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76화 (76/285)

제76화. 천마의 첫 소개팅 (1)

“안 했다.”

[엥? 그렇다면 아직 인간이 느껴야 할 감정의 절반은 느끼지 못한 셈이군요.]

예리한 무명의 초식이 파고들었지만, 천마는 능수능란하게 방어했다.

“본좌는 생사를 초월했으며 수많은 인간들의 군상들을 눈으로 지켜봤다.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알 수 없는 건 아니지.”

[맞는 말씀입니다만, 본인이 겪지 않은 깨달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막상 접하면 새로운 것일 수도 있고요.]

“본좌는 그런 감정조차 버렸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감정조차 버렸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용모가 바뀐 탓일까?

천마의 목소리는 당당했지만, 그 말은 어딘가 모르게 구슬픈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천 씨.”

듣다못해 김찬원이 착 가라앉은 말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겨. 왜 우리 요괴 선조들처럼 인간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겨.”

천마는 담담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반드시 재앙과 공포를 가져온다고 믿지.”

하늘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동자에선 깊은 유감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만약 기존에 험악했던 인상을 갖고 있던 천마였다면, 결코 볼 수 없는 눈빛이기도 했다.

“…….”

그 모습을 본 일행들은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천마가 유약하고 아름다운 미남자로 탈바꿈하자, 그의 머릿속에 있는 감정들을 볼 수 있는 것만 같았다.

“천마야.”

[천마 님.]

“천 씨.”

동시에 천마를 부른 장채원과 무명, 그리고 김찬원.

스스로를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천마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머릿속엔, 동시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무섭도록 냉정해 보이지만 오히려 큰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얼굴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취한 것일까? 오늘따라 천마는 조금 감정적이고 고독해 보였다.

“천 씨.”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김찬원이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며 말했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어.”

“무슨 말인가.”

“천 씨가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 말여.”

천마는 흥미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세상 무심한 자신의 시각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라.

“말해봐라.”

그러자 가득 채운 소주잔을 쭉 들이킨 김찬원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잔을 탁 내려놓았다.

“소개팅 한번 혀.”

“소개팅? 그게 뭐냐.”

“그러니까… 참한 처자 한 명 제대로 소개해 줄 탱께 한번 만나보라는 뜻이여.”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절한다.”

“어째서? 해보지도 않았잖여?”

“천만에. 본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자들을 만나봤다.”

천마는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 거래가 얼마나 무의미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응? 거래?”

“남녀 간의 만남은 일종의 거래가 아닌가.”

팔짱을 낀 천마의 눈에선 경멸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녀들이 본좌에게 접근한 것은 하나같이 권력을 탐하거나, 높은 지위를 누리길 원했기 때문이다. 더러 무림의 평화라든가 가문의 종용 같은 색다른 이유나 제안을 한 여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해관계를 냉철히 따져보고 본좌에게 접근했지.”

“거짓말.”

그 말에 장채원이 피식 웃었다.

“지금 얼굴이 원래 외모라면서? 설마 여자들이 그런 이유로만 접근했다고?”

장채원이 빙글빙글 웃자 천마는 새로운 사실을 덤덤히 들려주었다.

“본좌는 일찍이 마고에서 수련했다. 그리고 새로운 경지를 돌파할 때마다 조금씩 용모가 바뀌었지.”

“뭐?”

“애당초 본좌는 금강지체의 상태에서 무림에 출도했다.”

“으아.”

장채원의 입에선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한마디로 지금 네 용모를 본 사람이 없다는 거잖아?”

“그렇다.”

무림에 출도하자마자 금강지체를 이룩한 천마.

강력한 힘. 그리고 그 힘보다 강력한 외모를 지닌 천마에게 접근하는 여인들은 오직 두 부류.

권력을 원하는 마도의 여인이나, 생존 혹은 평화를 위한 정파의 여인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게 뭐야?”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장채원의 눈이 짝짝이가 되었다.

“결국 평범한 연애라든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인연 따윈 없었단 거네.”

“그렇다.”

“아아,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지.”

불쌍한 모태솔로, 천마의 삶을 곱씹어보던 장채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 기사님. 아무래도 소개팅은 관두는 게 낫겠어요.”

“으응? 왜?”

“저 비뚤어진 세계관을 갖고 있는 천마를 소개시켜 줬다간, 뺨 석 대로도 끝나지 않을걸요?”

“으음.”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잠시 고민하던 김찬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녀. 우리 조카는 남들과 달러. 어쩜 천 씨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을지 몰라.”

“조카요?”

“으응. 친조카는 아니지만… 을매나 똑똑하고 또 발랄한디.”

김찬원은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 조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면 천 씨도 생각이 달라질 꺼여.”

“으으음.”

이래나저래나 장채원은 천마에게 퍽 정이 든 상태였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곳에 있는 동안 천마의 얼어붙은 감정들이 녹아내리길 바랐다.

“좋아요. 그럼 한번 해보죠.”

장채원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무명이 나섰다.

[흥미롭군요.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요?]

“응? 보여줄까?”

무명을 향해 김찬원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장채원과 무명, 제비까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오? 이 사람이에요? 천마 소개시켜 주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인데요?”

[아니죠. 인물이라면 천마 님도 이제 어디 한군데 빠지지 않지요.]

-뀨뀨!(우선 만나보게 해라냥).

“좋아. 그럼 우선 빨리 날을 잡자고.”

김찬원의 말에 장채원이 신이 나서 말했다.

“아, 그럼 옷부터 살까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갈 순 없으니까.”

[기왕이면 머리카락도 정리하는 게 어떨까요? 분위기 있어 보이긴 한데, 뭔가 사연 있는 자연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옹기종기 모여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모습을 바라보던 천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만난다.”

하지만, 천마의 이야기는 떠들썩하게 오가는 천마의 소개팅 이야기 속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 * *

좋은 옷이란 무엇인가?

천마가 생각하는 좋은 옷의 기준은 이러했다.

“피부와의 마찰을 줄이고 운동성을 높여주며, 기후와 관계없이 일정한 체온을 유지시켜 줘야 한다.”

그 말을 들은 장채원이 인상을 썼다.

“그건 운동복이잖아. 난 평상복을 이야기하는 거야.”

“평상시에는 몸을 안 움직이나? 모든 옷은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자, 이걸 봐라.”

몸에 걸친 재킷을 다시 내려놓은 천마가 옷걸이에 걸어둔 광마혈투의를 집어 들었다.

“이 광마혈투의엔 인체의 열을 흡수하여 순환시키는 공능이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선 시원하게, 한겨울에는 따뜻하게 보온을 해주지.”

입고 있던 불편한 옷을 벗어 던진 천마가 광마혈투의 상의를 걸치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정말 쾌적하군. 이것이 바로 옷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제 안 맞잖아.”

“우리옷은 어떠냐?”

“그건 더 이상해.”

근육이 모두 빠져버린 천마가 ‘우리옷’을 걸치자 포대를 입은 것처럼 헐렁했다.

아무리 허리춤을 조여봐도 당나귀 뱃가죽처럼 늘어질 뿐이었다.

“으음.”

침음성을 낸 천마는 허리춤을 더 꽉 조였다.

“자, 봐라. 이젠 흘러내리지 않는다.”

“장난해? 누가 첫 소개팅에 그러고 나가? 너 그쪽 세계에서도 포대 같은 옷 입고 소개팅했어?”

“그야 물론…….”

눈을 허공으로 치켜뜬 천마는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부하였던 마기자, 고놈의 잔소리 때문에 광마혈투의를 벗어놓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장을 입는 것까진 바라지 않을게. 하다못해 저 트레이닝복이라도 입어. 제발.”

장채원은 옷장에 걸린 검은색 줄무늬 트레이닝복을 가리켰다.

천마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오늘은 일요일, 천마의 소개팅 날.

김찬원이 1주일 내내 간곡하고도 집요하게 설득했으나 요지부동이었던 천마.

소개팅을 따윈 절대 하지 않겠다는 천마의 결심은, 장채원의 한마디에 무너졌다.

-이번 소개팅을 잘 끝내면, 라마스 고장 난 부품, 그리고 타이어까지 모두 신품으로 갈아줄게.

그동안 라마스의 관리에 속을 썩여왔던 천마로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끼익.

그때 옥탑방의 문이 열리며 말쑥이 차려입은 김찬원이 불쑥 들어왔다.

“천 씨. 준비 다 됐어?”

그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천마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머여? 결국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는 겨?”

“그나마 민소매 도복을 입고 간다는 걸, 간신히 설득한 거예요.”

장채원의 말에 천마는 재빨리 광마혈투의를 가리켰다.

“김 씨. 잘 들어봐라. 이 허접한 옷과 달리 광마혈투의는 도검불침, 수화불침…….”

“으음. 어쩔 수 없지.”

“정말 괜찮을까요?”

“지금 천 씨 외모가 워낙 괜찮응께, 뭐.”

언제부턴가 두 사람은 천마의 말은 귓등으로 날리고 있었다.

“너무 실례 아닐까요?”

장채원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던 김찬원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괜찮여. 천 씨가 어떤 사람인지 미리 얘기해 두었어. 다 이해해 줄 꺼여.”

“불공평하군. 어째서 본좌에겐 상대방의 정보를 넘겨주지 않나.”

천마의 항의에 김찬원은 히죽 웃었다.

“천 씨는 만나보기나 혀.”

* * *

좋은 음식이란 무엇인가?

천마가 생각하는 좋은 음식이란 이러했다.

“균형이다.”

장채원의 승합차 조수석에 올라 힘차게 문을 닫은 천마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식이란 생명력을 지탱해 주는 기둥과도 같다. 뿐만 아니라 신체조직의 성장과 회복에도 기여를 하지.”

“그래서 저녁은 어디서 먹을 거냐고.”

최근 천마는 장채원조차 알지 못했던 ‘노병’이라는, 외딴 골목에 숨은 근사한 술집까지 찾아내었다.

혹시 의외의 맛집을 알까 해서 물어봤지만, 답변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엄마손 백반이다.”

“뭐?”

“말했잖나. 음식은 균형이 가장 중요하다고.”

두 눈을 가늘게 뜬 천마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본좌가 아는 곳 중에, 그곳이 가장 균형 있는 식사를 제공한다. 어젯밤에도 여섯 가지 반찬과 칼칼하게 끓여낸 국, 그리고 얼큰하게 볶아낸 제육볶음과 생선구이가 제공되었지.”

“뭐여, 천 씨. 제육이랑 생선 백반, 두 개나 시켜먹는 겨?”

“방금까지 뭘 들었나. 음식은 무엇보다 균형이…….”

떠벌떠벌 음식에 대한 지론을 설파하는 천마를 두고, 장채원과 김찬원이 또다시 머리를 맞댔다.

“천마가 말하는 곳은 평범한 백반집 같은데…….”

“역시 식사 장소는 장 사장이 선택하는 것이 좋겠는디.”

“그, 그렇죠?”

어깨를 늘어뜨린 장채원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 *

시내 모 패밀리 레스토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 장채원. 그녀는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천마를 올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럼 잘 만나고 와.”

“알겠다.”

장채원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천마를 바라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존댓말까진 바라지 않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해. 무례하게 대하지 말고.”

“생각해 보지.”

“라마스를 생각해.”

“무례하게 대하지 않겠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대답한 천마가 레스토랑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다시 몸을 돌려 말했다.

“점주.”

“응?”

“부속은 모두 신품으로 교체해 주겠다는 약속, 잊지 마라.”

정비소 박 씨에게서 애프터 마켓 제품과 가품 등에 대해 알게 된 천마가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좌의 라마스엔 모두 정품이 들어가야 한다.”

“알, 알겠어. 걱정 말고 가.”

“좋다.”

덤덤히 돌아서는 천마를 보자 장채원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천마가 소개팅이라니…….”

설마하니 잘생겨진 천마에게 마음이라도 동한 걸까? 초점 없는 시선으로 천마를 응시하던 장채원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양심에 찔리네.”

여인불신, 아니 인간불신 사상을 갖고 있는 천마다. 제대로 된 세계관을 심어주자는 마음으로 시작된 소개팅이었으나, 앞으로 벌어질 상황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왠지 상대 여성분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상대방 여성의 입장이 너무 불쌍했다.

물론 타일 기사 김찬원의 조카라곤 하지만, 장채원의 가슴 한편에 양심이라는 털이 뽀송하게 자라났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멀리 사라지는 천마를 보며 장채원이 후회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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