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던전 관리팀의 의뢰
“별일이 다 있네.”
신뢰용 데스크 전화기의 수화기를 내려놓은 장채원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응접 테이블에 앉아 있던 천마가 슬쩍 물었다.
“뭐가 말인가.”
다른 일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신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안 그래도 요 근래에는 내공 회복에 진전이 없었으니.
“시설자원부 산하, 던전 관리팀에서 연락이 와서 말야. 던전 재료 샘플을 납품해 줄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음, 그러니까 일종의 관공서가 발주한 신뢰라고나 할까? 지정하는 던전 재료들을 갖다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하던 천마가 말했다.
“관부의 신뢰라. 썩 내키지 않는군.”
“그래? 역시 거절해야 할까.”
“말을 끝까지 들어라.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겠나.”
최근에는 신뢰가 거의 없는 탓에 내공은 겨자씨만큼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천마의 속내를 뻔히 들여다본 장채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지만 이쪽의 신뢰는 신력 같은 건 주지 않아.”
“뭐라?”
“그냥 대금만 주는 거야. ‘대금만’이라고 말하기엔 꽤 넉넉하게 주는 편이지만.”
턱을 괸 장채원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네. 분명 관공서에 계약된 배달꾼들이 있을 텐데. 왜 우리 매장으로 연락이 왔지?”
그때 창고 방에 누워 있던 무명이 떼굴떼굴 굴러왔다.
[복복 인테리어에 맡긴 게 아니라, 천마 님께 맡긴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장채원이 눈을 깜빡이자 무명이 팔다리를 쑥 뽑아내며 말했다.
[과거 신계에 소속된 배달꾼들은 대부분 요괴였습니다. 하지만 일반 요괴들은 던전 출입을 금하고 있는 탓에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신계에선 유령회사를 만들어 인간 각성자들에게 던전 재료 채취 의뢰를 맡겼지만, 이 또한 여러 번 잡음이 생겼지요.]
무명은 천마를 보며 있지도 않은 코를 훔쳤다.
[하지만 천마 님은 엄밀히 말해 이곳의 인족도 아닌 데다, 신뢰를 받는 영지의 직원입니다. 배달꾼을 하기엔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지 않습니까.]
“아, 그러네. 일리 있는 분석인데?”
장채원이 눈을 깜빡일 무렵,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이유를 납득했으니 가야 하지 않겠나.”
“정말? 근데 넌 신력 받는 거 외엔 관심 없잖아.”
장채원은 눈을 깜빡이자 천마가 자신의 애마, 라마스의 키를 내보였다.
“자동차라는 것. 꽤나 돈을 잡아먹더군.”
“응? 무슨 소리야. 내가 주유비 지원해 주잖아.”
“그걸론 어림없다. 정비소 주인 박 씨의 말에 의하면, 본좌의 차량은 매우 특별하다고 하더군. 몇 번 산길 주행을 나가면 수리나 조정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든다.”
장채원은 입을 벌렸다.
“산길 주행? 너 설마 또 난폭 운전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차량을 본좌의 손에 길들이기 위한 과정이다.”
한숨을 쉰 천마가 텅 비어 있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명 녀석과 함께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부품이라는 걸 구하는 게 또 일이더군. 결국 금전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었다.”
“아아, 그래.”
장채원은 허탈하게 웃었다.
천마의 애마, 라마스는 배달용 소형 승합차지만, 전 주인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레이싱용 엔진과 파츠들로 개조를 해놓은 상태였다.
“정말 험하게 타는 거 아니지?”
“물론이다. TV에서 나오는 차량들에 비하면 오히려 평범할 정도지.”
“그래?”
최근 천마가 레이싱 경주 프로그램에 푹 빠진 걸 모르는 장채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꽤나 악취미네. 배달용 승합차로 무슨 폭주를 뛰었나.”
“어쨌든 지금 출발하도록 하겠다.”
한숨을 쉰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던전 관리팀에서 넘긴 자료를 줄 테니까 한번 다녀와 봐. 어차피 매장도 한가하니까.”
* * *
세이프던전 동쪽 4킬로미터 지점. C급 던전, 식물원.
투명한 지붕이 설치되어 있는 이 던전은, 인근에 있는 ‘과수원’ 던전과 더불어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나는 곳이다.
때문에 몬스터들도 대부분 다양한 벌레 형태의 것들이 나온다.
“이상하군.”
식물원 던전의 중심부를 살펴보던 천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던전 관리팀에서 요구한 ‘복주머니 수세미’를 찾아 채취하러 왔건만, 누군가 깨끗하게 거두어들인 상태였다.
“그 복주머니 수세미라는 게 인기가 좋은 물건이었나.”
천마의 물음에 무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던전 재료라고 부를 수도 없는 독초입니다. 심지어 도감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이름 모를 식물이었고요.]
던전 관리팀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이 식물원 던전 중심부 부근에 핀 넝쿨의 열매가 있다고 한다.
복주머니 수세미라 이름 붙인 이 열매는 피부 점막에 닿거나, 섭취하면 강력한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독초라고 하였다.
“흠.”
턱을 쓰다듬은 천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이 던전이 인기가 좋은 거겠군.”
[식물원 던전은 각성자들이 찾지 않는 곳 중 하나입니다. 가치가 있는 재료들이나 유물이 거의 안 나오는 곳이니까요.]
던전 곳곳엔 천장에 닿을 듯 솟아 있는 거대한 나무들이 있었고, 중심부에는 열매가 텅 빈 넝쿨이 있었다. 바로 복주머니 수세미가 열리는 넝쿨이었다.
“그럼 이 수세미는 언제 다시 만들어지나.”
[식물원 던전의 몬스터와 식물들의 재생성 주기는 48시간입니다.]
턱을 쓰다듬은 천마가 허리춤에 꽂은 귀면탈을 도로 얼굴에 썼다.
“그럼 이틀 후에 다시 오지.”
다시 이틀 뒤, 식물원 던전 앞.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귀면탈을 쓴 천마가 던전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는 커다란 포대를 메고 있는 천마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무명이 눈을 반짝였다.
[천마 님. 던전 내부에 누군가 들어간 흔적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품속에서 귀면탈을 다시 꺼내 쓴 천마는 조심스레 던전의 입구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파리 형태의 얼굴에 사마귀 같은 몸체를 가진 몬스터, 드래곤 맨티스의 사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진입한 지는 대략 한 식경(30분) 정도. 들어간 자들은 여섯 명이라.”
몬스터의 사체와 발자국을 살펴보던 천마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 던전은 꽤나 인기가 좋군.”
[정말 이상합니다. 드래곤 맨티스는 유물 따윈 나오지 않는데 말입니다.]
“식물들이 있지 않나.”
[말씀드렸다시피 돈이 안 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중에는 독초도 있고요.]
“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던 천마는 천천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천마의 발아래에서 물결 같은 기운이 맺히는가 싶더니, 전신의 몸이 점차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푸르릇.
신법을 펼치자 주변에 피어 있는 수많은 식물들이 천마의 몸을 스쳤지만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은신잠영술(隱身潛影術:몸을 숨기는 기술)의 최고봉이라는 사황은형잠행(死皇隱形潛行)을 사용한 것이다.
“조심해. 잘못 만지면 중독될 수도 있어.”
던전 중심부 부근으로 조심스레 걸어가자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중심부에 가까이 다가가자 대여섯 명의 그림자가 보이고, 넝쿨들 사이로 반짝이는 열매가 보였다. 바로 복주머니 수세미였다.
“또 늦은 건가.”
천마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자 무명의 머리에서 철커덕 소리와 함께 고깔 모양의 커다란 센서 하나가 튀어나왔다.
[천마 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냐.”
[도감에도 없는 식물을 재취하러 각성자들이 대거 몰려오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관심 없다.”
천마가 몸을 돌리려 하자 무명이 두 손을 모으며 간곡히 말했다.
[이렇게 가시면 다음에 왔을 때, 또 복주머니 수세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천마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오 미터 정도 높이의 나무 위에 뛰어오른 천마는 유령처럼 이동하기 시작했다.
천하의 대살수도 감지 못하는 은신술을 지닌 천마였으니, 설령 탐지 스킬을 가진 각성자라 해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틀 만에 고대로 다시 자랐구만.”
나무 아래 십여 미터 부근엔 나노슈트를 입은 대여섯 명의 남성들이 반짝이는 복주머니 수세미를 조각내어 가방에 담고 있었다.
“형님. 근데 그놈들은 대체 왜 이 복주머니 수세미를 잔뜩 가져오랍니까?”
각성자 중 짧은 스포츠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한 남성이 숨을 헐떡이며 묻자, 맨 앞에서 수세미를 베던 뚱뚱한 남성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냐? 그냥 까라면 까는 거지.”
멀리서 그들의 말을 듣던 천마가 흥이 깨진 듯 입맛을 다셨다.
“그냥 단순하게 수세미를 채취하기 위해 온 자들이잖나.”
[잠시만요, 천마 님.]
눈 센서를 확장시킨 무명이 멀리 있는 각성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대하였다.
위이잉 소리와 함께 각성자 데이터베이스를 모조리 뒤져본 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각성자 데이터베이스는커녕, 주민등록 자체가 안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아마 밀입국 등을 통해 불법으로 들어온 사람들 같습니다. 게다가 저 복주머니 수세미를 채취하는 것도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알 게 뭐냐.”
[네?]
“불법이든 뭐든… 본좌도 미등록 각성자 처지가 아닌가.”
[그, 그렇긴 하지만… 복주머니 수세미는 강력한 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런 걸 허가 없이 채취해 바깥으로 유통하면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명의 설득에도 천마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뭐, 밑바닥 말종 놈들이 하는 게 다 그렇지 않나.”
[네에?]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 아니더냐.”
천마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빛이 흘러나오는 던전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파 놈들이 무공을 앞세워 여기저기 빨대를 꽂으며 살 때, 마도인들은 밀수나 고리대금업, 도박장 등 돈이 될 만한 일은 모두 해야 했지.”
뼛속까지 마도인인 천마.
십만팔천종의 마문 비급을 독파하였고 천하에 산재한 모든 무학의 이치에 통달한 절세대종사였으나, 안타깝게도 준법정신이나 의협심 따윈 개나 준 상태였다.
[하지만 천마 님. 저 독성물질을 시중에 유통이라도 하면…….]
“누구냐!”
흥분한 탓인지 무명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 같았다.
복주머니 수세미를 채집하던 뚱뚱한 남성이 천마가 있는 나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어떤 쥐새끼가 거기 숨어 있는 거냐?”
“쥐새끼?”
감히 고금제일의 천마 어르신의 면전에 그따위 무엄한 단어를 내뱉다니.
각성자들을 내려다보던 천마의 눈동자에서 혈염광휘가 치솟았다.
“그따위 말을 본좌의 앞에 내뱉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은신잠영을 푼 천마가 품속의 귀면탈을 꺼내 쓴 채 모습을 천천히 드러냈다.
하늘하늘한 나뭇가지 위에 우뚝 서 있는 천마를 보자 뚱뚱한 남성이 몸을 움찔했다.
“누, 누구쇼?”
“알 거 없다.”
귀면탈을 쓴 탓에 천마의 모습은 살벌함, 그 자체였다.
거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섰다면 좋았으련만, 이 뚱뚱한 남성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던전에 들어왔으면 볼일이나 보고 나갈 것이지, 왜 거기에 올라가 숨어 있는데?”
“으하하하!”
껄껄 웃은 천마는 휙 소리와 함께 간덩이가 부은 각성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한 걸음 천천히 다가오는 천마를 보자 뚱뚱한 남성을 포함한 여섯 명의 무리가 등에 메고 있던 단분자 커터를 치켜들었다.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던전 안에서 뒤지면 보험 처리도 안 되는 거 몰라?”
“방금 태어난 강아지는… 범의 무서움을 모르지.”
한 걸음 더 다가간 천마는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가면 속에 가려진 탓에 이들은 사신의 손아귀와 같은 죽음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능력을 과신하고 만용을 부린 무인은 목숨으로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한다!”
걸음을 멈춘 천마의 주먹에선 시뻘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식물원 던전 입구.
그곳에는 몸에 딱 붙은 나노슈트를 입고 완전 무장을 한 한만재와 유은호, 그리고 신채영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팀장님. 역시 또 이곳으로 온 것 같습니다.”
팔뚝에 장착한 소형 컴퓨터로 던전 입구의 흔적을 분석하던 한만재가 나직이 말했다.
-역시나 확실한 정보였군요. 협회에 증원을 요청할까요?
스크린에서 들려오는 초홍의 목소리에 한만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이 자식들을 또 놓칠 겁니다.”
한만재는 유은호와 신채영을 힐긋 보며 말했다
“저희가 지금 바로 체포하겠습니다.”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우리가 맡은 임무는 체포가 아니라 그들의 꼬리를 잡는 거니까요.
특수대응팀은 전략기획실장 김수웅의 지시로, 강력한 독성물질을 채집해 불법 무기를 만들어 암거래 시장에 유통시키는 범죄 일당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초홍은 뜬금없는 임무에 불만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면 특수대응팀을 공중분해 시킬 수도 있음에도 외곽에 따로 건물까지 지어주며 팀을 유지시켜 주었으니…….
“걱정 마십쇼. 한 놈만 제대로 잡겠습니다.”
한만재가 뒤를 돌아보자, 유은호와 신채영이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 밀거래 조직의 하수인들은 밀입국한 외국인들로, 놀랍게도 4급 각성자에 준하는 실력을 가졌다고 한다.
각성자들의 전투는 단순히 스킬과 등급으로 나눌 수 없는 일. 몬스터를 잡는 것보다 수십 배는 위험한 전투였다.
“자, 그러면…….”
심호흡을 한 한만재가 입을 열려는 찰나.
콰쾅!
폭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지축이 흔들렸다. 이상함을 느낀 한만재가 즉시 에너지 결계를 펼쳤다.
“잠깐! 여기서 대기!”
가끔 막 나가는 미등록 각성자들은 던전 안에 폭탄 같은 걸 설치해 두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던전이 불안정화가 되어 몬스터가 튀어나오거나, 최악의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한 히든몬스터가 나타나기도 한다.
뚜벅뚜벅.
그때 던전의 입구를 열고 나타난 회색빛 그림자가 있었다.
괘자 형태의 한복을 입고 얼굴엔 무시무시한 귀면탈을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특수대응팀 모두는 저 그림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천, 천마 씨?”
한만재는 어깨에 둥그런 무명을 올린 채 천천히 걸어 나오는 천마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천마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잠, 잠깐만요. 설마.”
그때 뒤에 있던 유은호가 휘익 소리를 내더니 던전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유은호가 천마를 보며 소리쳤다.
“만재 형님. 천마 님께서 저 밀수 조직원들을 모두 때려잡으셨어요.”
“뭐?”
“그놈들. 던전 중심부에 다 쓰러져 있어요.”
유은호의 외침에 한만재가 또다시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천마 씨. 당신은 어째서…….”
감격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누른 한만재가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
알아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결론까지 낸 터라, 천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양심에 찔린 탓인지 무명도 입을 꾹 다문 채 천마의 포대 가방을 슬쩍 가렸다.
그곳엔 미등록 각성자들에게 뺏은 복주머니 수세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본좌는 가겠다.”
휘익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는 천마를 보며 유은호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천마 님! 감사해요! 나중에 밥 한 그릇 살게요!”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던 유은호가 환호성을 지르며 말했다.
“와우. 천마 님. 설마 우리를 돕기 위해 협회에서 보내주신 다크 나이트 같은 분 아녜요?”
“저런 능력을 가진 각성자를 가만히 놔둘 리 있냐.”
신채영의 차가운 핀잔에 유은호가 코를 훔쳤다.
“그런가.”
“뭐, 됐다. 바늘 수갑(신경 물질을 끊임없이 주입해 일시적으로 각성자들의 육체각성도를 낮춘다)만 채워놔.”
한만재의 말에 유은호가 씩 웃었다.
“이미 채워놨습죠.”
“잘했어.”
“근데 정말 우리, 천마 님 밥이라도 사드려야 하는 거 아녜요?”
유은호의 장난스런 말에 한만재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사준다고 나올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렇게 싹 입만 닦기도 뭐하잖아요.”
신채영의 눈치를 힐끔 보던 한만재가 고개를 저었다.
“뭐, 좋은 날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