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78화 (78/285)

제78화. 천마의 첫 소개팅 (3)

사귀다. 천마의 사전엔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그의 주변엔 오직 충직한 부하들만이 존재할 뿐. 지금까지 연인은커녕, 마음에 맞는 벗 하나도 사귄 적이 없었으니까.

오죽하면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던 원로전과 십대마존조차도 충직한 하인처럼 만들어놓았으니 말이다.

‘아니, 하나 있나.’

천마는 마기자를 떠올렸다.

전 무림에서 오직 그만이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 역시 충실한 부하이자 만마집궁의 총사일 뿐이다.

“너무 빨랐나요?”

서유리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시간 낭비하고 싶진 않아요. 저는 천마 씨가 마음에 들어요.”

“사귄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농담인 줄 알았던 천마의 눈빛이 너무 진지하다. 웃음으로 때우려던 서유리 역시 진지하게 말했다.

“연인이죠.”

“연인?”

“네. 세상에 흔하디흔한 연인 관계요.”

서유리는 천마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사실, 천마 씨를 만나기 전엔 협회를 관두고 다른 도시로 가려고 했어요.”

달콤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지방이긴 하지만, 꽤나 괜찮은 길드에서 전술분석 실장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았거든요.”

“좋은 건가.”

“훨씬 좋죠. 돈도 많이 벌고요. 사실, 협회의 일은 사명감으로 하는 것이지 돈을 크게 벌진 못하거든요.”

협회 소속의 월급으로는 1년을 모은다 한들, 서유리가 몰고 온 스포츠카 한 대도 못 산다. 서유리는 부모님이 남겨준 막대한 재산이 있었기에 호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던 것이다.

“물론 협회도 좋은 점은 있죠. 권력이라는 거. 하지만 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예요.”

가변던전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린 서유리의 눈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처음엔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가변던전을 모두 없애고 싶어 협회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제 능력으론 공략팀에 들어가긴커녕… 위험도 1천 대의 몬스터를 처리하기도 벅찬 상태였어요.”

그녀는 천마의 눈을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두렵더라고요. 제 분석이 잘못되면, 공략팀원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손에 쥔 커피잔을 꽉 쥔 서유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어요. 다시 협회에 쭉 붙어 있는 것도 괜찮겠구나 싶네요.”

“어째서 말인가.”

“천마 씨가 이곳에 있으니까요.”

뜨거운 고백이다.

천마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처럼 직설적인 고백을 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세계의 여성들은 참으로 자유분방하군.’

자유분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문득 괄괄한 장채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급한 처자로고.”

헛기침을 한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본좌와는 며칠 전 한 번 만난 것이 전부가 아닌가?”

“한 번의 만남으로 운명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본좌는 운명 따윈 믿지 않는다.”

“지금 바로 대답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서유리는 천마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를 겪어보지 못한 천마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본좌는…….”

“우리, 딱 세 번만 더 만나요. 그리고 그때 대답해 줘요.”

“세 번? 그럼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저는 장점이 아주 많은 사람이에요. 천마 씨라면 세 번만 만나도 제 장점을 알게 될 거라 믿거든요.”

“본좌는 인간들의 장단점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서유리의 눈빛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아뇨. 천마 씨는 반드시 제 장점을 알아줄 거예요.”

“어떻게 알지?”

“저에게 관심을 가진 상태니까요.”

빅데이터실에 근무하는 재원답게 그녀는 한눈에 천마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흥미를 갖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천마 씨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전 잘 알아요. 그리고 만약 관심이 없었다면 절 만나주지 않았겠죠.”

정확한 분석이다.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꿰뚫어 보자 천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저에 대한 관심은 늘어갈 거예요. 며칠 전에 절 대했던 천마 씨의 태도와 오늘 절 대했던 천마 씨가 다른 것처럼.”

서유리는 달관한 스님보다도 이성에 무덤덤한 천마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청순하면서도 관능적인, 두 가지 매력이 공존하는 독특한 미녀였다.

-그 아이라면 천 씨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을지 몰라.

천마는 문득, 서유리를 소개해 주기 전 김찬원이 한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서유리는 천마의 마음을 이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세 번이라.”

천마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하지.”

* * *

1주일 후, 천마의 옥탑방.

TV 앞에 단정히 앉은 천마는 ‘각성자들이 전수하는 드라이빙 테크닉’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그것은 서유리가 천마에게 선물로 준 나노 칩에 들어 있는 영상들이었다.

-경질화 스킬을 가진 각성자라면, 코너에서 팔을 땅에 꽂은 후 드리프트를 시도하세요.

화면에선 차를 몰던 드라이버가 갑자기 팔을 땅에 처박더니, 급격한 코너링을 선보이고 있었다.

콰직. 끼이이익.

도로가 박살 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매번 평범한 드라이버의 스킬 영상만을 보던 천마에게 이 영상은 매우 흥미로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천마는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문득 서유리의 말을 떠올린 천마가 낮게 중얼거렸다.

“과연 그렇군.”

비록 한 번의 만남이었으나, 서유리는 천마의 성향을 단번에 파악했다.

당돌하면서도 스스럼없는 태도로 천마의 흥미를 끌었으며, 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빠르게 찾아내었고, 그 누구보다 편하게 대해주었다.

“똑똑하군. 생각도 깊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서유리가 똑똑했기 때문이다. 사려 깊은 성격에 외모까지 수려하니, 연인으로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때 발을 까닥거리며 충전스테이션에 누워 있던 무명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천마 님이 알아주시니 힘이 나는군요.]

“뭔 소리냐.”

[방금 하신 말씀, 절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아니다.

[그럼 누구…….]

무명의 시선을 피한 천마가 TV를 가리키며 헛기침을 했다.

“저자들을 말한 거다. 자동차를 모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군.”

[아아, 그렇군요. 드라이버 말이죠. 흐흐흐.]

천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무명이 음흉하게 웃던 찰나.

탕탕탕.

누군가 현관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김찬원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천 씨!”

“김 씨? 어쩐 일인가.”

천마는 김찬원이 각성자들처럼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전투용 나노슈트를 입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 복장은 또 뭔가.”

“천 씨. 큰일 났어!”

“큰일이라니. 뭐가 말인가.”

김찬원은 대답 대신 안으로 들어와 TV 리모컨을 조작했다.

-…며칠 전, 던전의 위험도와 구조를 분석하는 빅데이터 분석실 소속, 데이터 마이닝 팀원들이 가변던전 지역 북서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미궁 던전, ‘불스아이’에서 실종되었습니다.

-협회에서는 즉각적으로 공략팀을 급파하였으나, 던전의 불안정화가 가속된 탓에 불스아이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며…….

뉴스 화면을 가리킨 김찬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 말여. 유리가 실종되었어.”

천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불스아이. 그곳은 얼마 전 무명과 함께 죽도록 고생을 하고 나온 던전이기도 했다.

“그랬군.”

“천 씨.”

김찬원은 천마의 손을 붙잡았다.

“한시가 급혀. 어서 빨리 가변던전 지역으로 가야 혀.”

“어째서 말인가.”

“어째서라니? 불스아이 던전이 계속 불안정화가 된다는 이유로, 각성자협회에서 손을 놓고 있단 말여.”

천마의 표정이 무덤덤하자, 김찬원은 다시 한번 재촉했다.

“협회는 분명 불안정화가 끝나고 던전 구조가 파악될 때에야 구조팀을 보낼 껴. 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늦는다고.”

하지만 천마의 표정에는 털끝만치도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주특기가 뭔가.”

“주특기? 아, 스킬 말여? 인피티니 베리어라고… 강력한 엄폐물을 만들 수 있어.”

“엄폐물 생성이라… 그럼 잘 버티겠군.”

김찬원은 놀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천 씨. 유리가 걱정되지 않는 겨?”

“걱정해서 될 일이 아니다. 들어가서도 안 되고.”

“뭐, 뭐라고?”

“그 던전은 본좌도 들어가 봤다. 미로가 계속 바뀌는 구조에다가, 곳곳에 산공분과 비슷한 효력을 내뿜는 풀이 있었지. 준비 없이 들어갔다간 쓸데없이 목숨을 버릴 뿐이다.”

“천 씨!”

김찬원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최소한 노력은 해봐야 할 꺼 아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천마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 김 씨, 당신의 능력으로는 가봤자 소용없다. 냉정을 찾고 가만히 기다려라.”

“천 씨!”

김찬원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장 사장이야 던전 일에 절대로 관여하면 안 되니까 못 간다고 쳐! 하지만 천 씨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김 씨. 이성을 되찾아라. 본좌의 뜻은…….”

“정말 실망이구먼!”

버럭 소리친 김찬원이 몸을 홱 돌렸다.

“그렇게 자라 새끼마냥 움츠리고 있으라고! 내 혼자 가서 구할 테니께.”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늘 웃던 김찬원이 욕까지 내뱉는다. 그리고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몸을 날린 그는 하늘 위로 사라졌다.

“흠.”

눈썹을 찌푸리며 서 있던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좌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군. 두려움과 혼란이 뒤섞여 이성이 마비된 탓이겠지.”

그때 충전스테이션에서 나온 무명이 다가와 말했다.

[천마 님.]

깊이 가라앉은 천마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무명이 말했다.

[천마 님의 현재 몸 상태가 매우 약해져 있다는 걸 김찬원 님은 모릅니다.]

천마는 대답이 없었다.

[버섯을 먹은 후부터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말했다면, 김찬원 님도 이해했을 겁니다. 어째서 말하지…….]

“본좌가 왜 그래야 하지?”

[네?]

천마는 차갑게 웃었다.

“본좌는 다른 누구의 이해 따윈 원치 않는다. 알겠나?”

[죄송합니다.]

무명이 고개를 숙이자 천마는 바람을 쐬려는 듯 옥탑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가만히 서 있던 무명은 다시 충전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무명. 그는 이 세계에서 천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약해진 그의 몸 상태까지도 말이다.

[…….]

충전스테이션에 몸을 뉘던 무명은 문득 천마가 벽에 걸어놓은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벽에 시선을 고정시킨 무명은 팔다리를 쑥 뽑았다. 그리고 벽에 걸린 물건을 덥석 쥐었다.

깊은 새벽.

옥탑에 설치된 평상에 단정히 앉아 운공조식을 하던 천마가 홀연히 일어났다.

“후우.”

깊은숨을 내쉰 그는 다시 한번 진기를 몸 안에 유전시켰다. 40년 정도 되는 공력이지만, 천마에겐 물 한 방울의 힘 정도로 느껴질 뿐이다.

“흠.”

고개를 돌린 그는 실드 너머, 어둠에 묻힌 던전 지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옥탑 난간 위로 올라가 힘껏 날아오를 찰나.

[천마 님.]

끼익 소리와 함께 보자기를 둥그런 몸에 단단히 묶은 무명이 옥탑방 문을 열고 나왔다.

[저를 두고 던전에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무슨 헛소리냐. 본좌는 밤마실 간다.”

헐거워진 광마혈투의를 어거지로 꽉 조인 천마를 본 무명이 말했다.

[그 헐거워진 옷을 억지로 입고 말입니까?]

할 말이 없던 천마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밤마실을 던전으로 가는 것뿐이다.”

[그 밤마실, 같이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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