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천마, 약해지다
무명은 믿고 있었다. 결국 천마는 던전으로 갈 거라는 걸.
예상대로 천마는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게 아닌, 밖으로 나가 끊임없이 운공을 했다.
금강지체가 깨지자, 평범하게 돌아온 육체를 전투에 적응시키기 위해 진기를 억지로 동조화시킨 것이다.
“필요 없다. 집이나 지켜라.”
천마의 말에 무명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조차 데려가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만큼 성공 확률이 희박하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사용자가 던전에 갔는데, 집에 있는 나노봇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떼굴떼굴 굴러온 무명은 천마의 발아래에서 말했다.
[절 조금만 더 믿어주세요. 천마 님.]
천마는 잠시 침묵했다.
인간을 불신하는 자가 기계라는 존재는 믿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기계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천마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천마는 무명을 단순한 기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맘대로 하라.”
* * *
가변던전, 불스아이.
호빵을 뒤집어 놓은 듯한 둥그런 건축물 꼭대기에 과녁 모양의 구조물이 세워진 던전이다.
내부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눠진 미로 구조이며, 항상 입구가 열려 있어 가변던전을 헤매는 여러 몬스터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곳이다.
하지만 이 불스아이 던전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과녁 모양의 구조물이 빙글빙글 돌아갈 때 미로의 구조가 바뀐다는 점이었다.
휘익, 탁.
밤하늘을 가르며 은밀하게 신법을 펼친 천마는 폐건물 난간에 올라선 채 불스아이 던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스아이 던전 주변에는 금속으로 된 가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박살 난 나노봇과 나노드론들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도 최초 투입된 수색팀이 실패한 흔적인 듯 보였다.
[협회에선 구조팀을 보낼 생각을 접은 것 같군요.]
“어떻게 알지.”
몸과 눈에서 빛을 내지 않는 스텔스 모드로 전환한 무명이 눈의 센서를 크게 키웠다.
[던전 지역에서 구조율을 높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신속이 생명입니다. 최초 진입한 구조팀이 처참히 실패하였다 하더라도, 후속팀을 이어 보내야 하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쿠르릉.
그때 낮은 진동과 함께 과녁 모양의 불스아이 던전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던전의 불안정화가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회전은 이내 쿠릉 소리를 내며 멈췄지만, 미로처럼 생긴 던전 내부의 구조는 또다시 바뀌었을 것이다.
[아니군요. 던전의 불안정화가 너무 심한 상태라… 구조팀을 보내지 못하는 거였군요.]
던전을 빤히 바라보던 무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이 불스아이 던전이 위험하긴 해도 이렇게 불안정한 곳은 아니었는데.]
“그랬나.”
[그렇담 원인은 둘 중 하나겠군요. 던전을 조사하던 데이터 마이닝팀에서 던전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벌였던가. 아니면 이 불스아이의 불안정화가 가속화된 것을 알고, 협회가 데이터 마이닝팀을 보내 수습할 방법을 찾으려 했거나 말입니다.]
뭐가 되었든 구조팀은 오지 않았으니, 김찬원의 예상은 적중한 셈이다.
“본좌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무심한 표정으로 던전을 바라보던 천마가 신법, 야월극속을 펼쳤다.
휘리릭.
유령 같은 신법을 펼친 천마는 어느새 입구를 통과해 불스아이 던전 내부에 들어왔다.
현대식 건축물의 외관을 가진 불스아이 던전 내부는 오히려 판타지 세계의 신전처럼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푸른 청석이 깔려 있고, 벽 곳곳에 꽂힌 횃대에는 횃불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흠.”
묵묵히 걸어가던 천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걸어가는 길목마다 다양한 몬스터의 시체들이 쌓여 있었고, 벽 곳곳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김 씨의 수법이군.”
쓰러져 있는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예리한 무언가에 의해 조각조각 나 있었다.
천마는 그것이 김찬원이 일으킨 칼날 같은 바람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천마 님. 이제 곧 미로가 시작됩니다.]
마침내 천마는 던전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커다란 입구에 들어섰다.
“으음.”
높다랗게 솟은 미로를 바라보던 천마가 침음을 내었다.
건물 위로 치솟은 미로의 벽은 천장까지 닿아 있다.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천마 님.]
그때, 어둠으로 물든 미로를 조사하던 무명의 눈에서 번뜩이는 빛이 쏟아졌다.
[김찬원 님이 흔적을 남겨두셨습니다.]
“본좌도 봤다.”
미로 곳곳에는 김찬원이 쏘아낸 예리한 바람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린 천마는 신법을 펼쳐 그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흔적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벽에 그어져 있던 흔적이 갑자기 양옆으로 나누어졌다. 방금 전 던전이 흔들리면서 미로가 바뀐 영향 때문인 것 같았다.
[천마 님.]
“상관없다.”
하지만 천마는 무슨 생각인지 신법을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미로를 돌파했다.
[천마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묵묵히 천마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무명이 외쳤다.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천마는 미로를 빠져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막히는 길만 골라서 달려 나갔다.
길이 막히고 또 막혔지만, 천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막혀 있는 곳만 찾아다녔다.
[어째서 출구를 찾지 않는 겁니까.]
“멍청한 녀석.”
신법을 펼치던 천마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스킬이 무엇이냐.”
[그야…….]
더듬거리던 무명은 그제야 천마의 의도를 깨달았다.
서유리의 스킬은 인피티니 베리어, 즉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로를 돌파해 던전 중심부를 통과하는 것보다, 아예 막혀 있는 곳에서 버티는 것이 생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음.”
그때 천마가 비틀거리며 신법을 멈추었다. 미로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독이 천마의 기혈에 침투한 것이다.
전신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천마의 혈맥은 한빙진기에 노출된 것처럼 서서히 얼어붙었다.
[괜찮으십니까.]
“신경 쓸 거 없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의 독쯤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으나, 금강지체가 깨어진 천마의 몸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공력을 끌어올린 천마는 진기를 순환시켜 차가운 기운을 체외로 배출시켰다. 전신의 핏줄이 터져버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천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미로를 돌파했다.
[협회 소속의 각성자들입니다.]
모퉁이를 돌자 협회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나노슈트를 입은 각성자들이 숨진 채 쓰러져 있었다.
오래전 숨이 끊어진 듯한 각성자들은 겉으로는 전혀 상처가 없었다.
다만 이상한 점은 하나같이 공포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었다.
“없군.”
다행히 각성자들의 시체 속에는 서유리가 없었다. 천마는 한결같이 공포스런 표정으로 숨이 끊어져 있는 시체를 보며 눈을 번뜩였다.
“외상이 없다라.”
한 각성자의 시체에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대자 뼈가 없는 것처럼 살이 쑥 들어갔다.
눈썹을 치켜올린 천마는 다른 시체들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공할 열기로 안쪽을 녹였군.”
겉모습만 멀쩡할 뿐, 각성자들의 뼈와 내장은 모조리 녹아 있었다.
마치 초절정의 극양지력을 연마한 고수가 격산타우의 수법을 사용한 듯한 모습이다.
“하합!”
“으으!”
그때, 요란한 기합 소리와 신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김찬원과 서유리의 목소리였다.
“거긴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막혀 있는 미로를 등진 곳에 김찬원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엔 양팔을 벌린 서유리가 커다란 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미로 주변의 벽들이 부서진 것으로 보아 서유리는 이곳에서 인피티니 베리어를 친 상태로 끝까지 버티고 있던 것 같다.
[가면신사……?]
무명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김찬원의 맞은편엔 양복을 입은 채 화려한 가면을 쓴 사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바로 천억 원대의 가치가 있다는 보석 가면을 쓴 히든몬스터, 가면신사였다.
[아니, 뭔가 다른 존재인 것 같습니다.]
외관은 비슷하지만, 보석 가면이 아니라 웃고 있는 스마일 가면을 쓰고 있고, 양복도 검정색이 아닌 화려한 보랏빛이다.
거기다 무슨 마법 같은 능력을 부리는지 김찬원이 쏘아내는 칼날 같은 바람을 한 손으로 가볍게 튕겨내고 있었다.
“이놈이!”
김찬원의 특기는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쏘아내는 원거리 칼바람이다.
하지만 베리어를 만든 서유리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지 못한 채, 가면신사의 공격을 막아내고만 있었다.
“천마대능력!”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마가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렸다.
우두두둑.
하지만 평소처럼 강력한 빛과 폭음이 터져 나오는 것과 달리, 뼛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크으.”
금강지체가 깨어진 상태에서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리자, 피부가 갈라졌고 뱃속에서 달큰한 핏물이 올라왔다.
정신이 아늑해질 만한 고통이었지만, 천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내뻗었다.
“권마칠식, 극전혼효(極電混淆)!”
콰지지직.
천마의 주먹에서 천지를 찢는 듯한 다섯 줄기의 푸른 불꽃이 가면신사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콰앙!
허공에 떠 있던 가면신사가 막혀 있는 미로 뒤로 튕겨나더니, 이내 통나무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하아. 하아.”
천마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삼 성의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렸을 뿐인데, 전신의 뼈가 허물어지는 듯하며 시야마저 흐릿해졌다.
‘제대로 안 되는군.’
그렇다. 금강지체가 깨어진 육체는 천마대능력을 감당할 수 없던 것이다.
“천마 씨!”
“천 씨!”
두 사람은 천마를 보고 크게 놀라 외쳤다. 특히 서유리는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천마 씨도… 각성자였어요?”
천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찬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으, 으응. 내랑 같은 미등록 각성자여.”
“…역시 그랬군요.”
서유리는 천마가 각성자라는 것도 예상한 듯한 표정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겨?”
김찬원은 크게 웃으며 천마에게 다가왔다.
“안 온다면서 어떻게 이곳까지…….”
“시간이 없다, 천 씨. 어서 몸을 피하라.”
“응? 피하라니? 해치운 거 아녀?”
-후후.
그때 쓰러져 있던 가면신사가 낮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유로운 동작으로 가슴팍을 탁탁 털은 가면신사는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
“건방진 마물이로군.”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가면신사에게 천마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마물은 본좌가 처리하도록 하지. 어서 자리를 피하라.”
“천 씨, 조심혀. 저놈, 평범한 가면신사가 아녀.”
김찬원이 몸을 돌리자 서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천마 씨. 안 돼요. 저 가면신사는 1급 각성자라 해도 처리할 수 없어요!”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김찬원에게 손짓했다.
“방해된다. 김 씨, 어서 그녀를 데리고 나가라.”
“천마 씨!”
“걱정 마. 천 씨는 강하니께. 무적이여, 무적.”
김찬원은 재빨리 서유리를 제지하며 천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혀.”
“걱정 마라.”
“안 돼요. 대체 무슨 수로 혼자 상대하겠다는 거예요? 구조팀을 불러서…….”
서유리를 안은 김찬원은 강력한 바람을 일으켜 재빨리 미로를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걸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가면신사가 재빨리 김찬원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마물!”
천마는 유령처럼 출구 쪽을 막아선 가면신사를 향해 일권을 날렸다.
고개를 까닥해 천마의 공격을 흘린 가면신사의 입에서 다시 후후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너는 나를 막을 수 없다’라며 비웃는 것처럼.
“재밌는 놈이로군.”
순간 천마의 눈에선 시뻘건 혈염광휘가 솟구쳤다.
“이걸 막아봐라. 권마칠식, 뇌인파멸!”
번쩍!
섬전 같은 일권을 피하지 못한 가면신사는 재빨리 두 팔을 가슴 위로 교차시켰다.
쾅.
미로 끝자락에 부딪친 가면신사의 양팔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틈을 포착한 김찬원이 재빨리 미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후후.
가면신사는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다시 허공으로 떠올라 천마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무명은 크게 놀랐다.
지금까지 어떤 히든몬스터도 천마가 뻗어낸 일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보랏빛 가면신사는 여유 있게 일격을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