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천마, 회복하다
[천마 님.]
“소란 떨 거 없다. 육체가 바뀐 탓에 위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뿐이니까.”
몸을 낮게 웅크린 천마는 연달아 권마칠식을 사용했다.
“권마칠식, 뇌인파멸! 극전혼효! 권마무도!”
지금까지 천마는 그 어떤 몬스터에게도 두 번 이상 초식을 사용한 적이 없다.
“크윽, 승풍항룡!”
하지만 지금은 온 힘을 다해 연거푸 네 초식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위력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후후.
가면신사는 쏟아지는 천마의 공격을 빠르게 회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린 천마가 다시 한번 가면신사의 몸을 파고들었으나, 번번이 공격이 빗나가고 있었다.
-후후후.
모든 공격을 다 피해 버린 가면신사는 허공에서 한 차례 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천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건방진 놈. 감히 본좌의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고 생각한 건가.”
파삭.
그 순간, 가면신사가 쓰고 있던 스마일 가면의 절반이 가루가 된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재빨리 한 손으로 박살 난 가면을 가린 가면신사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우우…!
분노한 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던 가면신사는 갑자기 한 손을 힘껏 앞으로 뻗었다.
쿠웅. 그 순간 거대한 진동과 함께 던전 내부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마 님. 저 가면신사는 미궁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뭣이?”
천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미로의 벽이 무너지며 천마를 덮쳤다.
번개와 같은 동작으로 무너진 벽을 피한 천마가 자욱한 먼지 사이를 뚫고 가면신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천마대능력!”
파앙!
천마는 권마칠식 중 가장 위력이 강한 천수공파를 사용하기 위해 다시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렸다.
“한 방에 처리해 주지.”
붉은 광채에 둘러싸인 채 쏘아져 오는 천마를 발견한 가면신사는 다급히 한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권마칠식, 천수공…….”
교묘한 수법으로 가면신사의 방어를 뚫고 천수공파를 날리려던 천마는 갑자기 커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리였나.”
사방에 피어오르는 독을 견디며 싸웠지만, 결국엔 진기가 이어지지 않아 천마대능력의 힘마저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천마 님!]
놀란 무명이 쓰러진 천마에게 향할 무렵.
-후후.
기회를 놓치지 않은 가면신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한번 천장으로 팔을 치켜올렸다.
우르르르.
갑자기 미궁 내부가 균열이 가더니 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웅.
천마는 무명의 몸을 향해 쓰러지던 넓적한 바위를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하지만 천장에서 무너지는 벽들이 점차 바위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크흡.”
온 힘을 다해 무너진 잔해를 밀어내려 했지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노옴……!”
이 가면신사는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는 걸까? 아니면 천마가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면 무사할 수 없다는 걸 짐작한 걸까.
-후후후.
허공에 뜬 가면신사는 천마를 내려다보더니 무너지는 던전을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라진 가면신사를 바라보던 천마는 다시 한번 팔에 힘을 주었다.
“하합!”
[천마 님. 다시 천마대능력을 사용하세요.]
“이미… 사용 중이다.”
이를 깨문 천마의 대답에 무명은 입을 다물었다. 천마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돌덩이는 얼핏 봐도 백 톤 이상이 넘어 보였다.
전력을 다해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천마는 돌무더기에 깔려 죽게 될 것이다.
“네 녀석은… 가라.”
온몸에 핏줄이 바짝 선 천마가 말했다.
“네놈이 그렇게 바짝 붙어 있으니 본좌가 힘을 쓸 수 없지 않나.”
하지만 무명은 그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본좌의 말을 못 들었나.”
[사용자보다 먼저 던전을 나가는 나노봇은 없습니다.]
“뭐라고.”
[저 잔해들을 밀어낼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무명의 물음에 천마는 이를 꽉 깨문 채 앙상해진 자신의 팔을 올려다보았다.
“금강지체가 깨어진 탓에… 천마대능력을 몸에 제대로 담을 수 없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무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마의 어깨에 올라탔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혹시나 해서 가져와 봤습니다.]
무명은 지금까지 쭉 짊어지고 있던 보자기를 열었다.
그곳엔 천마가 방 한편에 걸어둔 귀면탈이 담겨 있었다. 오래전, 장채원과 함께 어느 골동품점에서 구매했던 탈이다.
[예전부터 이 탈을 쓰면 천마 님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느낌을 받아서요.]
무명은 잔해를 받치고 있는 천마의 어깨에 올라타 귀면탈을 얼굴에 씌워주었다.
[이 방법도 실패하면 이곳이 저와 천마 님의 무덤이 되겠군요.]
“흥, 헛소리 마라.”
귀면탈을 쓴 천마가 다시 한번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렸다.
화르르르.
순간 태양과도 같은 불꽃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하더니, 뜨거운 기운이 천마의 기경팔맥을 맹렬하게 타고 돌기 시작했다.
쩌쩌쩌쩍.
전신의 세맥(細脈)을 틀어막았던 알 수 없는 불순물이 태워지기 시작하자, 서서히 천마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본좌는…….”
활활 타오르는 마신의 형태가 등 뒤에 떠오른 천마의 눈동자에서 혈염광휘가 치솟았다.
“천마다---!”
쿠르르르릉.
사방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더니 그와 동시에 천마가 받치고 있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 * *
대한각성자협회 병원 10층, 특실 내부.
곤히 잠들어 있던 서유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깔끔하게 정돈된 병실 내부를 둘러보던 그녀는 화들짝 일어났다.
“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의 머릿속엔 자신을 위해 달려와 준 김찬원.
“삼촌…….”
그리고 가면신사와 마주 보며 주먹을 쥐고 있던 천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천마 씨!”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난 서유리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스크린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며칠 후, 시내의 어느 커피숍.
박스형의 좁은 구석 자리에 앉은 서유리의 눈꼬리는 떨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채 입술을 꽉 깨문 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정말.”
서유리의 앞에는 김찬원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 씨 역시 미등록 각성자잉께.”
헛기침을 한 김찬원이 다시 말했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곳에 온 것이 알려지면 곤란한가 벼. 결국 유리 네가 누워 있는 동안, 제 나라로 돌아갔구먼.”
거짓말인 거 알아요, 삼촌.
서유리는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빅데이터 분석실 소속인 그녀는 두뇌가 명석할 뿐만 아니라 눈치도 빨랐다. 심지어 각 나라의 주민등록증과 각성자 데이터베이스를 모조리 뒤졌지만, 천마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러니께. 아주 황급히 돌아갔지 뭐여?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돌아가게 되어서… 미안하다는구먼.”
김찬원의 거짓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유리에겐 천마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결국 그게 천마 씨의 대답이군요.”
“응? 대답?”
“아니에요.”
서유리는 힘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협회 소속 각성자를 좋아할 리 없겠죠.”
“아니, 그게 아니여.”
당황한 김찬원이 덩달아 일어서며 손을 저었다.
“천 씨는 정말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 나라로 돌아갔다니께?”
“알아요.”
마음만 먹으면 서유리는 천마가 어딨는지 반나절 만에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천마는 이미 사귀자는 말에 거절의 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고마워요, 삼촌.”
그녀는 김찬원의 깡마른 몸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목숨 걸고 절 구해줘서요.”
“뭐, 뭘 그런 걸 갖고 그런디야. 우리 조카가 위험하면 삼촌이 당연히 나서야 하는 거제.”
“혹시라도, 연락이 닿으면 천마 씨에게도 전해주세요. 구해준 것,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요.”
“그, 그려.”
이마에 땀을 닦은 김찬원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근디 왜 못 볼 껏처럼 말한디야.”
“저 협회, 관뒀거든요.”
“뭐어?”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뻐끔거리는 김찬원을 보며 서유리가 말했다.
“곧 지방으로 내려갈 거예요.”
“결국 그렇게 결정한 거여?”
“네. 더 이상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요. 특히 협회에선 멋대로…….”
갑자기 어두워진 표정을 짓던 서유리가 미소 지으며 생긋 웃었다.
“어쨌든 이곳에 있으면 천마 씨가 또 생각날 것도 같아서요.”
“으응.”
“조만간 다시 연락할게요. 돌아가 볼게요, 삼촌.”
“그려. 꼭 연락 한번 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서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김찬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유리는 진심으로 천마를 좋아했다. 의외로 천마도 서유리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찬원은 그 점이 매우 아쉬웠다.
“이걸로… 된 겨?”
나직이 중얼거린 김찬원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뒷좌석 창가 자리에 있는 거구의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이렇게 하면 된 거냐고.”
“그렇다.”
무너진 불스아이 던전에서 생환한 천마.
귀면탈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버섯의 효력이 다했는지, 단숨에 금강지체를 복구시키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천 씨의 모습… 이제는, 어느 모습이 진짜인지 모르겠구먼.”
탁 풀어진 강물처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미남자 천마.
그리고 하늘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패도적인 힘과 용모를 가진 천마.
두 모습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엔 한 군데도 접점이 없었다.
“원래 모습이라.”
김찬원을 바라보던 천마가 무심한 표정을 말했다.
“그런 건 없다. 본좌는 그저 ‘천마’일 뿐이다.”
늘 듣는 말이었으나 오늘따라 김찬원은 ‘천마’라는 단어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거 알어?”
김찬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울상을 지었다.
“유리는 다 알고 있었어.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말여.”
“상관없다.”
“상관없다니. 유리 표정을 못 봤어? 저토록 마음 아파하는디, 그토록 천 씨를 좋아했는디 말여.”
“흥, 결국 그 정도뿐인 거다.”
천마의 냉랭한 코웃음에 김찬원이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여? 유리는 진심이었단 말여.”
“진심이라.”
창밖을 바라보던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그녀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창밖을 바라보던 본좌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럼에도 본좌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
“그, 그거야… 아니, 그건 정말 너무하잖여. 지금 모습이랑 그전의 천 씨 얼굴을 누가 알아보겄어?”
“알아볼 수 있지. 모습이 바뀌어도.”
머나먼 과거의 일을 희미하게 떠올린 천마는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용모란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나는 인정 못 하겄어.”
김찬원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유리가 천 씨의 용모를 알아봤다면? 만나줬을 것이여?”
“물론이다.”
“너, 너무하는구먼. 용모가 바뀌어서 못 알아봤다고… 무 자르듯 인연을 딱 자르는 것이 말이 돼야?”
“글쎄.”
천마가 미남자일 땐 마음에 품은 생각이 드러났다. 하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한 천마의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미안하구먼.”
김찬원이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 씨에게도 유리에게도… 내가 괜한 짓을 한 것이었어.”
“천만에. 덕택에 본좌의 시각도 조금 달라졌다.”
“응?”
순간 김찬원은 자신이 천마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천 씨가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 말여.
애초에 천마에게 소개팅을 해준 것은 두 사람이 사귀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천마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길 원했던 것이다.
“김 씨 덕택에 본좌도 알지 못했던 인간의 군상을 발견했다. 고맙다.”
천마의 말은 진심이었다. 김찬원은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아쉽다는 미소를 입가에 보였다.
“미안하구먼. 내가 했던 말을 내가 생각 못 했구먼. 허허허. 미안혀.”
“그렇게 말할 것까진 없다. 확실히 본좌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으니까.”
김찬원이 엷게 미소 지었다.
사실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천마의 반응이었으니까.
“그랬구먼?”
김찬원이 활짝 웃자 천마도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