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57화 (57/285)

제57화. 힐러와 힐러 (2)

기간트 펩이 쓰러져 있는 전투 현장.

재빨리 도착한 신채영은 사방에 쓰러져 신음하는 각성자들을 향해 전방위 힐링을 시작했다.

불특정 다수의 각성자들을 고문하는 이상한 범인을 체포하려 했으나, 사방으로 퍼지는 처절한 비명 소리에 결국 이쪽으로 달려온 것이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힐링 팩터를 쏟아내고 있던 신채영은 초점 없는 표정으로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콰릉!

몰려든 각성자들을 압도하던 기간트 펩의 머리 위로 갑자기 붉은 구름이 쏘아져 오는가 싶더니.

파앙!

하늘을 울리는 폭음 소리와 함께 기간트 펩의 머리가 폭발하듯 터져 버린 것이다.

후두두둑.

터져 버린 기간트 펩의 머리통에서 시꺼먼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기간트 펩의 피에는 폐를 손상시키는 지독한 독이 포함되어 있었다.

“으아아아!”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사방으로 기간트 펩의 피가 쏟아지자 피를 뒤집어쓴 각성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떼구루루 구르고 있었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

각성자들에게 강력한 해독 효과가 있는 힐링 팩터를 주입하는 신채영. 그녀의 입에선 달큰한 피맛이 느껴졌다.

부상자가 워낙 많은 데다 해독은 치료 스킬 중에서도 가장 시간을 오래 소모한다.

기간트 펩의 피에 다친 이십여 명의 각성자들을 한꺼번에 치료하는 탓에 오히려 그녀의 피부가 녹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뼈가 타는 것 같아!”

“숨을 못 쉬겠어!”

“나 좀 살려줘!”

치료가 더뎌지자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는 커져만 갔다.

벌써 입술이 파리하게 변한 자들도 있다. 저대로 놔뒀다간 정말 목숨을 잃는다.

-채영아. 만재 씨랑 은호가 가고 있어. 협회 소속 힐러들이 오기까지는 20분 정도 걸릴 거야.

상황실에 있는 초홍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내용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택을 해야 해.’

그녀가 전력을 다해 힐링 팩터를 주입한다 해도 완벽한 해독 효과를 낼 수 있는 인원은 열 명 안팎. 만약 이대로 어정쩡하게 힐링 팩터를 주입했다간 스무 명의 각성자가 몽땅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제가 도울게요!”

그때 기계음이 섞인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토끼 가면을 쓴 여성… 아니, 하루에 한 번은 착한 일을 반드시 하는 일일일선이 등장했다.

“중독된 건가요?”

“도망간 거… 아니었어요?”

“중독되었냐고 묻잖아요!”

다급한 일선의 물음에 신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간트 펩의 혈액독이에요.”

“알겠어요. 조금만 시간을 벌어줘요. 금방 해독약… 아니, 제독약을 만들게요.”

일선은 황급히 가방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는 침구 세트와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든 약병들이 보였다.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침구 세트에서 주사기를 꺼낸 일선은 근처에 있는 중독자들의 피를 뽑아냈다.

투욱.

혈액독이 닿은 피는 꺼내자마자 마치 젤리처럼 응고되었다.

넓은 그릇을 꺼낸 일선은 그 덩어리진 피를 담고, 약병에 담긴 액체들을 뒤섞기 시작했다.

치이이이.

마침내 세 가지 약병에서 혼합된 액체를 섞자 허연 안개와 함께 덩어리진 피가 다시 묽게 변했다.

“됐어요!”

그 모습을 보던 신채영의 동공이 커졌다.

“잠깐만. 연기가 나잖아요.”

“피가 맑아졌잖아요.”

“네? 아니 그래도…….”

“괜찮아요.”

손을 흔든 일선은 세 가지 약병에 있는 액체들을 대량으로 뒤섞어 주사기에 담았다.

“치료를 시작할게요.”

신채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일선이 번개와 같은 움직임으로 쓰러진 사람들에게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흐, 흐억!”

주사를 맞은 사람들의 귀와 코에선 점차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채영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말했잖아요. 이건 해독제가 아니라 제독제라고요.”

“끄아아아아!”

신채영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주사를 맞은 각성자들은 몸에서 허연 김을 내뿜더니, 처절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서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흐어어어어.”

고통을 견디다 못한 한 각성자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목에 갖다 대었다.

“안 돼요!”

일선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그 검을 낚아채었다.

“조금만 참아요! 제가 만든 제독제는 반드시 효과가 있을 거예요.”

“그냥… 죽여… 줘.”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가방에 있던 침구 세트를 연 일선은 기다란 장침을 뭉텅이로 손에 쥐었다.

“제독이 될 때까지 조금만 참아요.”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고통에 찬 각성자들의 목 뒤에 장침을 박았다.

그러자 몸부림치던 각성자들은 마치 마네킹이 된 것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끄어어어어.”

몸이 활활 타는 고통을 느꼈지만 각성자들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죽여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신채영은 그제야 각성자들이 왜 치료를 거부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목숨 건지는 대신, 일평생 겪을 고통을 단 한 번에 겪게 만드는.

아니, 살기 위해서 죽음의 문턱을 다시 한번 넘게 만드는 고문 같은 치료법 때문이었다.

* * *

“흠.”

폐허가 된 건물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신은… 여전히 고문을 즐기는군.”

[천마 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뭐가 말이냐.”

무명은 아직도 불꽃 같은 기운이 휘감겨져 있는 천마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천마 님이 기간트 펩을 처리하셨을 땐, 이 정도의 파괴력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나.”

[앞으론 힘을 조절하시길 당부드립니다. 만약 저 일선 님이 던전에 없었더라면, 저 아래 있는 각성자들은 기간트 펩의 독에 노출되어 모조리 황천길을 건넜을 겁니다.]

“흠.”

얼굴에 쓰고 있는 귀면탈을 매만진 천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그는 평소대로 천마대능력을 서푼 정도 끌어올려 천수공파를 날렸을 뿐이다.

하지만 마치 최대 전력을 다한 것과 같은 위력이 쏟아져 나왔고, 기간트 펩의 머리를 완전히 터뜨려 버린 것이다.

“주의하도록 하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천마는 이내 비밀 통로가 있는 폐건물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 * *

한만재와 유은호가 도착하였다.

협회 소속의 힐러들이 도착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가 더 걸릴 것이다.

그 사이, 기간트 펩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던 각성자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

신채영의 치료도, 협회의 힐러들의 도움도 아닌, 일선이 만든 제독제 덕택이었다.

하지만 고문과도 같은 제독 과정 때문에 넋이 나간 자도 있었고, 머리털이 듬성 빠진 자도 있었다.

심지어 몸을 떨며 각성자 짓을 때려치겠다고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초점 없는 표정으로 건물의 벽에 기대있는 신채영을 보며 한만재가 다가왔다.

“기간트 펩… 각성자들이 처리한 거야?”

“아뇨. 하늘에서 붉은색 구름 같은 게 떨어지더니 갑자기 머리가 터져 버렸어요.”

“기간트 펩 머리가 스스로 터져 버렸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고개를 가로저은 한만재가 다시 물었다.

“응급 환자들은? 기간트 펩에 중독되었다며.”

“다 치료했어요.”

“채영이 네가?”

“아뇨. 토끼 가면을 쓴 사람이요.”

“토끼 가면?”

한만재가 눈을 껌뻑이자, 신채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전에 주전자 가면을 쓰고 각성자들에게 이상한 약을 살포한 사람이에요. 오늘은 토끼 가면을 쓰고 왔더라고요.”

“그자가 여기 왔었다고?”

한만재 옆에 서 있던 유은호가 묻자 신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사람, 어디 있는데?”

“갔어. 아까 전에.”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신채영의 눈빛을 바라보던 한만재가 무겁게 말했다.

“그냥 가게 두었단 말야? 그런 큰 사건을 일으킨 자를?”

“사건이랄 것도 없었어요.”

“뭐?”

“그 사람 말론, 피로 회복과 힘을 돋우어 주는 약이었대요. 단지 공격성을 증폭시키는 부작용이 있는지는 몰랐을 뿐이라고…….”

“채영아. 그게 무슨 소리냐.”

한만재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도야 어쨌든, 멋대로 약을 만들거나 치료하는 건 의료법 위반이야.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신채영이 허탈하게 말했다.

“어쨌든 생명을 구했잖아요. 죽은 사람은 없고.”

“채영아!”

“모르겠어요. 이젠 어떤 게 옳은 건지.”

노여운 기색을 띠던 한만재는 텅 빈 신채영의 눈동자를 보며 표정을 고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아까 휴게소에서 퇴근을 하려고 했을 때…….”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두 사람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결국 그 사람은 중독된 사람을 구해주고 다시 사라졌어요. 이번에도 사람들을 도운 거죠.”

“채영아.”

한만재는 혼란스러워하는 신채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네 말도 맞아. 하지만 멋대로 사람을 치료하거나 약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면, 오히려 그 피해는 부상자들이 입는 거야.”

“어째서요.”

“잘못되어도 그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니까.”

“그럼 옥탑방에 사는 그 사람은요?”

“뭐?”

신채영은 한만재와 유은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사람도 범법자인데 용인해 주고 있잖아요. 그저 좋은 일을 좀 했다는 이유로… 마찬가지 아닌가요.”

한만재와 유은호는 서로를 힐끔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없다. 아니, 신채영의 말이 옳았다.

원래 특수대응팀은 범법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하지만 지금은 약속한 것처럼 옥탑방에 사는 미등록 각성자를 예외로 두고 있었다.

엄청나게 강할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을 한다는 이유로.

“미안하다, 채영아. 네 말이 맞아.”

씁쓸하게 웃은 한만재가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가 너한테 혼란을 줬구나.”

몸을 돌린 그는 유은호에게 말했다.

“은호야. 여긴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넌 채영이랑 같이 복귀해.”

“네.”

유은호의 손에 이끌려 힘없이 걸어가는 신채영을 빤히 응시하던 한만재. 갑자기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채영이 말이 맞아.”

신채영은 염세주의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든 것에 냉소적이었다. 만약 이런 식으로 혼란을 준다면, 그녀는 머지않아 팀을 떠날 것이다.

“결국 방법은 한 가지뿐이구나.”

한만재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신이라는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바로 불신을 가진 대상의 실체를 직접 파악해야 하는 것.

“그 양반을 한번 믿어볼 수밖에.”

붉은 눈을 번뜩이는 거구의 사내를 떠올린 한만재는 입술을 일자로 모았다.

다음날. 특수대응팀 빌라 5층 회의실.

“천마라는 미등록 각성자. 예외로 둘지 말지는 채영이, 네가 결정해.”

이것이 상황실에 모여 있던 특수대응팀의 회의 결론이었다.

“당연히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해야겠지만.”

물론 조건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보고서가 아니라 천마라는 인물에 대해 직접 파악할 것.

초홍은 아이스골렘이 나타났던 상황을 녹화한 나노 칩을 신채영에게 건네주었다.

“만약 네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상의할 필요도 없어. 협회에 즉시 보고하도록 해.”

신채영은 초홍이 내민 나노 칩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작은 나노 칩은 팀원들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존중과 신뢰였다. 만약 그녀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팀원들은 옥탑방의 저 각성자를 절대 예외로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문제가 생기겠지.’

초홍의 손에 올려진 나노 칩을 빤히 바라보던 신채영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두려움 같은 것도 없었다.

“알겠어요.”

마침내 결심을 한 신채영은 초홍이 내민 나노 칩을 집어 들었다.

* * *

일요일 늦은 오후.

옥탑방의 문을 연 천마는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면상에 대고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밥 좀 사주죠.”

천마의 사고회로는 잠시 정지되었다.

‘미친 여잔가.’

라고 하기엔 너무나 눈동자가 맑았고, 안면도 있었다. 바로 맞은편 빌라 건물에 살고 있는 여성이었으니.

“흠.”

최대한 야멸찬 거절의 말을 찾았지만, 적합한 단어가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메마른 침을 삼킨 천마가 흠 소리를 내며 다시 말했다.

“본좌는 박봉이다.”

기껏 생각한 말이 ‘돈이 없어서’라니. 엉뚱한 말을 지껄인 혀를 꿀꺽 삼킨 천마가 다시 말했다.

“가라.”

탁.

그런데 여성은 닫히는 현관문에 재빨리 발을 넣으며 말했다.

“협회에 신고할까요.”

“뭐라.”

“다 봤어요. 아저씨가 던전에 몰래 들어가는 거.”

젊은 여성, 신채영은 초홍에게서 건네받은 홀로그램 플레이어를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푸른빛이 허공에 쏟아지더니, 콰쾅 소리와 함께 아이스골렘을 부수는 천마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이거 신고하면 아저씨 일하는 곳에서 잘릴걸요. 아니면 다시 외국으로 추방되든가.”

천마는 말없이 신채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보라 치는 겨울 호수 같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천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뒷짐을 진 천마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고릿적부터 비밀을 지키는 방법은 살…….”

[천마 니임! 스토옵!]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명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뒷짐을 진 천마의 손가락에 시뻘건 불꽃, 마화열극지가 맺혀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살인멸구(:殺人滅口:죽여서 입을 봉해 버림). 천마는 매우 손쉬운 방법으로 비밀을 지키려는 것이다.

[밥 먹으러 가죠!]

폴짝 뛰어오른 무명이 천마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맛있는 밥 먹으러 가요. 비싸고 맛있는 밥으로.]

“무슨 소리냐.”

[하하하. 앞집에 사는 이웃이잖아요. 사주세요. 돈은 걱정 마시고요.]

무명은 둥그런 얼굴을 천마의 눈에 바짝 갖다 대며 속삭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밥 사주세요. 천마 님.]

천마의 눈엔 무명의 둥그런 얼굴에 폭포수와 같은 땀이 흘러내리는 환상이 보였다.

[천마 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요. 제발요. 네?]

절박하리만큼 간절한 무명의 속삭임을 듣던 천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