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55화 (55/285)

제55화. 천마, 징계받다 (3)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천마는 창고 방에서 내내 운공만 하고 있었고, 무명은 장채원의 곁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새벽.

모든 만물이 깊이 잠든 시각, 장채원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제 해가 뜨면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변론을 하더라도, 무명은 데이터 삭제 명령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만이 영지 박탈을 피하고, 천마가 직원 신분을 유지할 길이니까.

“나노봇.”

금속세공의 신, 헤파이토스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

독자적인 사고가 가능하며 인간보다도 더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 기계생명체.

새로운 이름을 붙일 법도 한데, 장채원은 그 기계를 흔히 파는 기성품인 ‘나노봇’이라고 이름 지었다.

[부르셨습니까.]

장채원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방 안에서 둥그런 공 모양의 로봇이 떼구루루 굴러왔다.

[잠이 안 오시나요.]

장채원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무명이 더욱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디 가는 게 아닙니다. 물론 직원의 신분은 아니지만, 이곳에 머물며 장채원 님과 천마 님을 모시며 새로운 추억을 쌓으면 됩니다.]

“넌 무서움 같은 건 느끼지 않니?”

[제 주 업무는 던전의 안내와 몬스터에 대한 대응과 전투 분석입니다. 두려움을 느끼면 이 일을 할 수 없죠.]

장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 안 나나 보네. 처음에 용머리 던전에서 나온, 베히모스를 보고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아,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장채원 님의 능력을 몰랐으니까요.]

“천마도 같은 상황이지 않았나?”

[그건 장채원 님이 천마 님의 각성 등급을 가장 낮은 9급으로 설정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대답과 달리 민망함을 느꼈는지 무명의 말은 왠지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이 무명, 실수는 두 번 하지 않습니다. 천마 님의 전투 능력을 대번에 파악하고 각성 등급을 수정했으니까요.]

“무명… 그거 천마가 지어준 이름이지?”

[그렇습니다. 천마 님이 고심 끝에 지어주셨습니다.]

무명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뿌듯함, 그리고 굳은 믿음이었다.

믿음.

장채원에게는 전혀 없는 감정을 이 작은 기계가 갖고 있다. 그녀는 믿지 않는 천마를 이 기계는 믿고 있다.

‘천마… 를 믿는다고.’

그제야 장채원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도 무명을 믿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무명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나노봇.”

장채원은 둥그런 무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왜 이름을 나노봇이라고 했는지 알아?”

끼리릭.

머릿속에 연산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무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장채원 님은… 저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맞아. 난 너를 시중에 돌아다니는 나노봇이랑 별다를 바 없이 대했어. 아니, 대하려 했지.”

두 손으로 무명을 집어 든 장채원이 밤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거짓말이야. 너도 내게 특별해.”

[장채원 님.]

“무명이란 이름 잘 어울린다. 앞으로 나도 널 무명이라 부를게. 그러니까…….”

갑자기 장채원의 주변으로 미풍이 불어왔다.

휘이이잉.

점차 거세진 바람은 장채원의 머리칼을 하늘 위로 띄웠다. 동시에 그녀의 발아래에서 수백만 개의 푸른 광점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대신 이번엔 날 용서해 줘.”

어느새 소녀 같은 모습에서 관능적인 미녀로 변신한 장채원이 눈을 크게 떴다.

콰릉!

지진이 난 것처럼 거대한 한옥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더니 그녀의 두 눈에서 뿜어진 시퍼런 빛이 무명의 몸속으로 쏟아졌다.

[장채원 님. 장채원 님. 장채원 님.]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파고들자 무명의 목소리가 갈라지더니, 하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헤파이토스가 모든 능력을 쏟아부어 만든 기계생명체. 그 몸엔 상급신이 쏟아내는 신력에도 저항할 수 있는 단단한 보호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

콰우우우우!

하지만 장채원이 쏟아내는 푸른빛은 그 강력한 보호 시스템마저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무명이 깊숙이 숨겨두었던 그날의 장면이, 장채원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그때, 한줄기 붉은 구름이 허공에 솟구치나 싶더니 장채원의 곁에 떨어졌다.

내당의 건물이 통째로 뒤흔들리자, 창고 방에 있던 천마가 신법을 펼쳐 달려온 것이다.

“하아.”

순간 푸른빛이 모두 사라지며 장채원의 모습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점주.”

“무명, 천마. 너희들…….”

두 눈을 감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장채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멋진 척도 작작 좀 해!”

[장채원 님.]

“이런 건 나한테 상의해도 되잖아! 왜 멋대로 일을 처리하는데?”

“점주.”

“천마 너도 마찬가지야. 점주라고 생각했으면 조금은 의지했었어야지! 나랑 상의했었어야지!”

하늘이 떠나가라 소리친 장채원이 후우 소리를 내었다.

“너희 둘만 폼잡지 말고, 나도 가끔은 나서게 해달라고.”

천마는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됐어. 이젠 내가 다 알았으니까.”

무명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모든 걸 확인한 장채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무슨 말이십니까.]

천마를 힐끗 쳐다본 장채원은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닫았다.

‘무슨 말이긴. 천마 말야. 도대체 성격을 종잡을 수 없잖아. 세상 인정머리 없고 냉혹한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런 일을 벌인 건데?’

라고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현듯 무명의 보고서를 떠올린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저 시뻘건 눈 안에 들어오는 기준이 뭐야?’

[장채원 님?]

“흠흠.”

커다란 눈 센서를 크게 키워 자신을 바라보는 무명을 보며 장채원이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나에게 맡겨.”

* * *

중앙청사의 어느 건물, 대회의실.

스무 명 이상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호둣빛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만약 테이블마다 마이크가 달려 있지 않았다면 조선시대의 빈청(賓廳:궁 내의 고관들의 회의실)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각각 자리엔 어둠으로 물들어 있던 감찰관과 달리, 빛으로 만들어진 사람 형태의 그림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로 영지, 복복 인테리어의 징계 수위를 결정할 신계의 위원들과 위원장이었다.

“아무리 고도의 지능을 가진 로봇이라고 하지만, 이번 일엔 독자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 같군요.”

감찰관에게서 받은 조사 내용을 읽고 있던 위원장이 말했다.

-언급된 사항도 중징계 수준입니다만, 감찰관의 조사 거부와 사실 관계를 은닉하는 부분에서 더 큰 문제가 생겼군요.”

빛으로 둘러싸여 얼굴을 볼 순 없지만, 목소리는 매우 낮았고 위엄이 가득했다.

-이 경우 위원회에선 영지 탈락 선고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위원장의 시선은 테이블 끝에 앉아 있는 천마와 장채원, 그리고 무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채원이 문 옆에 서 있는 동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회의실 화면 위로, 무명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화면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곳엔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심장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에 말라 죽어가는 소녀의 고통스러운 모습.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에 피투성이가 된 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천마의 모습.

이러한 일이 발각되면 영지에서 쫓겨날 수 있음에도 전혀 거리낌 없는 무명의 모습이 출력되고 있었다.

“이들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의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행여라도 저 소녀가 얻은 특혜를 되돌릴까 걱정되어 사실을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동원의 눈에는 경멸 어린 빛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 이런 경우 원상복구 명령을 내리니까요.”

그 말에 빛으로 만든 그림자들이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동원의 얼굴이 점차 구겨지기 시작했다. 신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똑바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뭐, 퍽 감동적인 일입니다만… 역시나 월권에 가까운 행동이군요.

-솔직히 말해서 권한 밖의 일에 관여한 셈 아닙니까?

-평등의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영지에 관련된 자가 인간들에게 작정하고 혜택을 주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요.

영상을 모두 보았음에도 대부분 위원들의 마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인간들의 삶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들이 만들어낸 법과 질서를 중시할 뿐.’

어찌 보면 냉혹하리만큼 차가운 위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동원은 역겨움을 느꼈다.

-흠. 절반 정도 의견이 나뉘는군요. 이렇게 되면…….

위원장이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채원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아무래도 영지 운영은 제 쪽에서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 누님.”

“그저 아픈 사람을 돕기 위해 희생한 것뿐이잖아요? 그런 걸 보고도 평등이니 월권이니 하는 말이 나와요?”

그러자 위원들의 입에서 싸늘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씀을 삼가시길.

-우리는 신계의 공무원. ‘세계의 법칙’을 지켜야 하는 관리자입니다.

-혜택을 받으려면 다 같이 줘야겠죠. 뭐, 애당초 이 세계는 던전의 혜택을 받는 자가 한정되어 있지만요.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던 장채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잘난 법칙을 지키려다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거 아닌가요?”

“누, 누님.”

“이 녀석들은 그저 간신히 회복한 소녀가 다시 아파질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뿐이라고요! 법칙이니 규칙이니 하면서 원상복구 시킬까 봐!”

장채원의 말에 위원장의 그림자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어느 정도 각오가 된 것 같군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그리고 위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중지는 모아진 것 같으니, 그럼 징계 수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부로 복복 인테리어 매장은 영지 자격을…….

“잠깐만요.”

그때 동원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천마 님은 이 세계의 인족이 아닙니다. 우연히 시공의 틈새에 들어와 영지에서 일하게 된 것뿐이죠. 이쪽 세계의 법칙에 가둬둘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위원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그는 인족. 우리 세계에 왔으면 우리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맞네. 자네는 나서지 말게나.

“규칙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동 차장. 자네가 나설 자리가 아닐세.

입술을 깨물던 동원은 전에 없던 표정으로 이를 깨물었다.

“이런 일로 영지 자격을 박탈한다는 건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정식으로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뭐라고?

“아냐, 됐어.”

자리에서 일어난 장채원이 두 눈에서 푸른빛을 번뜩였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쏟아지더니 회의실 내부에 앉아 있던 그림자들, 빛의 형태로 둘러싸인 모습들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이, 이것이…….

장채원의 눈과 마주친 위원들은 당황했다.

그녀가 빛으로 가려진 자신들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아, 다 아는 얼굴이구만.”

머리카락마저 푸른빛으로 물든 장채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은총을 모은답시고 영지에 묶여 있는 내가 멍청한 거지. 내가 멍청한 거였어.”

“누, 누님.”

-하하하하!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심지어 장채원의 힘에도 빛이 흔들리지 않던 구석에 앉아 있던 위원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여러분들이 졌습니다. 저 채원 양이 영지에서 벗어난다고 하면 누가 뒷감당을 하시겠습니까?

구석에 앉아 있던 위원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저기에 있는 천마 님은 다른 세계의 인간, 저 나노봇은 신의 손에서 태어난 기계…. 그럼에도 이 세계를 사랑해 주고 이 세계의 인간들 또한 사랑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위원장을 포함한 위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는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런 처벌 없이 돌려보낸다면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뭐, 저는 처벌을 반대하는 것에 한 표를 던지도록 하죠.

푸른빛으로 물든 장채원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그림자가 나직이 말했다.

-또 보죠, 채원 양. 그럼 저는 이만…….

후욱 소리와 함께 구석에 앉아 있던 위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대회의실 내부에는 적막이 흘렀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위원들은 한참을 쑥덕였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다시 한번 의견을 모은 위원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징계를 결정하였습니다.

* * *

며칠 후.

양복 대신 장화와 몸빼바지를 입은 동원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제가 이걸 해야 하는 거죠?”

“그러게 그냥 화면만 틀어주고 가라고 했잖아.”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채 물속에 있는 쓰레기들을 열심히 줍고 있던 장채원이 혀를 찼다.

“누가 괜히 나서래.”

“괜히 나서다니요? 누님. 말 그렇게 섭섭하게 할 겁니까?”

당시, 징계위원회의 결정은 이러했다.

-충분히 정상 참작이 되는 상황이므로, 복복 인테리어에 대한 징계는 없는 것으로 하겠다. 다만 영지를 운영하는 자로서 품의 유지 의무를 저버린 부분이 인정되므로, 신뢰로 얻은 은색, 은총꽃 10건 회수. 그리고 12시간의 봉사 활동을 명한다.

순간 동원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어진 말을 듣기 전까진.

-동 차장, 너도 포함해서.

“네?”

-무례는 네가 더 저질렀지. 공정함과 품위를 유지해야 할 신계의 공무원이, 감정에 휘둘려 정당한 근거도 없이 상부에 항의를 한다고? 고얀 놈 같으니라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동원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전 누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괜히 저만 왕창 찍혔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동원의 어깨를 두들긴 장채원이 웃으며 말했다.

“끝나고 너도 짜장면 사줄게. 됐지?”

“제가 천마 님인 줄 아세요?”

동원이 강가 구석에서 묵묵히 쓰레기를 줍고 있는 천마를 힐긋 바라보자, 장채원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탕수육도.”

“누님!”

두 사람이 툭탁거리는 모습을 보던 천마가 어깨에 매달린 무명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두 사람, 사이가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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