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천마와 싱크대 (1)
매장이 한가할수록 천마는 눈치가 보인다.
응접 테이블에 앉아 차를 훌훌 마시며 인테리어 서적을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1주일 내내 일이 하나도 없다 보니, 타인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천마조차도 장채원의 눈치를 슬슬 보고 있었다.
‘그랬던 건가.’
그제야 천마는 한가한 객잔의 점소이들이, 왜 그토록 탁자를 열심히 닦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점소이들은 탁자를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놀고 앉아 있으려니 총관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창고 정리라도 해야겠군.’
점소이들의 고단한 삶을 십분 공감한 천마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려는 순간.
딸랑.
그때 풍경 소리와 함께 매장의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키는 몹시 컸으나, 몸이 깡마른 탓에 어딘가 모르게 궁핍해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문을 연 남성은 다시 밖으로 나간 뒤, 젊은 여성이 앉아 있는 휠체어를 이끌고 매장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휠체어에 탄 여성 역시 몸이 깡말라 있었다. 하지만 용모는 매우 수려했으며 기품있는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던 천마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희는…….”
“네?”
남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천마는 이내 손을 흔들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을 무렵, 장채원이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세요.”
어색한 표정으로 매장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던 남성이 말했다.
“저, 맞춤 싱크대 좀 제작하려고 하는데요.”
“맞춤 싱크대요?
“네. 일반적인 싱크대는 불편해서 맞춤으로 제작하려고요.”
휠체어에 탄 아내를 힐긋 바라보던 남성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명 메이커 제품들은 맞춤으로 제작하면 가격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그런데 왕도 부동산 실장님이 이곳이 저렴하다면서 소개를 해주셔서…….”
“아, 왕도 부동산에서 소개받으셨군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장채원이 빙긋 웃으며 응접 테이블을 가리켰다.
조심스레 휠체어를 민 남성은 아내의 옆에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그 와중에도 한 손을 꼭 잡고, 연신 사랑스러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내분과 남편분께서도 같이 쓸 수 있는 맞춤 싱크대 제작을 원하시는 거네요.”
열심히 이야기를 듣던 장채원의 말에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끔 아내의 몸이 안 좋을 땐 제가 집안일을 주로 해서요.”
“네에.”
메모 수첩을 내려다보던 장채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동으로 높낮이가 조절되는 싱크대는 흔한 편은 아니지만 제작하는 곳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제작 비용이 퍽 비싼 편이었다.
“제가 갖고 있는 예산으로 가능할까요?”
남성의 질문에 장채원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남성이 말한 예산으론 평범한 대리석 싱크대 하나조차 간신히 맞출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아, 그게…….”
장채원의 곤란한 표정을 발견한 남성이 고개를 떨굴 무렵.
“그렇군. 싱크대가 필요했나.”
멀리서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마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좋다. 본점에서 제작해 주도록 하지.”
“네?”
“때마침 본점에서 맞춤 싱크대 무료 제작 행사 중이다.”
“정말요?”
“본좌가 추후 방문할 터이니, 주소를 적어두고 가라.”
멍하게 선 채 눈을 깜빡이던 장채원이 천마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속삭였다.
“너 미쳤어?”
“뭐가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나 보고 공짜로 싱크대 제작을 해주라는 거야?”
“그럴 일 없다.”
“뭐?”
팔짱을 낀 천마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라. 본좌가 제작하면 되는 일 아닌가.”
장채원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천마는 왜 이 젊은 부부에게 공짜로 싱크대를 제작해 주려는 것일까.
“너…….”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고객 앞에서 실랑이를 할 수도 없는 일.
눈치를 보던 장채원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활짝 미소 지었다.
“아아, 깜빡했네요. 저, 저희 매장에서 싱크대 무료 제작 행사가 있는 걸 깜빡했어요. 하하.”
“정, 정말요?”
“네에. 여기 있는 천마가 제작을 해드릴 거예요.”
“감,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던 남성은 아내의 손을 잡고며 싱긋 미소 지었다.
눈빛을 교환하는 두 부부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흘러나올 지경이다.
‘천마 녀석. 설마, 의외로 저런 것에 약한 건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장채원이 가자미눈을 뜨고 천마를 바라볼 무렵.
“그럼 싱크대 제작하는 대로 연락드리고 방문할게요.”
남성이 다시 한번 장채원을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저희 매장에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채원이 같이 고개를 숙이자 남성은 천마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염려 붙들어 매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부부는 연신 장채원과 천마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매장을 떠났다.
고객이 나갈 때까지 활짝 미소 짓고 있던 장채원이 천마를 향해 시선을 홱 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수로 높이 조절형 싱크대를 공짜로 만들려고?”
“던전에 들어가면 되지 않나.”
“뭐? 던전?”
“그렇다. 던전에 있는 재료들을 조합해 보면 싱크대 정도는 만들 수 있겠지.”
“잠깐만. 너 그럴 생각으로 이 일을 맡은 거야?”
장채원의 말에 천마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너 미쳤어? 던전이 아무나 가서 물고기를 건져오는 낚시터인 줄 알아?”
“안 될 이유도 없잖나.”
“말했잖아. 신뢰를 제외하고는,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 위해 갈 순 없다고.”
그러자 천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어딘가 음흉하리만큼 능글능글한 미소를 보자, 장채원은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공짜로 제작해 주니까?”
“그렇다. 공짜로 제작해 주는데, 사사로운 이익 따윈 얻을 수 없지 않나. 전혀 문제없다.”
“야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던전 재료로 싱크대를 만들다니… 우리 매장이 무슨 각성자 상점인 줄 알아?”
황당함을 꿀꺽 삼킨 채원이 코끝을 찡그렸다.
“인간들 눈엔 우리 매장은 평범한 인테리어 업체야. 그런데 던전에서 나온 물건으로 싱크대를 만들겠다고?”
“일반 사람이 알 턱이 있겠나.”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반대야. 안 돼.”
허리에 손을 올린 장채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반 고객에게 던전에서 나오는 재료로 싱크대를 만들어주겠다니. 그것도 무료로 말야.”
“안 되는 건가.”
“당연히 안 되지.”
“곤란하군.”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천마의 두 눈이 깊어졌다. 그 표정은 진심으로 곤란해하는 듯한 모습이다.
깊은 생각에 빠진 천마를 지켜보던 장채원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마, 너 대체 왜 그래?”
“뭐가 말인가.”
“너,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 관심 없잖아? 지나가는 노인이 넘어져도 ‘관절이 상했군. 틈틈이 운동을 해라’라고 지나가던 녀석이, 저 부부는 왜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건…….”
잠시 멈칫한 천마는 빤히 응시하는 장채원의 시선을 피했다.
“알 것 없다.”
“뭐? 왜?”
“본좌의 개인 사정일 뿐이니까.”
“개인 사정? 무슨 사정이 있는데?”
장채원은 전에 없던 호기심이 크게 일었다.
천마는 타인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금전적 이익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런 천마가 대가 없는 막노동을 치겠다니?
“흠, 사정을 말해주면 못 도와줄 것도 없는데.”
헛기침을 한 장채원이 천마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내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도 아니고… 틈틈이 기부도 많이 하는데, 그까짓 싱크대쯤이야.”
“으음.”
팔짱을 낀 채 고심하던 천마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빚이 있다.”
“뭐? 빚? 언제 저 사람들한테 돈을 꾼 거야? 돈도 없는 사람들 같은데. 벼룩의 간을 빼먹지.”
쉴 새 없는 수다에 천마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데.”
“그러니까…….”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던 천마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실대로 이야기해도, 점주가 믿을지 미지수다. 이 일은 없던 걸로 하는 게 좋겠군.”
“야, 네 멋대로 결론 내지 말아줄래?”
발끈한 장채원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얼굴을 봐. 왠지 믿음이 차오르지 않아?”
“안 차오른다.”
“…….”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한 장채원이 다시 말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테리어 전문가가 나, 장채원이라고.”
더없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그녀는 천마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올렸다.
“자, 이제 이야기해 봐. 믿어줄 테니까.”
“으음. 좋다.”
팔짱을 낀 천마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본좌가 무림을 질타할 당시에…….”
* * *
무림은 천마에게 끊임없이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저 천마라는 이유로, 아니 고금제일인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핏물에 절어 땅과 하늘을 찌를 듯 쌓인 시체들을 바라보던 천마는 불현듯 무림의 삶에 환멸을 느꼈다.
‘잠시 떠나볼까.’
천기를 헤아릴 줄 아는 마기자와 천마가 손수 길러낸 십삼야랑만으로도 만마집궁은 언제나 건재할 것이다.
한시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애검, 극천마저도 처소에 놔둔 채, 천마는 만마집궁을 빠져나왔다.
정체를 숨긴 채 풍진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던 그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두메산골에 이르렀다.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시냇물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텃밭이 일구어져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안쪽, 우거진 나무숲 사이엔 숨어 있는 듯한 작은 목옥이 있었다.
“허어, 이런 곳에 집을 지어 놓았다니.”
“누, 누구시오?”
목옥 안쪽에서 나온 젊은 청년은 천마를 발견하고는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부귀장에서 보낸 것이오?”
“부귀장?”
천마는 인상을 썼다.
부귀장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 장원인지도 모를뿐더러, 청년이 자신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은 모른다.”
천마의 대답에 청년은 눈을 껌뻑였다.
좀 과장해서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큰 듯한 체구에, 눈빛이 붉은색으로 번뜩번뜩 빛나는 눈동자에선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결코 부귀장에서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청년은 태산처럼 우뚝 서 있는 천마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실례했습니다, 대협. 제가 뭔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대협…이라고?”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몰라보는 건 둘째치고, 고금제일마인이라는 자신을 정파의 인물로 착각하다니.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은 천마가 중얼거렸다.
“대협이란 말은 처음 듣는군.”
“아, 죄송합니다. 저희 부부는 산중에서 사는지라. 대인의 존성대명을…….”
“신경 쓸 필요 없다. 애당초 이곳에 멋대로 들어온 건 본좌이니.”
‘본좌?’
청년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장상(將相)급 관인들이 본인을 지칭하는 단어를 무림인이 사용하다니? 아무래도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싶었다.
“온 김에 물이나 한잔 얻어먹을 수 있겠나.”
주변을 둘러보던 천마의 말에 청년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에요, 여보?”
그때 목옥의 문이 열리며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불편한 듯 바퀴가 달린 의자를 타고 나온 여성은 천마를 보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설, 설마 부귀장에서…….”
괘씸한지고.
이 두메산골에는 고금제일인의 명성이 아직도 전달되지 않았단 말이냐.
두 쌍의 남녀에게 차오르는 부아를 꾹 누른 천마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본좌는 천마다.”
“네?”
“본좌가 바로…….”
근엄한 천마의 표정에도 이 젊은 부부는 산중에서 산도적을 만난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부아를 꾹 누른 천마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둘은 본좌를 모른단 말이냐?”
그러자 여성이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줄곧 이곳에 지내는 터라, 바깥일에 어두워서…….”
천마는 황당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잘해야 약관을 갓 넘겨 보이는 젊은 부부가 이 외딴 산중에 숨어 살다니. 무슨 대역죄라도 저질렀단 말인가?
“으음.”
천마는 침음을 내었다.
타인의 일에 아무리 무심한 그라고 해도 이 젊은 부부의 속사정이 너무나 궁금했다.
“여기 있습니다.”
그때 부엌에서 나온 청년이 쩔룩거리며 천마에게 공손히 물그릇을 올렸다.
“부상을 입었군.”
천마는 혀를 찼다.
물그릇을 든 청년의 왼쪽 어깨는 아래쪽으로 심하게 처져 있으며 오른발도 절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지 꽤나 오래되어 보인다. 근육과 힘줄이 모두 굳어버린 탓에, 설령 천마가 직접 손을 써도 회복시키기 어려운 상태였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게 아닌데.”
“네. 오래전에 말을 타다 부상을 입었습니다.”
대번에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꿀꺽꿀꺽.
그릇에 담긴 맑은 물을 들이켠 천마가 입가를 쓰윽 닦았다.
“잘 얻어 마셨다.”
“저, 저기. 대인.”
청년은 돌아서는 천마를 향해 말했다.
“죄송하지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깜빡했군.
천마는 이유 없이 남의 호의를 받지도 않지만, 받은 것은 몇 배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물그릇을 내려다본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말하라.”
“이곳에서 저희를 본 것을… 잊어주시겠습니까.”
“그게 부탁이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청년의 두 눈은 살짝 겁에 질려 있었지만, 맑고 깨끗했다.
터럭만큼의 나쁜 짓도 저지를 수 없는 선한 관상이다. 피비린내 나는 무림인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두 젊은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천마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왜 이 깊은 산중에 숨어서 사는지, 이유를 소상히 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