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힐러와 힐러 (1)
세이프던전, 북서쪽에 위치한 협회 직영 휴게소, ‘구름다리’.
입구에 구름 모양의 구조물이 전시되어 있는 휴게소 내부엔 음식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는 각성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구석에는 나노슈트를 입은 여성이 아이스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차갑고 서늘한 눈매, 무표정한 얼굴. 피부에선 차가운 냉기가 흐를 것만 같은 여성은, 특수대응팀의 힐러 신채영이었다.
“퇴근할까.”
에너지 결계에 반사된 하늘을 바라보던 신채영이 몸을 일으켰다.
최근 발생한 히든몬스터들의 이상 출현은 점차 잦아들었고, 던전도 평화를 되찾았다.
오늘도 별다른 사건은 없을 것 같다.
‘아니, 없다곤 할 수 없나.’
그렇다. 신채영, 아니 특수대응팀에겐 늘 해결되지 않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앞집에 사는 천마라는 미등록 각성자의 처분이었다.
‘팀장님이야 그렇다 쳐도, 은호랑 만재 오빠는 홀딱 넘어간 것 같은데…….’
커피를 마신 신채영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쿠웅.
그때 둔탁한 소리와 함께 휴게소 입구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입구 쪽으로 달려가 보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각성자들이 바닥에 쓰러져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흐으으.”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가자 고통에 찬 신음을 내는 남성들이 보였다.
전투용 나노슈트가 아니라 둥그런 마크가 찍힌 작업복 같은 걸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던전 재료를 채취하는 회사에 소속된 각성자들 같았다.
“젠장, 약이 안 들어!”
쓰러진 각성자들 중 한 명이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들고 있던 약병을 내던졌다.
바닥 여기저기에 각성자 상점에서 파는 회복제나 치료 약이 널브러져 있는 걸 보아 매우 큰 부상인 것 같았다.
“치료 스킬 가지고 계신 분 없나요?”
보다 못한 휴게소 직원 중 한 명이 소리쳤지만, 주위의 각성자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치료 관련 스킬은 매우 희귀하게 발현된다. 때문에 각성자 팀원들을 모집할 때 가장 우대받는 스킬 보유자가 바로 힐러 포지션이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신채영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다.
치료 스킬은 피로 회복, 상처 수복, 해독, 생명력 강화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신채영은 전 분야에 효과가 뛰어난 S급 치료 스킬, ‘힐링 팩터’를 사용할 수 있는 초특급 힐러였다.
“어디에 상처를 입은 건가요?”
부상자를 살펴보며 스킬을 발휘하려던 신채영의 눈에 의아한 빛이 맴돌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상처 따윈 전혀 없었고, 중독 증상 같은 것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상, 상처라니.”
신채영의 물음에 간신히 눈을 뜬 남성이 물었다.
“상처 따윈 없어.”
“어디가 아픈 건가요?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그러자 이를 깨물고 고통을 참고 있던 남성이 부르르 떨었다.
“치, 치료?”
“네.”
“하지 마.”
“네?”
“차라리 그냥… 죽을게. 죽는 게 낫다고.”
남성은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더니 또다시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난 치료 같은 거 원하지 않는다고!”
발작을 한 것처럼 부르르 떨던 남성은 뭘 말할 새도 없이 기절해 버렸다.
신채영은 어쩔 수 없이 강력한 생명력 강화 효과가 있는 힐링 팩터를 쓰러진 남성에게 주입시켰다.
‘멀쩡하잖아.’
하지만 아무리 주입해도 힐링 팩터는 작용하지 않았다. 즉, 이 남성의 몸은 매우 멀쩡한 상태였다.
“으으… 죽여줘. 날 죽여줘.”
“저기요. 스킬이 들어가지 않아요. 지금 그쪽, 멀쩡한 상태라고요.”
“웃기지 마. 난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남성은 헛소리를 하며 또다시 고통에 몸부림쳤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신채영이 눈을 깜빡일 무렵, 구경하던 각성자들 중 한 명이 혀를 찼다.
“저런… 또 나타났나 보네.”
신채영이 고개를 돌리자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말총머리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뭐가요?”
“예전에 뉴스에 나왔던 엉터리 진료소 말이에요.”
“엉터리… 진료소?”
“왜 있잖아요. 웬 미친놈이 이상한 약을 나눠줘서 각성자들 맛이 가게 만든 사건 있잖아요.”
순간 신채영은 한동안 각성자들 사이에서 떠들썩했던 사건을 떠올렸다.
괴상한 가면을 쓴 자가 홀연히 나타나 부상당한 각성자들에게 회복제를 나누어주었는데, 실제로는 성격을 광폭하게 만드는 약물이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각성자들은 광전사처럼 변했고, 한동안 던전 지역은 난장판이 되었던 것이다.
“최근에 다시 그 미친놈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아요. 치료를 한답시고 사람을 죽도록 괴롭힌다고.”
말총머리 남성의 말에 신채영의 눈에선 싸늘한 빛이 쏟아졌다.
‘잡아야 해!’
고통에 몸부림치는 각성자들의 상태를 보니, 아직 그자는 세이프던전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었다.
몸을 돌린 신채영은 기절한 남성에게 힐링 팩터를 주입시켰다. 대신 이번엔 치료가 아닌, 강력한 마취 효과의 효력을 밀어 넣었다.
“어헉.”
순식간에 통증과 피로가 사라지자, 기절했던 각성자가 번쩍 눈을 떴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통증이…….”
“그 사람, 어디 있어요?”
“뭐, 뭐가?”
“아저씨를 이 꼴로 만든 사람 말이에요.”
신채영의 물음에 남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남동쪽에 있는 허수아비 던전 부근에서…….”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신채영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히든몬스터 출현이 잠잠해지자 이번엔 엉터리 약물을 살포해 각성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자가 등장했다.
만약 이번에 잡지 못한다면, 세이프던전 지역은 언제고 또다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푸르릇.
한번 달려 나갈 때마다 그녀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휘날린다.
비록 힐러 포지션이지만 신채영의 육체각성 능력은 3급. 한번 땅을 박찰 때마다 쏘아진 화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저 멀리, 새까맣게 물든 허수아비 형태의 던전 앞에 토끼 가면을 쓰고 있는 그림자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저자야.’
토끼 가면을 쓴 그림자는 몸이 매우 말랐으며 가면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보였다.
그 앞으로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침구와 약병들을 보자 신채영은 이자가 이 사건을 일으킨 범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잠깐. 기다려!”
허공으로 튀어 오른 신채영은 먹잇감을 낚아채는 매처럼 토끼 가면 앞을 신속히 가로막았다.
“당신, 예전에 엉터리 진료소를 차린 사람 맞죠?”
“네?”
가면 속에는 스피커가 달려 있는지, 기계음이 섞인 맑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엉터리 진료소라뇨?”
“주전자 가면 쓰고 던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상한 약 나눠준 사건 말이에요.”
신채영의 추궁에 토끼 가면 여성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거짓말할 생각 말아요. 방금, 당신의 손에서 살아남은 각성자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놓고서도 뻔뻔하기 짝이 없다.
“당신은 던전 내에서 다수 각성자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불법을 저질렀어요.”
눈썹을 치켜올린 신채영은 품속에 있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저는 대한각성자협회, 특수대응팀 신채영이에요. 각성자 특별법에 의거, 긴급 체포하도록 하겠어요.”
“저를요? 왜요?”
“방금 이곳에서 각성자 남성들을 공격했잖아요.”
“아뇨. 치료해 줬는데요.”
“치료라는 명목하에 사람들을 해치는 거겠죠.”
“해치다뇨.”
토끼 가면 뒤로 억울함이 담겨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사람들, 미스틱 스콜피온에게 공격당해서 두 명은 중독 상태였고, 한 사람은 온몸의 뼈가 어긋난 상태였어요.”
고개를 든 토끼 가면 여성은 신채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중독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어긋난 뼈를 맞춰준 게 죄가 되나요?”
신채영은 불현듯 휴게소에 있었던 각성자의 상태를 떠올렸다. 매우 고통스러워했지만, 중독 증세 같은 건 없었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들은 중독 증세 따윈 없었고 뼈에도 지장이 없었어요.”
“직접 뼈를 맞췄고, 스콜피온 독에 대응하는 독을 투여했으니까요.”
“대응하는 독?”
“이독제독의 이치예요. 해독제 같은 건 바로 만들 수 없으니, 그에 상응하는 독을 주입한 거예요.”
즉석에서 독을 분석해 대응하는 독을 주입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눈썹 끝을 치켜올린 신채영의 눈동자엔 불신이 가득했다.
“독에 대항할 수 있는 독을 즉석에서 만들었다고요?”
“그래요.”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지만, 이러한 기술을 가진 의사는 없다. 그렇다면 이 토끼 가면 여성은 독을 중화시키는 스킬을 얻은 각성자란 말인가.
“당신도 힐러인가요?”
“아뇨. 아닌데요.”
“그럼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나요.”
“그런 건 없어요.”
“그렇다면 무면허 의료 행위를 한 건 맞는군요.”
토끼 가면 여성은 한 점 부끄럼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위독한 상처를 입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해 준 것뿐이에요. 그게 죄인가요?”.
토끼 가면 여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의료법을 위반한 행위일지언정,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뿐이다.
오히려 그 긴급성과 정당성을 따진다면, 사회 통념상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행위로 보여지기도 했다.
“저는 던전 지역 내에 발생하는 위험과 혼란을 막을 의무가 있어요.”
하지만 신채영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금까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그쪽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죽어가는 사람을 구한 게 불법이라면 천 번이고 불법을 저지르겠어요.”
비록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있지만, 목소리에는 강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미친 사람인가. 아니면…….’
태도를 보건대, 납득시키지 않으면 격렬하게 반항할 것이 분명했다. 슬그머니 휴대폰의 비상 버튼을 누른 신채영이 다시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사람들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거죠? 휴게소에 왔던 각성자는 거의 숨이 넘어가던데.”
“뼈를 맞추고 독을 제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죠.”
“그전에 있었던 사건은… 무슨 의도로 한 거죠?”
“그전의 일이라뇨.”
“가짜 약 사건 말이에요. 그쪽이 나눠준 흥분제 때문에 사람들이 광폭해졌잖아요.”
토끼 가면 여성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
“흥분이 아니라 피로를 회복시켜 주고, 잠재 능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영약을 만들어 나눠준 것뿐이에요.”
토끼 가면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약 때문에 던전에 들어갔던 수많은 각성자들이 목숨을 건졌어요. 하지만… 그 잠재 능력을 폭발시킨 여파로 몇몇 각성자들이 넘쳐나는 힘을 다스리지 못하더군요.”
그때를 떠올리는 듯 토끼 가면 여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저는 약물을 나눠주는 걸 관두고 다시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었어요. 그게 잘못한 건가요?”
신채영이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요. 바로 무허가 치료라고요.”
“하지만 저는…….”
토끼 가면 여성이 뭐라고 입을 열 찰나.
우르르릉!
갑자기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쪽 하늘 부근에 뿌연 먼지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저건……!”
거대한 지네 모습을 한 몬스터를 보자 신채영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위험도 1만에 육박하는 히든몬스터, 기간트 펩이었다.
* * *
세이프던전 지역, 남동쪽 C급 던전 ‘드럼통’.
커다란 포대를 짊어진 그림자가 폭풍을 일으키며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천마였다.
“이상하군. 히든몬스터는 특정 조건에서 발현된다고 하지 않았나.”
드럼통 던전의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폐건물 옥상에 선 천마. 그는 몸을 빳빳하게 세운 채 각성자들을 후려치는 기간트 펩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그 넓적한 꽃을 뽑았다고 저게 튀어나왔단 말인가.”
천마가 메고 있는 포대 안엔 하트 모양의 꽃이 잔뜩 담아져 있었다.
청귤과 같은 상큼한 향기를 뿌릴 뿐 아니라, 신경통에 특효라고 알려진 ‘훌라훌라 꽃’이다.
드럼통 던전 부근에서만 핀다는 이 훌라훌라 꽃을 꺾으러 왔던 천마는 갑자기 출몰한 기간트 펩을 피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아마도… 저 기간트 펩은 일전에 천마 님이 죽인 기간트 펩과 한 쌍인 것 같습니다.]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채 기간트 펩을 올려다보던 무명이 말했다.
[어디까지나 예상이긴 하지만요.]
“한 쌍이라고?”
[일전에 천마 님이 기간트 펩을 처리할 당시, 한 마리가 아니라 한 쌍이 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등장한 히든몬스터가 천마 님만을 집요하게 추적할 리 없겠죠.]
멀리서 포효하는 기간트 펩을 바라보던 천마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어쨌든 본좌가 처리하면 되겠지.”
[안 됩니다.]
“어째서냐.”
[이미 기간트 펩과 몰려든 각성자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괜히 나서면 이목을 끕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자 천마는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곧 죽어도 각성자들의 생명이 우선이라고 훈수를 두었던 무명이 나서지 말라고 조언하다니?
천마의 내심을 짐작한 듯 무명이 말했다.
[천마 님은 대체로 한방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나왔던 히든몬스터들은 대체로 천마 님의 일격 때문에 등장했습니다.]
“흠.”
[솔직히 저는 천마 님이 이곳에서 기간트 펩을 잘못 처리했다가, 행여라도 더 큰 히든몬스터가 나올까 두렵습니다.]
무명의 말대로였다.
이상하게 천마가 손을 대면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히든몬스터가 출현했다.
게다가 드럼통 던전 부근엔 몬스터를 공략하려는 각성자들뿐만 아니라, 던전의 재료를 전문적으로 채취하는 배달꾼들도 많았다.
“본좌더러 그냥 가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응전 중인 각성자들을 보니 큰 피해 없이 충분히 승리할 것 같습니다.]
천마는 다시 기간트 펩과 싸우는 각성자들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각성자들이 여럿이 모여 힘을 합쳐 공격하니 그 위력이 대단했다.
각성자들이 팀을 이루는 이유도, 이처럼 다양한 스킬들이 한데 모이면 위력을 상승시킬 수 있고, 다채로운 전법으로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마가 몸을 돌릴 무렵.
“아악!”
전투를 벌이던 각성자 무리 중 몇몇이 기간트 펩의 팔에 맞아 우수수 쓰러졌다.
아무래도 이 정도 인원으론 각성자들이 기간트 펩을 처리하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늘 천마 님이 쉽게 제거하시는 걸 봐서 그런지, 아무래도 계산을 잘못한 것 습니다.]
윙윙 소리를 내던 무명이 천마의 포대 가방 안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일전에 구매했던 탈은 가져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