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50화 (50/285)

제50화. 던전 속의 설녀 (2)

“어떻게 된 거야!”

긴급 구조를 마치고 빌라로 돌아온 한만재는 크게 당황했다.

“이 녀석! 전화기까지 두고 어딜 간 거야.”

잠깐 나갔으려니 생각했던 아들, 한호조가 저녁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갈 만한 곳을 몽땅 뒤져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형님, 그러지 말고 위치 추적해 봐요.”

유은호의 말에 온 집안을 돌아다니던 한만재는, 그제야 팔에 장착된 초소형 컴퓨터를 켰다.

칠드런 락을 이용해 위치 추적을 하려는 것이다.

“이게 뭐야.”

스크린에 띄워진 지도를 바라보던 한만재는 두 눈을 비볐다.

깜빡이는 붉은 점은 도심 지역이 아닌, 세이프던전 지역 끝자락에서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왜 호조가 던전 지역에 있다고 표시되는 거지?”

“던전 지역이요?”

“잠깐. 방금… 사라졌어. 이 부근에서.”

어느새 깜빡이던 붉은빛이 사라져 버렸다.

“세이프던전… 남서쪽 숲 부근?”

지도를 바라보던 한만재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 녀석. 거길 찾아간 거야!”

장비를 챙길 사이도 없이 한만재는 온 힘을 다해 던전 지역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한 걸음 한 걸음, 깊은 숲속으로 걸어갈수록 점차 주변의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따스한 바람은 살갗을 에이는 삭풍으로 변했고, 온 세상이 얼어버릴 듯한 차가운 공기가 숲을 뒤덮었다.

‘흠.’

그 냉기가 어찌나 매서운지 한서불침에 도달한 천마마저도 눈썹을 찌푸릴 정도였다.

하지만 한호조는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짹짹짹 하는 맑은 새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더니, 숲의 모습이 또다시 달라졌다.

어두웠던 숲속은 점차 따스한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쬈고, 오색빛으로 반짝이는 꽃가루가 사방에 흩날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물가에 도착하자, 한호조의 귓가로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흐리멍덩했던 한호조의 눈빛이 돌아왔다.

“아…….”

물가 앞엔 빛으로 둘러싸인 그림자가 있었다.

한호조가 걸음을 멈추자 빛의 그림자는 어느새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저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음처럼 차갑게 정지된 눈동자, 눈으로 만든 것처럼 하얀 머리칼. 천마는 대번에 소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설녀(雪女)로군.’

한호조의 눈앞에 나타난 소녀는 다름 아닌 전설 속에서나 거론되는 신화적 요괴, 설녀였다.

주르륵.

설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호조의 눈에서 맑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약속 지키러 왔어요.”

심호흡을 한 한호조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 해치지 마요.”

커다란 한호조의 눈망울을 바라보던 하얀 머리칼의 소녀, 설녀의 눈동자가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이 작은 꼬마 아이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2년 전.

부모님의 손을 잡고 던전 견학을 위해 이 숲으로 놀러 왔던 한호조.

하지만 돈에 눈이 먼 미등록 각성자들로 인해 숲은 어느새 히든몬스터들로 뒤덮여 있었고, 결국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다.

“호조야. 어서… 도망가.”

큰 부상을 입은 한만재가 의식을 잃자, 한호조는 미친 듯이 숲속을 뛰어다녔다.

휴대폰마저 모두 박살 났기 때문에 숲 밖으로 나가 도움을 구해야 했다.

‘숲을 빠져나가야 해!’

하지만 끊임없이 우거진 숲은 어디가 어딘지,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한호조의 머릿속에서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자, 머릿속에 잠재되어있던 SS급의 다중 계열 스킬, 전능시야(全能視野)가 발휘된 것이다.

‘다 보여. 숲이 전부 다.’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숲을 내려다보던 한호조. 문득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폭포에 사람의 그림자가 있음을 발견했다.

“도와주세요!”

분명 전능시야로 살펴볼 때는 작은 폭포가 있는 곳이었는데, 막상 도착하자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뿌옇게 핀 안개 속을 지나치니 갑자기 드넓은 설원이 펼쳐지더니 맹렬한 눈보라가 쏟아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를 악물고 설원을 걷던 한호조 앞에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바로 설녀였다.

-너는 어떻게… 본녀를 찾은 거지?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 아빠가…….”

설녀에게 달려간 한호조는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설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비 쪽은 살려줄 수 있다.

“엄마, 엄마는요?”

-이미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다.

“그, 그럼 아빠라도 구해주세요!”

-내가 왜 구해야 하지?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그것은 한호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본연의 경멸이었다.

1,000년 가까이 살아온 그녀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약속을 안 지키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

“무엇이든 할게요!”

눈물을 쏟은 한호조는 설녀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제가 죽어도 좋아요. 제발, 부모님을… 살려주세요! 제발요!”

설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한호조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전능시야라는 초희귀 스킬을 발동한 탓인지 까맣게 물들었던 눈동자에선, 설녀와 비슷한 하얀빛이 흘러나왔다.

-너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설녀도 가족을 꾸릴 때가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한호조와 비슷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좋다. 살려주지.

하지만 또다시 인간들에게 배신당한 기억들이 떠오르자,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그 대신 두 가지를 약속해야 한다.

차갑게 말한 설녀는 슬픔에 가득 찬 한호조의 눈망울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본녀를 봤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그리고 2년 뒤에 혼자 이곳을 다시 찾아와 목숨을 바쳐라. 약속할 수 있겠느냐?

“네, 네.”

-만약 하루라도 늦는다면 너의 목숨 대신, 아비의 목숨을 거두겠다.

한호조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빛이 흘러나오더니 한호조와 설녀는 단숨에 아버지, 한만재가 쓰러진 곳으로 이동했다.

-명심해라. 누구에게도 본녀를 봤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걸. 그리고 2년 뒤에 반드시 네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걸.

한만재를 치료한 설녀는 차가운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을 알고 있었다. 1,000년을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이 약속을 지키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자제력이 약한 아이라면? 결과는 불 보듯 빤했다.

2년.

인간들이 마음속에 품었던 꿈, 목표, 그리고 약속을 잊어버리는 기간이다. 2년의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어김없이 마음이 달라진다.

설녀는 사실 어린 한호조가 이 던전 지역을 혼자 찾아올 수 있을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애당초 설녀라는 존재는 궁지에 몰린 인간을 반드시 도와야 한다. 대신 약속을 어긴 자는 죽일 수 있으니,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2년이 지난 뒤, 약속을 어긴 꼬마와 꼬마의 아비까지 없애면 그만이니까.

* * *

“약속, 지켜주세요.”

한호조의 말에 회상에서 깨어난 설녀가 눈을 번뜩였다.

그제야 설녀는 한호조가 한번 결심한 것을 절대 어기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만난 것도. 이 은밀한 숲의 던전도. 그 어떠한 것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너와 같은 인간도 있구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던전에 온 꼬마를 바라보는 설녀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쩔 수 없지.”

설녀는 팔을 내뻗었다. 그녀는 약속대로 아비의 목숨을 구한 대신 한호조의 목숨을 거두려 하는 것일까?

“나는 오래전에 맹세한 것이 있다. 만약 내가 말한 약속을 모두 지키는 인간이 있다면, 그자를 살려주기로.”

“네?”

눈을 질끈 감았던 한호조가 눈을 뜨자 설녀가 빙긋 웃었다.

“너와 같은 어린아이가 약속을 지키다니, 놀랍구나. 그럼 상을 줘야겠지.”

설녀가 미소 짓자 얼어붙은 호수가 봄날 햇살에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동시에 봄날의 햇살과 같은 따스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한호조의 시야를 뒤덮었다.

“호조야.”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눈을 뜨자 초점이 맞춰지더니 아름다운 실루엣이 보였다.

바로 꿈에도 그리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

“호조야.”

두 모자는 빛이 되어 다시 만났다.

폴짝 뛰어간 한호조는 엄마에게 안겼다. 그리고 따스한 냄새와 부드러운 품을 잔뜩 만끽했다.

“엄마다. 정말 엄마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엄마가 정말로 눈앞에 있었다.

그동안 어른처럼 의젓함을 지키던 한호조는 우아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보고 싶었어! 엄마!”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한호조는 열두 살 소년에 불과했다.

행여라도 아버지가 괴로워할까 봐, 슬퍼하지도 못한 채 2년이란 시간을 견뎌왔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잘못될까 봐, 2년 동안의 시간을 하루도 잊지 않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엄마 품에서 조금 자렴.”

“으응.”

따스한 엄마 품속을 파고든 한호조는 금세 잠이 들었다.

입을 벌린 채 자고 있는 한호조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엄마가 나직이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한호조의 엄마, 아니 설녀의 눈앞에 회색빛 그림자가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천마였다.

“설녀라.”

천마는 감탄인지 탄식일지 모를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좌가 있던 곳에서도 비슷한 전설이 있었지. 설녀와 만났다는 걸 말하면 죽게 된다는.”

여유롭게 다가오는 천마를 보며 설녀가 싸늘히 미소 지었다.

“본녀를 본 자는 결코 살려두지 않지.”

“좋은 마음가짐이로군.”

“뭐?”

“살인멸구. 고금이래, 비밀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이다.”

하얗게 타버린 재를 보는 듯한 삭막한 천마의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설녀와 닮아 있었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비밀이라는 걸 지키지 못하니.”

“그건 너를 포함한 말인 거냐?”

“본좌가 대다수의 인간 따위로 보이는가.”

천마가 혈염광휘를 번뜩이자 설녀는 살짝 당황했다.

“너는…….”

활활 타오르는 붉은 광채는 짐짓 뜨거워 보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은 모조리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니, 모두 삭아 재가 되어버렸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극도의 공허만이 담겨 있다.

“신기하구나.”

천마가 어떤 존재라는 걸 깨달은 설녀가 탄식을 내뱉었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한 자가, 어찌 1,000년을 산 본녀의 공허함을 이해한단 말인가.”

“세월 따윈 중요치 않다. 하루를 살아도 1만 년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으니.”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숲속에 내려앉았다.

“본녀는 이제 이 땅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녀의 힘에 억눌려 있던 이 던전 숲의 마물, 화망지룡(火網地龍)이 솟구칠 터.”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는 한호조를 내려다보던 설녀가 입을 떼었다.

“화망지룡의 손에서 이 아이를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겠지?”

“귀찮다. 본좌는 그저 호기심에 따라온 것뿐이다.”

“공짜로 해달라는 게 아니다.”

설녀의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천마와 닮아 있었다.

“대가를 주지.”

설녀가 하얀 팔을 내밀자, 투명한 빛이 솟구쳤다.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빛깔을 지닌 화려한 꽃송이 다섯 개가 천마의 눈앞에 피어올랐다.

“신력?”

그것은 천마가 신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힘, 신력이었다.

“그리고… 이거면 되겠나.”

설녀의 손엔 천마가 그토록 찾았던 ‘웃음 해바라기’가 들려 있었다. 신뢰를 위해 천마가 찾아 헤매던 유물이었다.

“허어, 본좌의 머릿속도 들여다봤단 말인가. 고약한 여인이로고.”

설녀를 빤히 바라보던 천마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잠깐 마물을 처치하고 5년의 내공이라면 꽤나 이득이다.

“충분한 대가를 받았으니, 그리하지.”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녀는 안고 있는 한호조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슬픔은 잠시뿐이란다. 너는 강한 아이니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게다.”

눈물 자국을 닦아준 설녀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본녀에 대한 기억을 숨기고 살아가게 해서.”

* * *

“이런 젠장!”

한만재는 땅을 후려쳤다.

유은호와 함께 세이프던전 지역 남서쪽 숲을 몽땅 뒤져봤지만 한호조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형님. 아무래도 이곳엔 없는 것 같아요.”

초고속 이동으로 숲 내부를 샅샅이 살핀 유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 우선 돌아가요. 대대적인 수색팀을 꾸린다면…….”

콰앙! 그때 폭발음과 함께 숲 한편이 무너져 내렸다.

“저, 저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몸길이가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솟구치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앞에 붉은빛에 둘러싸인 천마가 한 손에 한호조를 안아 들고 나타났다.

“호, 호조야!”

천마의 품에 안겨 있던 한호조를 바라보던 한만재가 황급히 달려갔다.

“호조야!”

“걱정 마라. 잠든 것뿐이니까.”

한호조를 조심스레 받아든 한만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천마가 입을 열기 전 무명이 말했다.

[이 소년이 실드경계지역을 몰래 넘어가는 걸 천마 님이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불법이라는 걸 알지만, 소년이 걱정된 천마 님이 은밀히 뒤따랐습니다만.]

“그럴 리가. 내가 여러 번 이 숲을 뒤졌는데.”

유은호의 탄성에 무명이 다시 말했다.

[이 숲엔 외부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공간이 많더군요.]

잠들어 있는 한호조를 바라보던 무명이 다시 말했다.

[그러다 숲속 깊은 곳에 쓰러져 있는 걸 찾았습니다만, 요상한 히든몬스터가 소년을 노리더군요. 천마 님은 소년을 지켜주기 위해…….]

“우, 우리 호조를 따라가 주었다고요…….”

한만재의 말에 무명이 천마처럼 팔짱을 끼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천마 님께서 이 몬스터를 처리하셨죠.]

한만재는 팔에 안긴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늘 그늘이 져 있던 평소 모습과 달리, 어딘가 모르게 행복한 모습으로 잠이 든 모습이다.

“호조야. 호조야…….”

사랑스런 아들의 뺨을 쓰다듬은 한만재가 천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아내는 던전에 몰래 들어가는 미등록 각성자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토록 증오했던 미등록 각성자가 위험에 빠진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아들을 구했다.

“저기…….”

두 주먹을 꽉 쥔 한만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개를 숙인 한만재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미등록 각성자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미등록 각성자가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주었다.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고 괴로웠다.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가슴에 박힌 가시를 뽑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만재를 바라보던 천마가 덤덤히 돌아서며 말했다.

“별거 아니다.”

“저기. 각성자 등록을… 하시면 안 됩니까?”

천마가 고개를 돌리자 한만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미등록 상태로 던전에 오는 건 불법입니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제가 각성자 등록을 약식으로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좋은 일?”

품속에 있는 웃음 해바라기를 내려다보던 천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본좌는 그런 일 따윈 안 한다.”

그 말을 끝으로 천마는 덤덤히 몸을 돌려 숲 밖으로 사라졌다.

“좋은 일 따윈 안 한다니.”

천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은호가 흠모의 눈빛을 떠올렸다.

“이 정도 일은 저분에게 좋은 일에 속하지도 않는 건가.”

평소 같으면 뭐라고 크게 면박을 줄 한만재 였으나, 지금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며칠 후, 천마의 옥탑방.

한만재와 함께 구봉산 맛과 세트를 가져온 한호조가 천마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만재는 쑥스러운 듯 뒤에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뭐가 말이냐.”

“멀리서 절 지켜주신 거요.”

“역시 다 봤나.”

“네. 제 스킬은 탐지가 아니라 전능시야거든요.”

[전능시야? 그 스킬이 발현된 건가요?]

그 말을 들은 무명이 충전스테이션에 튀어나왔다.

전능시야.

스킬이 발휘되는 공간의 영역에서,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모든 걸 관찰할 수 있다는 SS급의 스킬이다.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희귀한 스킬을 이 작은 소년이 가지고 있다니?

[왜 각성자 학교에 다니지 않는 건가요? 그 스킬이라면 협회장까지 바라볼 수 있을 텐데.]

“저는… 던전에 가는 게 싫어서요.”

무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엄마를 던전에서 잃었으니까.

“저, 예전에 이거 드시는 걸 은호 삼촌이 보셨다고 해서… 두고 가도 될까요?”

“기왕 가져왔으니 두고 가라.”

“그리고 저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한호조가 두 눈을 꽉 감고 말했다.

“앞으로 종종 놀러 와도 될까요?”

“거절한다.”

쾅.

전처럼 문을 세게 닫았지만, 전과 달리 매정하게 들리지 않았다.

한호조는 문 앞에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다시 들를게요!”

그 말을 들은 천마는 바닥에 있는 무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괜히 네 녀석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겼잖나.”

[죄송합니다. 천마 님.]

이라고 말했지만, 무명의 눈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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