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복복 인테리어의 새 직원 (3)
장채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늘 천마를 따라다니며 몬스터의 부산물을 챙기는 각성자가 환진일족의 요괴라니?
“아, 덕택에 몬스터 고기를 편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천마를 바라보던 고은진이 구릿빛 피부와 대조되는 하얀 이를 씩 드러내었다.
“저는 몬스터 때려잡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 말입니다.”
다시 장채원에게 시선을 돌린 그녀가 코를 쓱 훔치며 말했다.
“저 인족을 따라다니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재료를 풍족하게 얻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 그랬나요?”
장채원이 힘없이 웃었다.
천마가 한번 손을 쓰면 던전이 재구축이 될 때까지 몬스터를 때려잡기도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왜 굳이 저희 매장에서 일을 하시려고…….”
장채원의 물음에 고은진이 다시 코를 긁적거렸다.
“신계에선 저희 요괴들이 던전에 들어가는 걸 금지하고 있잖습니까? 뭐, 지금도 몰래 들어가긴 하지만…….”
천마를 힐긋 바라본 고은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지의 직원은 신계에서 인족처럼 각성자 등록을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아, 사실… 천마는 등록이 안 되어 있는 상태에요.”
장채원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매장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요. 매장에 던전으로 갈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기도 하고, 천마는 이곳 인족도 아니고…….”
“무슨 말씀이신지.”
“아, 물론 은진 씨는 상급요괴시니, 원한다면 신청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장채원이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아쉽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던전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요. 영지의 직원이라도 말이죠.”
“전 유물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던전 식재료를 떳떳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이 얻고 싶을 뿐입니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렇다. 신계도 아주 팍팍한 건 아니라서, 영지의 직원들이 던전에서 식재료 같은 걸 얻는 것까진 딱히 금지하고 있진 않았다.
“굳이 저희 매장에서 일하면서 식재료를 얻으실 필요는… 어쨌거나 저희는 집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인테리어 매장이라서요.”
“상관없어요. 저는 지금까지 영지와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저 대지유신의 의뢰를 받는다는 영지에서 일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말투와 말이 전부 오락가락하잖아?’
군인처럼 다나까 말투를 사용하다가도 다시 구어체를 사용한다. 또 던전 식재료를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가 이번엔 영지에서 꼭 일해보고 싶단다.
장채원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발견한 고은진이 경직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둘 다예요. 저는 던전 식재료를 연구해서 던전 요리 전문점을 차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던전 요리 전문점…이요?”
“네, 그게 제 꿈입니다.”
“꿈…….”
꿈. 그것은 시궁창 같은 현실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고, 암울한 마음을 지탱해 주는 기둥과도 같은 단어다.
그리고 그 단어는 은총을 모으는 장채원의 마음 한구석에도 깊이 보관되어 있는 단어였다.
“물론 인테리어 일도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일하고 싶었던 건지, 고은진이 포차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 포장마차도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 아무거나 이것저것 뚝딱뚝딱 잘 만듭니다.”
“으음.”
뭔가 개운치 않다. 젊은 상급요괴가 포차를 운영하는 것도, 갑작스럽게 인테리어 매장에서 일을 하겠다는 것도.
망설이는 장채원의 마음을 헤아린 김찬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환진일족은 자존심이 강하구먼. 결코 매장에 해가 되진 않을 것이여.”
장채원이 복복 인테리어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뢰하는 요괴가 김찬원이었다. 그의 의견이 그렇다면 망설일 게 없다.
“저, 근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고은진의 경직된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장채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투가 독특하신데, 혹시 군인이신가요?”
“티가 많이 납니까?”
뒷머리를 긁적거린 고은진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PMC(민간군사기업)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습니다.”
“용병이요? 분쟁지역에서 싸우는 용병이요?”
“아, 그건 MPF(군사공급기업)에서 하는 일이고요. 저는 주로 요인경호업무를 맡았습니다.”
도마를 집은 칼을 내려다보던 고은진의 눈빛이 잦아들었다.
“하는 일은 거기서 거기지만요.”
“네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슨 보디가드 비슷한 걸 했다는 말 같았다.
‘좀 이상하긴 한데… 나쁜 사람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아.’
정신없는 말투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몸가짐이나 태도는 바르고 싹싹하다.
상급요괴에 손재주도 좋다고 하니 직원으로선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지경이다. 무엇보다 김찬원의 추천도 있었으니까.
장채원은 시원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그럼 저희와 같이 일해봐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저희 매장은… 정말 정말 하는 일이 많거든요.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던전 재료 채취도 하고, 신뢰도 가리지 않고요.”
“바라던 바입니다.”
고은진이 미소짓자 장채원이 명함을 꺼내 들었다.
“그럼 내일 저희 매장으로…….”
그런데 갑자기 천마가 초를 치고 나섰다.
“안 된다. 이자는 쓸 만한 녀석이 못 된다.”
“뭐? 무슨 소리야?”
“본좌가 잡는 재료만 주워다가 내다 파는 녀석이다. 이 정도 실력으론 본점에서 일할 수 없다.”
“뭐라는 겁니까?”
고은진이 회색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아까 못 들었습니까? 몬스터 잡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못 잡는 거겠지.”
“시나리오 쓰지 마십쇼. 나 압니까?”
“반말하지 마라.”
“너나 반말하지 마십쇼. 나도 나이 많거든요?”
“몇 살이냐.”
잠시 침묵하던 고은진이 헛기침을 했다.
“험, 요괴 나이로 스물둘이면…….”
“본좌는 마흔이 넘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점주, 이 요괴. 말투가 상당히 이상하다.”
말투가 이상한 걸로 치면 본인도 상당하다는 걸 모르는 천마가 인상을 썼다.
“게다가 예의가 없군. 그냥 망나니 같은데.”
천마의 말에 고은진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네. 존댓말 해드려야죠. 짬밥이 있으신데. 제가 또 유교걸이지 말입니다.”
한껏 빈정거린 그녀가 고개를 훽 돌리며 중얼거렸다.
“인간 주제에 나이를 따지고 드는지…….”
“인간 주제?”
이번엔 천마의 눈에서 혈염광휘가 쭈욱 뻗어 나왔다.
“본좌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다니.”
“알 게 뭡니까? 생긴 건 꼭 산도깨비처럼 생겨 가지고.”
“간이 부은 요괴로군. 이런 놈들은 꼭 피를 봐야 눈물을 흘리지.”
천마가 두 손을 주물럭거리자 고은진의 눈에서도 은빛 광채가 뻗어 나왔다.
“눈물?”
환진일족의, 그 오만하고 거침없는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몬스터 좀 몇 마리 잡았다고 지금 뭘 착각하는 거 같으신데…….”
그녀의 몸에서도 안개와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손가락만 까닥해도 펑 터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잠, 잠깐!”
그때 장채원이 천마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지금 싸우겠다는 거야? 같은 식구끼리?”
“흥, 그저 하룻강아지에게 범이 무섭다는 가르침을 내려주려는… 지금 뭐라고 했나. 같은 식구라니.”
천마가 인상을 쓰자 뜨자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못 들었어? 방금 난 은진 씨를 직원으로 채용했다고.”
“본좌의 말을 듣진 못했나? 저자는 형편없는 인물이다. 본점의 직원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무슨 말이야? 환진일족은 김 기사님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다 잘 먹지 않은 몬스터를 요리로 활용할 정도라면, 던전 경험도 풍부할 테고.”
장채원은 웃으며 고은진에게 들고 있던 명함을 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내일부터 저희 매장에 와주세요. 급여와 근무시간은 내일 한번 상의하죠. 아, 물론 바쁘시면 파트타임으로 일하셔도 괜찮고요.”
“그렇게 해주심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재료를 얻을 때마다 포차 운영도 생각하고 있어서…….”
“점주!”
천마가 또다시 나서자, 장채원이 고개를 훽 돌렸다.
“며칠 전 던전관리팀에서 꽉꽉부기의 알 채취 의뢰가 들어왔어. 너 꽉꽉부기의 알이 뭔 줄 알아?”
꽉꽉부기의 알. B급 던전 별사탕에 출현하는 던전 보스 몬스터, 꽉꽉부기가 들고 다니는 둥그런 알이다.
팔다리가 짧은 아기곰과 같은 외형에, 등에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걸 메고 다니는 꽉꽉부기는 몬스터 외형치고는 상당히 귀여운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생김새와 반대로 위험도는 1만에 가까운 데다 각성자들이 오는 걸 감지하면 쥐고 있는 알을 즉시 부순다.
때문에 실력 좋은 베테랑 각성자라 해도 꽉꽉부기의 온전한 알을 얻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무명은 알겠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얼굴의 천마.
그 뻔뻔함에 장채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고은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 저 들어본 적 있습니다. 별사탕 던전에 있는 거 말하는 거 아닙니까?”
“끼어들지 마라. 회색눈깔.”
“그쪽한테 말한 거 아닙니다만? 근육 몬스터.”
찌릿 노려보는 고은진 역시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천마가 뭐라고 하든, 그녀는 반드시 복복 인테리어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은진 씨 말이 맞아. 이 의뢰, 원래는 거절하려 했어. 알려진 정보도 별로 없는 데다 혼자서는 채취가 불가능한 던전 재료니까. 하지만 직원이 한 명 더 있다면……”.
장채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마가 가슴을 두들겼다.
“걱정 마라. 지금까지 그래왔듯 무엇이든 본좌는 혼자서 해낼 수 있다.”
“헛소리 마십쇼. 그 정돈 나도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흥, 또 누군가를 쫄쫄 따라다니면서 구걸이나 하겠지.”
천마의 도발에 고은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기하시겠습니까?”
“지금 내기라고 했나?”
“귀에 똥 박았습니까? 꽉꽉부기의 알을 누가 더 빨리 가져오는지 내기하자고요.”
“흐흐흐흐.”
고독한 승부사, 천마에게 내기란, 상대방과 승부를 다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상대방의 자존심을 박살 내고, 내기로 건 물품을 전리품으로 독차지하는 기회일 뿐이다.
“재밌겠군.”
천마가 눈을 번뜩이자 고은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나는 내기로 이 포장마차를 걸지요. 넌 뭘 걸겠습니까?”
“무엇이든 걸지.”
“뭐, 보아하니 돈은 없을 것 같고. 가진 거라곤 알량한 자존심뿐인 거 같으니.”
턱을 쓰다듬던 고은진이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좋습니다. 내가 이기면 선배님이라고 부르십쇼. 던전에선 내가 선배니까 말입니다. 콜?”
“흐흐흐. 으하하하하!”
발칙한 언사에 분노한 천마가 혈마굉천소(血魔轟天笑)를 터뜨렸다. 순간 포장마차가 내부가 뒤흔들리니 천둥벼락이 바로 옆에서 내리치는 듯했다.
“간이 부었군.”
“하겠다는 겁니까?”
“물론이다.”
천마는 낮게 웃으며 포차 내부를 둘러보았다.
“본좌에게 이동식 객잔 하나가 생기겠군.”
“갑작스럽게 징그러운 후배가 생기겠습니다.”
불꽃을 등진 사악한 마왕과, 하얀 안개를 뿜고 있는 회색빛 늑대가 서로를 바라보며 비웃는 듯한 모습이다.
“잠깐. 내기 같은 건 안 돼. 던전은 경쟁 심리로 들어가는 곳이 아냐.”
장채원이 나서자 천마가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라. 실력을 알아보려는 것뿐이다.”
“네가 사장이냐?”
“선임자로서의 책임감이라고 해두지.”
장채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천마와 고은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고.”
“뭐가 말이냐.”
“천마, 앞으로 계속 던전 재료 의뢰를 받고 싶으면 은진 씨랑 함께 꽉꽉부기 알을 가져와.”
“거절한다.”
“그럼, 앞으로 던전 재료 채취 의뢰 금지. 라마스 유지비는 알아서 충당해.”
천마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지간한 고급차보다도 비싼 유지비를 자랑하는 라마스.
그 수십 년 된 올드카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바로 천마가 던전 재료 의뢰라는 추가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은진 씨도 마찬가지예요.”
장채원은 이번엔 고은진을 바라보았다.
“천마와 협력할 수 없다면 저희 매장에서 일하실 수 없어요.”
“꼭 일을 같이해야 합니까? 업무는 따로 해도 되잖습니까.”
“이번 일 아니어도 앞으로도 협력할 일이 생길지 몰라요. 언제나 따로따로 일할 수만은 없어요.”
잠시 고민하던 고은진은 문득, 천마의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거절하라. 거절하라.
숯불처럼 타오르는 눈빛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천마의 뜨거운 시선을 바라보던 고은진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날, 복복 인테리어 뒷마당, 던전의 비밀통로. 시꺼멓게 물든 통로 앞에는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등 뒤에는 아이스박스를 매고, 머리에는 헬멧형 방식의 구형 나노봇을 착용했다.
상급요괴이자 환진일족인 고은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근육질을 드러낸 사내가 둥그런 나노봇을 어깨에 올린 채 서 있었다. 광마혈투의를 입은 천마다.
장채원은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둘이 잘 협력해서 가능한 온전한 꽉꽉부기 알을 가져오면 돼. 알겠지?”
“본좌만 믿어라. 완벽한 상태의 알을 가져오지.”
“걱정 마십쇼. 최대한 좋은 상태로 가져다 드드리겠습니다.”
동시에 대답한 천마와 고은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덕담을 한마디씩 나누었다.
“회색눈깔. 본좌의 앞을 방해하면 죽이겠다.”
“그쪽이야말로 더러운 수작을 부리면 신계에 신고할 겁니다. 근육몬.”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친근한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폭력은 절대 금지야! 만약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면 절대 말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알겠어?”
엄숙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한 탓인지, 두 사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본좌가 손을 쓸 만한 수준도 못 되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환진일족은 못생기고 무식한 인족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하아.’
장채원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서로 좀 친하게 지낼 순 없겠니?”
그러자 천마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고은진을 바라보았다.
“점주가 건 조건은, 회색눈깔과 함께 알을 얻으러 가라는 것까지였다.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고은진 역시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근육몬이랑 업무상으로는 협력할 겁니다. 하지만 사적으로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잖습니까?
결국 장채원이 내건 조건만 받아들였을 뿐, 서로를 원수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알았어. 더 이상 말하지 않을께. 그 대신…….”
어깨를 늘어뜨린 장채원이 땅을 보며 한숨을 쉴 무렵, 두 사람은 어느새 비밀통로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 이상한 별명 좀 부르지 마.”
그녀의 낮은 중얼거림은 허공에 스르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 * *
세이프던전, 8킬로미터 지점, B급 던전, 별사탕.
던전 벽과 바닥 곳곳에 별사탕 형태의 돌들이 박혀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푸르르릇, 처억.
천마는 무명이 쏘아내는 유도선을 따라 신법, 야월극속을 펼쳤다.
땅을 박찰 때마다 상공으로 솟구쳐 오르던 천마는, 던전 입구가 보이자 날개를 접은 대붕처럼 우아하게 착지했다.
휘이익.
동시에 엷은 안개를 몸에 두른 채 공기를 가르며 달려오던 고은진 역시 던전의 입구로 도착했다.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고은진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런 날에는 왠지 천천히 걷고 싶지 말입니다.”
“흥.”
코웃음을 친 천마는 던전의 입구로 들어가며 말했다.
“넌 들어갈 필요 없다. 여기서 구경이나 해라.”
“무슨 말입니까?”
“어차피 점주가 원하는 건 마물의 알이 아니냐. 네놈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니, 여기서 기다리란 말이다.”
“미친 거 아닙니까? 헛소리하지 마십쇼.”
차갑게 거절한 고은진이 던전으로 들어가려 하자, 천마가 팔짱을 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라.”
“잘 못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본좌가 잡은 마물을 주워가지 않았나. 이번에도 본좌의 도움이 없으면 던전중심부에 가긴커녕, 입구조차 돌파하지 못하겠지.”
천마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고은진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서 뿌연 안개가 흘러나왔다.
“여기서 딱 기다리십쇼. 금방 꽉꽉부기 알 가져올 테니까.”
“기대해 보지.”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천마를 무섭게 노려보던 고은진. 땅을 박찬 그녀의 몸은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어느새 던전 입구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