서서히 나타났다. 노란색으로 물든 눈빛이 어둠 속에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몬스터가 분명했다.
[어라? 몬스터들이 벌써 리스폰이 되었나요? 잠깐, 뭔가 이상합니다.]
철커덕.
머릿속에 여러 가지 센서를 꺼낸 무명이 멀리 보이는 시꺼먼 그림자들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까만 그림자들은 다름 아닌, 번들거리는 곤충의 갑주를 입은 듯한 인간형 몬스터들이었다.
-크르르르…….
낮은 울음소리를 내는 몬스터들은 커다란 통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얼핏 봐도 숫자는 최소 백 마리 이상.
무명은 무리 지어 있는 몬스터들의 노란 눈동자를 발견하곤 큰 목소리로 말했다.
[군집형(群集形) 히든몬스터, 까망병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