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던전 속의 설녀 (1)
한호조는 꿈을 꾸고 있었다.
새하얀 빛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가 싶더니, 꽃이 피어나듯 작은 던전 하나가 눈앞에 생겼다.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던전 내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피어 있었다.
이어진 길을 따라 깊은 숲 안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맑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작은 호수가 흐르는 곳에 이르자 빛으로 둘러싸인 그림자가 있었다.
-명심해. 2년 뒤, 반드시.
귓가에서 울리는 싸늘한 음성에 한호조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한호조는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단 하루도 잊지 못했던 날이 곧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 * *
최근 특수대응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이프던전에 히든몬스터들의 출현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실드경계지역에서 머무는 특수대응팀은 히든몬스터가 출현할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가야 했으며, 때론 위험천만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히든몬스터들의 등장과 구조 요청은 계속 늘어만 갔고, 특수대응팀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팀장님. 혹시 말이에요.”
상황실로 복귀한 유은호가 상황실을 지키고 있는 초홍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최근 나타난 히든몬스터들, 앞집에 사는 천마라는 분께 좀 처리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뭐?”
“솔직히 그분 정도면 무슨 히든몬스터가 나타나도 한 방에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처럼 잡네, 마네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요.”
“은호야, 헛소리하지 마.”
팔뚝에 부착한 방패를 떼어내던 한만재가 싸늘하게 말했다.
“협회 직속의 특수대응팀이 범법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자고? 그게 말이 되냐.”
“범법자라뇨, 형님. 아직 죄를 짓지도 않은 사람한테.”
“각성자 등록도 하지 않고 몰래 던전을 가는 사람이 범법자가 아니고 뭐냐?”
“에이, 그때 보셨잖아요. 정말 좋은 일만 한다니까요.”
“난 그딴 거 안 믿어.”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살심을 억누른 한만재가 주먹을 꽉 쥐었다.
“명심해라. 이 세상에 의로운 미등록 각성자 따윈 없어.”
쾅.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 나간 한만재는 문을 세차게 닫으며 상황실을 나갔다.
그의 눈치를 보던 초홍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협회 소속 힐러였던 한만재의 아내. 그녀는 던전에 몰래 들어와 히든몬스터를 불러낸 미등록 각성자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런 한만재가 천마를 가만히 지켜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내력을 발휘하는 중인 것일 테니까.
다음날.
모처럼 한가한 일요일을 보내던 특수대응팀은 한만재의 집에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요리는 언제나 팀장인 초홍의 몫이었다.
원래 요리 실력이 출중한 데다, 다년간 선술집 ‘노병’의 주방을 맡고 있는 그녀는 전문 요리사 못지않은 솜씨로 팀원들의 식사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아빠.”
한만재 옆에 꼭 붙어 앉아 밥을 먹고 있던 아들, 한호조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제가 부탁드렸던 것 말이에요. 생각해 보셨어요?”
“응? 무슨 부탁.”
“던전 말이에요.”
한호조의 말에 무덤덤했던 한만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절대로 안 돼.”
“아빠.”
“대체 언제까지 조를 거야? 한번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엄하다 못해 매정한 대답이다. 입술을 깨물던 한호조는 의자를 박차고 방으로 들어갔다.
“호조야.”
유은호가 따라가려 하자, 한만재가 고개를 저었다.
“놔둬. 저러다 또 말 테니까.”
“형님. 근데 왜 호조는 자꾸 던전에 가야 한다고 조르는 거예요?”
유은호의 말에 한만재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삐익 삐익.
그때 팀원들의 휴대폰에서 또다시 붉은빛이 번뜩거렸다. 던전 내에서 구조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히든몬스터예요. 4급 각성자들이 모여 있는 팀에서 호출한 걸 보니 아마도 위험도는 3,000이상… 아무래도 세 사람 모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초홍의 말에 유은호가 투덜거리며 장비를 챙겼다.
“젠장, 요샌 밥 먹을 시간도 없네.”
팀원들이 우르르 나가자 빌라 내부는 적막에 휩싸였다.
‘모두 나갔나.’
방문을 열고 거실을 빼꼼히 살펴보던 한호조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방 안에 숨겨두었던 가방 하나를 꺼내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내일이면 8월의 마지막 날이 지나간다. 달력을 올려다보던 한호조가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서라도 가야 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둔 터였다.
조심스럽게 빌라 밖으로 나온 한호조는 실드경계지역으로 바짝 다가섰다.
푸른빛 너머 보이는 풍경을 멍하게 살펴보던 한호조는 실드를 향해 팔을 뻗었다.
우웅.
낮은 진동과 함께 묘한 반발력이 느껴지더니 한호조의 팔을 밀어내었다.
“칠드런 락.”
돈을 위해 어린 각성자들을 던전으로 내모는 비정한 부모들이 있다. 혹은 호기심이나 돈을 위해 몰래 던전에 들어가는 비행 청소년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나라에선 모든 미성년자들의 손등에 ‘칠드런 락’이라는 실드 반발 장치를 의무적으로 삽입시켰다.
물론 협회의 허락이나, 3급 이상의 각성자 2인이 동행한다면 출입이 가능하다.
즉, 한호조가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한만재의 허락하에 특수대응팀의 팀원 한 명과 동행하는 것뿐이었다.
“엄마…….”
과거, 한호조는 부모의 양손을 붙잡고 던전에 놀러 갔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2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 한호조는 괴로운 표정으로 쭈그려 앉았다.
“아빠까지 잘못되면 안 돼.”
심호흡을 한 한호조는 주머니에서 갈고리 모양으로 생긴 구슬 하나를 꺼내었다.
각성자 상점에서 파는 앵커 구슬이다.
히든몬스터, 앵커 독수리의 부리로 만든 앵커 구슬은, 사방으로 진동을 보내어 멀리 있는 물체나 몬스터를 감지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또한 예상치 못한 부수적인 독특한 효과가 있었는데, 강력한 진동 때문에 사용하는 동안 휴대폰과 같은 전자기기가 먹통이 된다는 점이었다.
“내 1년치 용돈이네.”
앵커 구슬은 상당히 고가에 거래되는 마도구로, 초등학생이 살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한호조는 홀로 던전에 가야 하는 상황을 대비해, 용돈을 꾸준히 모아 각성자 상점에서 앵커 구슬을 산 것이다.
“그럼…….”
앵커 구슬을 작동시키려던 한호조는 문득 실드 경계에 맞닿아 있는 허름한 건물에 시선이 갔다.
순간 어젯밤 옥상에서 유은호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삼촌. 저기에 미등록 각성자가 산다면서, 왜 안 잡아가?”
“아, 좋은 사람이거든.”
“좋은 사람?”
“으응. 사람들을 조용히 돕고 싶어서 각성자 등록을 안 하는 분이야.”
“1급 각성자를 능가한다고 했었는데.”
한호조는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도와주길 좋아하는 미등록 각성자라면, 날 도와주지 않을까?
굳은 결심을 한 한호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통닥통닥.
조심스레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 옥탑방 안에 들어서자 안쪽에선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통탁통탁통닥…….
자세히 들여보니 둔탁한 둔기로 돌 같은 걸 때리는 듯한 소리였다.
“계세요?”
조심스럽게 외쳐보았지만, 반응이 전혀 없다.
“계세요?”
목청을 높여 다시 한번 크게 외쳐보아도 마찬가지. 결국 한호조는 용기를 내어 낡은 옥탑방 문을 세 개 두들겼다.
탕탕탕.
다시 한번 옥탑방 문을 두들길 무렵,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냐.”
고개를 올려보니 게임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근육질의 남성이 붉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좋은 사람 아닌 것 같은데.’
마음속으로 유은호를 원망하던 한호조가 입을 뻐끔거렸다.
“도와… 주세요.”
“뭘 말이냐.”
[길을 잃은 거니?]
그런데 등 뒤에서 하얀 몸통을 지닌 나노봇이 등장했다.
[걱정 마. 이 아저씨는 네가 생각하는 지옥의 마왕이라든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아니니까.]
속내를 들킨 한호조가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 제 말은요…….”
[걱정 마. 바로 경찰서에 연락해 줄게.]
“그게 아니라… 던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어진 한호조의 말에 옥탑엔 긴 적막이 흘렀다.
[혹시 몇 살이니?]
“열두 살이요.”
[그렇구나. 던전 구경을 가고 싶으면 부모님께 말하렴. 그러면 부모님이 협회에 신청서를 제출하면, 곧 던전 견학을 갈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하던 무명은, 협회에서 제공하는 던전 견학 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상기하고 뒤이어 덧붙였다.
[하지만 던전은 TV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이야. 여기 있는 천마 아저씨보다 무섭게 생긴 몬스터들이 사람을 잡아먹거든. 가 봤자 좋을 게 하나 없는 곳이란다.]
“견학 가려는 거 아니에요.”
[응?]
무명이 눈을 깜빡이는데 천마가 손을 휘휘 저었다.
“본좌는 바쁘다. 가라.”
“대신 저도 도와드릴게요.”
“무슨 말이냐.”
“아저씨도 던전에 몰래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원하시는 게 있는 거 아닌가요?”
천마나 이맛살을 찌푸리자 한호조가 귀여운 볼우물을 드러내며 웃었다.
“전 던전에 숨겨진 걸 잘 찾아낼 수 있거든요.”
잠시 침묵하던 천마는 무명을 바라보았다.
“이 꼬맹이가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이 소년은… 탐지와 관련된 스킬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탐지?”
[감정(鑑定)과 더불어 꽤 희귀한 스킬에 속합니다. 던전에 숨겨진 보물이나 몬스터들이 남긴 유물들을 쉽게 찾을 수 있죠.]
소년을 위아래로 훑은 천마가 턱을 쓰다듬었다.
“호, 뭐든 찾아낼 수 있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저씨가 원하는 게 있다면 꼭 찾아드릴게요.”
천마는 잠시 고민했다.
안 그래도 앞으로 신뢰를 위해, 무명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는 신비한 유물을 찾으려 노력 중이었다.
그런데 탐지 스킬을 가진 소년이 있다니, 이거야말로 척이면 탁이 아닌가?
[천마 님.]
그때 무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소년, 앞집에 살고 있는 협회 각성자 분의 외아들이군요.]
“그걸 어떻게…….”
순간 한호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성능 좋은 나노봇이라 한들, 각성자 등록도 안 되어 있는 사람의 신상을 파악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 이 나노봇은 무슨 수로 알아낸 걸까?
[천마 님. 미성년자들이 지니고 있는 칠드런 락은 위치 추적 장치도 겸하고 있습니다. 이 소년을 데려갔다간 부모에게 대번에 추적당할 겁니다.]
무명이 떠벌떠벌 이야기하자, 한호조가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었다.
“괜찮아요. 위치 추적을 피할 방법이 있어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에는 갈고리 모양으로 생긴 쇳덩이가 붙어 있는 은색 구슬이 있었다.
바로 각성자 상점에서 파는 앵커 구슬이다.
“이게 뭐냐.”
“앵커 구슬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저도 실드 경계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위치 추적도 안 당해요.”
“흠.”
“부탁이에요. 던전까지만 데려다주세요.”
“던전?”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 누른 한호조가 말했다.
“네, 제가 발견한 던전이 있어요.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에요. 거기까지만 데려다주세요.”
턱을 쓰다듬던 천마가 눈을 번뜩였다.
“거절하지.”
“아저씨.”
“돌아가라.”
천마가 문을 닫으려 하자 한호조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어려서요? 위험할까 봐서요?”
“뭔 소리냐.”
“정의로운 척하지 마요. 아저씨도 미등록 각성자잖아요.”
고개를 든 한호조의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아저씨도 어차피 법을 어기고 있는 거잖아요.”
“착각하지 마라.”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던 천마가 양손에 든 방망이를 가리켰다.
“본좌는 바쁘다.”
한호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천마는 솥뚜껑 같은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쾅.
낡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는 가슴을 차갑게 후벼파는 듯했다.
“뭐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야.”
천마의 매정한 눈빛을 떠올린 한호조가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 어차피 혼자 가려고 했잖아.”
사람들을 돕는 미등록 각성자라서 한번 부탁해 본 것뿐이다.
던전 지역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던, 모두 회피할 자신이 있었다. 두 주먹을 꽉 쥔 한호조는 다시 실드경계지역으로 향했다.
통닥통닥.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 천마는 양손에 든 방망이로 다시 다듬질을 시작했다.
넓적한 돌 위에 올려진 건 호광에게 얻은 우리옷이었다.
깨끗이 세탁한 우리옷을 열심히 두드린 후에 펼쳤다 접기를 되풀이하자 옷감에는 윤기가 나고 구김이 펴졌다.
“괜찮군.”
천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신사로 만든 우리옷은 광마혈투의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공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공을 주입하면 옷의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점도 비슷했다.
“후후후.”
천마가 우리옷을 펼친 채 만족스럽게 바라볼 무렵, 무명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소년, 혼자라도 몰래 던전에 갈 생각인 것 같습니다.]
“무슨 상관이냐.”
천마가 아무 감흥도 없다는 듯 우리옷만 바라보자 무명이 다시 말했다.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라는 걸 보니, 어쩌면 가변던전 지역을 말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열에 아홉은 목숨을 잃게 되지 않겠습니까.]
천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펼친 책에 시선을 두었다.
무명은 천마가 앉아 있는 교자상 앞에 폴짝 뛰어올라 말했다.
[소년의 이름은 한호조. 협회 소속의 3급 각성자, 한만재 씨의 외아들입니다. 기록을 살펴보니 2년 전쯤, 어머니가 던전에서 돌아가셨더군요. 미등록 각성자가 불법적인 경로로 불러낸 히든몬스터에 의해 말입니다.]
무명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설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을 찾아가려는 걸까요?]
은근한 무명의 질문에 천마가 딱 잘라 말했다.
“관심 없다.”
[하지만 소년이 잘못될 경우, 천마 님이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 한호조라는 소년이 던전에 들어가기 전, 천마 님의 집을 방문했으니까요. 소년의 행적을 쫓다 보면 반드시 천마 님의 거처에 왔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탁.
짜증스럽게 책을 내려두자 무명의 두 눈이 반달처럼 접혔다. 사람이라면 히죽히죽 웃는 모양일 것이다.
* * *
휘이이익.
신법을 펼친 천마의 신형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단숨에 경계지역을 벗어나 세이프던전 지역 어느 폐건물 난간에 이르렀다.
“흐음.”
저 멀리 건물 아래쪽에는 가방을 멘 채, 수상쩍게 이동하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바로 한호조였다.
정말로 탐지 스킬이 있는 듯, 근처를 배회하는 각성자들의 무리를 요리조리 피하며, 던전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천마 님. 가까이서 지켜본다면 소년의 탐지 스킬에 걸리지 않을까요?]
한호조를 내려다보던 무명의 말에 천마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탐지 따위가 아니다.”
[네?]
“저 꼬마 녀석의 능력 말이다.”
천마의 말을 곰곰이 해석하던 무명의 눈 센서가 축소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천마가 따라붙기 시작할 때부터 한호조의 걸음이 더욱 과감해지고 민첩해지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가변던전 지역으로 가는 건 아닌 것 같군.”
무명이 입을 다물고 있을 무렵, 한호조를 내려다보던 천마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숲으로 가는 것 같은데.”
은밀하게 움직이는 한호조가 향한 곳은, 드넓은 숲이 우거진 세이프던전 남서쪽 부근이었다.
지리가 익숙한 듯, 빠른 걸음걸이로 폐허 속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간 한호조가 탄성을 질렀다.
“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세이프던전, 남서쪽 숲은 일반인들이나 학생들의 던전 견학 코스로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호조 역시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자주 놀러 왔었다.
숲을 바라보던 한호조의 눈동자에서 묘한 빛이 흘러나왔다.
-…2년 후에 반드시…….
귓가에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이 녹아내리자, 점차 시야가 흐릿해졌다.
잠시 꿈을 꾸는 듯 초점 없는 눈빛으로 서 있던 한호조가 천천히 숲 안으로 걸어갔다.
[천마 님. 소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각도로 움직여 주시겠습니까.]
천마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무명의 눈 부근에서 위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휘익 소리와 함께 유령처럼 사라진 천마는 어느새 한호조가 정면으로 보이는 맞은편 나무 위에 올라섰다.
[역시 뭔가 이상합니다.]
한호조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천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도 봤다.”
걸음을 옮기는 한호조의 눈빛은 어딘가 이상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걷는다. 넋이 나간 한호조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던 천마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흥미롭군.”
송곳니를 드러낸 천마가 묘한 미소를 드러내었다.
한호조의 눈동자는, 영혼을 복속시키고 심령을 조종한다는 섭심대법(攝心大法)에 당한 것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도 있었으니, 모든 전파 신호를 방해한다는 앵커 구슬이 어느새 작동을 멈춰 버렸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