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53화 (53/285)

제53화. 천마, 징계받다 (1)

한가롭고 평화로운 오후였다.

별다른 시공이 없던 천마는 응접 테이블에 앉아 그동안 읽지 못했던 인테리어 잡지를 읽고 있었다.

뜨거운 녹차를 훌훌 마시던 천마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용하군.”

그렇다. 조용했다.

장채원이 씩씩거리며 돌아오기 전까진 말이다.

“천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장채원의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천마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본좌는 줄곧 이 탁자에 앉아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영지 등급을 박탈하겠다고 신지관리팀에서 연락이 오냐고!”

“그게 무슨 말이냐.”

“직원 잘못이래잖아. 직접 봐!”

장채원은 천마의 눈앞으로 붉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든 천마는 씌여진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귀사의 직원이 던전에 들어가 무단으로 히든몬스터를 불러내어 유물을 채취하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이에는 어설픈 각성으로 심장이 병들어간 김혜원을 치료하기 위해, 천마가 히든몬스터인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했던 내용이 쓰여 있었다.

띠리리릭.

그때 창고 방 충천 스테이션에 몸을 뉘고 있던 무명의 눈에서 반짝하는 빛이 떠올랐다.

[천마 님.]

빠른 속도로 창고 방에서 굴러나온 무명이 천마에게 다가왔다.

[그걸 저에게도 보여주시겠습니까?]

천마가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무명이 풀쩍 뛰어올랐다.

[역시 그 일 때문이군요.]

열심히 붉은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던 무명이 장채원에게 말했다.

[장채원 님. 이 일은 천마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뭐?”

몸에서 앙상한 팔을 뽑아낸 무명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모두 저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까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장채원이 말했다.

“무슨 말이야. 네 잘못이라니?”

묵묵히 앉아 있던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던전에 갔을 뿐이다. 그러다 히든몬스터 한 마리를 잡았지.”

“뭐?”

[던전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잡은 겁니다.]

“미노타우로스? 그 국보급 유물이 나온다는 히든몬스터?”

장채원이 입을 벌리자 무명이 고개를 저었다.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천마 님은 불법이라는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고요.]

천마는 살짝 놀란 눈으로 무명을 바라보았다.

‘거짓말도 할 줄 아는군.’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냐.”

장채원은 엄숙한 표정으로 붉은 종이를 가리켰다.

“영지에서 일하는 직원이 아무런 이유 없이 던전에 들어가 히든몬스터인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했어. 지금 이게 어떤 일인 줄 알아?”

천마는 그저 편의점에서 일하던 소녀, 김혜원을 살리기 위해 무명과 함께 던전에 들어갔을 뿐이다.

하지만 불법이라는 걸 인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던전에 몰래 들어간 거야?”

장채원의 말에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개인적인 용무였다.”

“전에 말했잖아. 신의 의뢰를 해결해 주고 보수를 받는 자들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던전에서 이득을 취할 순 없다고.”

“이득을 보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럼 뭔데?”

천마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 자신조차도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진 못했다.

편의점에서 받던 혜택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죽어가는 소녀가 안타까워서? 그것도 아니면 대지유신이라는 존재가 있음에도 인간들이 병으로 죽어가는 부조리 때문에?

“미안하군.”

천마의 사과에도 장채원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최소한 나한테라도 미리 말했어야지! 미리 말만 했더라도 이런 일은 없잖아.”

“점주.”

“거기에 적혀 있잖아! 영지를 박탈당할 수도 있단 말야!”

버럭 소리친 장채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일이 얼마나 큰일인 줄 알아? 우리 매장이 문을 닫을 수 있는 사안이라고!”

딸랑.

그때 풍경 소리와 함께 양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신지관리팀의 공무원, 동원이었다.

“누님.”

굳은 표정으로 들어온 동원. 그 역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붉은 종이를 발견하곤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너도 이것 때문에 온 거야?”

장채원이 붉은 종이를 들이밀자 동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위쪽에까지 보고가 되어서요.”

“고작 영지 직원이 몰래 히든몬스터를 잡은 일이?”

“암암리에 하는 건 몰라도, 이렇게 증거가 나오면 일이 커지는 거 알잖아요.”

천마를 슬쩍 바라보던 동원은 목이 막힌 듯 마른기침을 삼켰다.

“그 던전에 망가져서 버려진 나노봇이 있었나 봐요. 그런데 우연히 그걸 발견한 짐꾼이 메모리 칩을 조사하다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는 천마 님의 광경을 봤고요.”

동원이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던전 밖으로 걸어 나오는 천마와 무명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온라인에 올려둔 걸, 저희가 먼저 확인해서 퍼지는 건 막았지만… 상부까지 보고되는 걸 막진 못했어요.”

장채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네가 직접 처벌하려고 온 거야?”

“그럴 리가요. 감사실에서 사람을 보낸다는 걸, 일부러 제가 온 겁니다. 누님, 제 성격 아시잖아요?”

“점주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때 천마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모든 건 본좌가 책임지겠다.”

동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마 님. 이 매장은 채원 누님이 운영하고 있어요. 즉 누님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러자 무명이 동원에게 말했다.

[천마 님은 던전에 관한 금지사항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일은 안내를 잘못한 제가 처벌받으면 끝나는 일입니다.]

“시끄러, 둘 다.”

무명이 끼어들자 장채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천마를 직원으로 채용한 건 그녀 자신이다. 동원의 말대로, 어떤 경우라도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사실 그녀는 천마가 언젠가 던전에 관련하여 사고를 칠 수도 있다는 것조차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노봇을 붙여둔 것인데… 같이 사고를 칠 줄이야.’

장채원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무명을 바라보았다.

‘가만? 나노봇이 사고를 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수다스럽긴 해도 무명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두뇌를 가지고 있다.

즉, 몬스터의 특징과 전투에 관한 분석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법과 질서에 관해서도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그런 무명이 천마를 데리고 던전에 들어갔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예견하지 못할 리 없다.

“나노봇. 혹시 너 말이야.”

장채원이 입을 떼자 동원이 품속의 휴대폰을 슬쩍 가리켰다.

“누님.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지금은 괜히 오해받을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동원의 휴대폰은 자동으로 녹음을 하거나 영상을 찍고 있는 것 같다.

“나중에라니?”

“우선 저와 함께 가시죠.”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조사를 받으라는 거야?”

장채원이 한숨을 쉬자 동원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오늘은 그냥 감사실에게 간단한 사실 관계만 물어볼 거니까요. 처분은 추후 열릴 징계위에서 결정될 겁니다.”

“그게 조사라는 거거든?”

“본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군.”

가만히 듣고 있던 천마가 동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신계의 공무원이라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본인들을 불러 귀찮게 조사를 하는 거지.”

“네?”

“그곳에도 신이 있을 게 아닌가.”

잠시 눈을 깜빡이던 동원은 천마가 말한 뜻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있는 건 모두 대지유신입니다. 즉, 인간과 같은 땅을 밟고 살아가며 맡은 바 일을 하시는 것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지유신이라는 존재는, 천마 님이 말한 전지전능한 ‘신’을 뜻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짓말을 하나.”

“예?”

천마는 날카로운 눈으로 동원의 몸을 쓸어내렸다.

“이 동네엔 이면귀라는 요신이 산다. 본좌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 노인장은 손가락 하나로 지식을 전달해 주었지. 뿐만 아니라 본좌의 기억마저 슬쩍 들여다보았다.”

가늘게 떠진 천마의 눈동자에선 은은한 붉은빛이 맴돌았다.

“동네에 사는 요신만 불러도 낱낱이 조사할 수 있을 텐데, 신계에 그런 능력을 가진 신이 없다고?”

“아, 물론 이면귀 님 같은 능력을 가진 분들도 계시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면귀 어르신이 아니라 그 어떤 신도, 천마 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순 없죠.”

“무슨 말인가.”

“천마 님도 영지에서 일하는 직원이시니까요.”

동원은 천마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영지에서 일하는 동안은 천마 님도 신계의 일원입니다. 그 때문에 던전에 사사로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요.”

그런 거였나.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천마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신계의 일원이라.’

그때 시계를 바라보던 동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님.”

시선을 마주친 장채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면 되잖아.”

종합청사. 정부의 행정기관 부처가 모여 있는 곳.

그 커다란 부지의 동쪽 끝자락에 지어진 별관엔 매우 은밀한 문이 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이 문은 인간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오직 땅을 밟고 살아가는 대지유신이나, 영지의 주인들만이 그곳을 드나들 수 있다.

“이쪽입니다.”

동원의 안내로 빛으로 만들어진 문을 통과하자 사방이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일순간 한옥풍으로 지어진 수십 개의 건물들이 눈에 보였다.

바로 이곳이 바로 신계의 행정기관이 모여 있는 신계 중앙청사였다.

“여깁니다.”

고래 등처럼 둥글게 휘어진 한옥풍의 건물로 들어가자 까맣게 물든 유리문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까만 문에서 빛이 나더니 전통 무관 복장을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분칠을 한 듯 창백한 피부였으나, 두 눈은 봉황처럼 길었고 위엄이 가득했다.

“시설 관리부 신지관리팀 차장, 동원입니다.”

“저 기계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무관 복장을 한 남성이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무명을 가리켰다. 그러자 동원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기계가 아닙니다. 위에 보고도 해놨고요. 이번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참고인 자격으로 참석한 겁니다.”

무관의 투명한 눈이 무명의 몸에 고정되었다. 잠시 눈썹을 찌푸린 무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누님. 천마 님. 이쪽으로.”

동원이 검은 문에 들어서자 천마와 장채원이 뒤를 따랐다.

검은 문 안으로 들어서자 상쾌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고 고풍스럽게 꾸며진 사무실이 보였다.

동원이 까맣게 칠해진 나무문 앞에 서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저절로 문이 열렸다.

“감찰관님. 여기는 복복 인테리어에서 오신 장채원 님과…….”

“수고하셨습니다. 동 차장님.”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동원의 말을 끊은 목소리가 또다시 천마와 장채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두 분,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림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목소리로 불러내자 장채원이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 모습을 발견한 동원이 낮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누님. 아무래도 천마 님이 인족이시다 보니…….”

“알아. 천마가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거.”

“누님.”

“괜찮아. 그냥 그렇다는 거뿐이니까.”

불쾌한 감정을 꾹 눌러 참은 장채원이 동원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괜찮으니까, 볼일 봐.”

싱긋 웃은 장채원이 빛으로 된 문 안으로 들어가자 천마도 묵묵히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누님.”

동원은 문득 장채원의 과거 모습을 떠올렸다.

세상 모두를 찢어버릴 듯한 푸른빛을 휘감은 채 위엄있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장채원의 모습을.

“저희를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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