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천마와 우리옷 (3)
“내기?”
“아무리 봐도 한 번만 몸을 움직이면 옷이 찢어질 것 같아서 말이오.”
“으허허허!”
호광은 매장이 떠나가라 껄껄 웃어댔다.
“재밌는 농담이로군. 신사를 섞어 만든 옷이 찢어진다라…….”
“만약 옷이 안 찢어진다면 본인의 광마혈투의를 노야에게 선물로 드리겠소. 어쩌시겠소?”
“자네의 옷 말인가.”
“그렇소이다. 내기하시겠소?”
호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 세계에는 없는 재료로 만든, 독특하고도 뛰어난 공능을 지닌 광마혈투의는 호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좋네. 만약 자네가 몸을 움직여서 찢어진다면, 본 매장에 있는 어떤 것이든 선물로 주겠네.”
호광의 호언장담에 천마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몸을 낮게 웅크린 천마가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몸에서 희미한 반극진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후후후.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네. 아까 자질을 할 때 몸 상태를 확인했…….”
“천마대능력!”
파앙!
십이 성의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리자 천마의 전신에선 활화산 같은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강력한 파동에 의해 커다란 호광이 대여섯 걸음 뒤로 쭉 밀려났다.
“잠, 잠깐만. 그 힘은 대체…….”
“권마칠식, 승풍항룡!”
몸을 낮게 웅크린 천마가 주먹을 위로 한 채 풀쩍 뛰어올랐다. 매장 안이 넓은 탓에 벽을 부수진 않았지만…….
찌이이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천마가 입고 있던 한복이 겨드랑이부터 찢어져 버렸다.
동시에 찢어진 옷감 사이로 천마의 붉은 털이 메롱 하듯 튀어나왔다.
“저, 저…….”
호광은 허공에 뜬 채 찢어진 옷을 펄럭이는 천마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툭.
땅으로 착지한 천마가 호광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어떻소이까.”
“노, 노부가 졌네.”
호광은 우람한 어깨를 움츠렸다. 설마하니, 저 육체에 힘을 또다시 증폭시키는 기술이 있을 줄이야.
“어쩔 수 없군. 마음에 드는 걸 한번 골라보게.”
“좋소이다.”
천마대능력에 의해 활활 타오르는 혈염광휘가 쏟아지는 천마의 눈동자는 호광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뭘 보나.”
호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천마와 시선을 마주치자 요사스럽고 탐욕스러운 광채로 번들거리는 악마가 목을 훑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노부를 보는 겐가?”
“마음에 들어서 말이오.”
호광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옷깃을 여몄다.
“그,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호광은 매장 내에 있는 어떤 것이든 선물로 주겠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그 ‘어떤 것’. 호광, 그 자신이란 말인가?
“방금 전, 어떤 것이든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이까. 한 입으로 두말하시는 것이오?”
천마가 붉은 혀를 할짝이며 씩 미소 짓자, 호광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설, 설마. 내기를 기회 삼아 노부를 함락시키겠다는 건가?”
“무슨 말이시오.”
“노, 노부에겐 그런 취미가 없네. 절대로 거절하겠네.”
우람한 어깨를 파르르 떠는 호광을 보며 천마가 코를 훔쳤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소만.”
“착각이라니.”
천마는 호광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은 노야가 입고 있는 옷을 말하는 것이오.”
“뭐라고!”
호광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크게 놀랐다.
“노부의 옷을 원한다고?”
쇠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져 온다.
호광이 입고 있는 우리옷. 이 옷이 어떤 옷이냐고 말한다면, 상급신들조차 구경하기 힘든 최고급 신사를 사용해서 만든 옷이다.
무가지보(無價之寶).
호광이 입고 있는 ‘우리옷’은 가치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귀한 보물이었다.
“크험.”
아득히 멀어졌던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은 호광이 억지로 미소 지었다.
“다른 옷도 많은데 굳이 노부가 입던 헌 옷을 입을 필요가 있나? 자자, 이쪽으로 와보게. 노부가 더 멋있는 새 옷들을 구경시켜 주지.”
지금까지 300년을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인족에게 살갑게 굴던 적이 없던 호광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호객 행위를 하는 점소이처럼 천마의 손을 잡아끌며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자, 이 옷은 어떤가? 노부가 무려 1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지어 만든 옷일세.”
고아한 무늬가 촘촘히 새겨진 괘자를 펼쳐 보인 호광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전 터주신이 자신에게 팔라고 애걸복걸했지만, 팔지 않았던 물건일세. 어떤가?”
하지만 괘자를 바라보는 천마의 표정은 건어물 가게에서 상한 오징어를 바라보는 듯했다.
“무늬가 너무 산만하구려.”
이 망할 놈의 자식!
아랫배에서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를 꾹 삼킨 호광이 반대편에 전시해 놓은 푸른 괘자를 가리켰다.
“그, 그러면 이건 어떤가? 사실 이건 영월신께서 주문해 놓은 옷인데… 특별히 자네에게 선물로 주겠네.”
신비로운 광채가 흘러나오는 괘자를 가리킨 호광의 심정은 속상함과 자부심이 뒤섞여 있었다.
‘이놈아. 이렇게 서기(瑞氣)가 흘러나오는 옷을 평생 구경이나 해봤겠느냐. 돈으로 따지면 자그마치 1억이 넘는 옷이란 말이다!’
“호오.”
푸른 괘자를 매만지던 천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옷은 처음 보는구려.”
“그렇지? 최고급 신사를 쓴 탓에 영기가 절로 흘러나오는 옷이라네.”
만면에 미소 짓고 있던 호광은 이어진 천마의 말에 안면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빛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구려.”
“으응? 왜?”
“야간에 은신잠영술을 쓸 때 들통이 날 테니 말이오.”
‘그게 무슨 개 헛소리냐!’라고 외치려던 호광이 이를 깨물며 말했다.
“밤, 밤에 잘 보이면 좋지 않나. 어두운 옷을 입으면 밤길에 차량에 치일 수도 있고…….”
“본인은 차량 따위에 다치지 않소.”
이 빡대가리 자식이….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호광은 큰 결심을 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좋네. 좋아. 노부의 역작을 보여주지.”
호광은 천마를 이끌고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조명 아래 미술품을 전시해 둔 갤러리가 보였다.
“여긴 뭐 하는 곳이오?”
천마의 말에 호광이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상급신 중에서도 최고의 귀빈들만 들어올 수 있는 전시장일세. 300년 동안, 노부의 갤러리에 인족이 이곳에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미술품이 전시된 곳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투명한 유리 상자에 화려한 괘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 어떤가. 상급신 중에서도 선택받은 신들만 입을 수 있는 최고급 ‘우리옷’일세. 가격으로 따지면 10억 이상의 가치가 있지.”
“10억.”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장채원까지 놀랐다. 10억짜리 ‘우리옷’을 선물로 주다니?
팔짱을 낀 채 유리 너머에 걸린 괘자를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0억이란 액수가 이곳에서 어떤 가치인지 모르지 않는 천마였다.
“내기 하나로 10억을 태울 필요까지 있겠소이까?”
“후후후. 괜찮네. 노부는 산신령이 아닌가? 내기라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너무 부담스럽구려.”
앞으로 다가온 천마가 호광의 우람한 어깨에 손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냥 노야의 헌 옷으로 하겠소.”
부우우웅.
장채원의 하얀 승합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담담히 운전만 하던 장채원은 ‘우리옷’ 매장을 빠져나가자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하핫!”
미친 듯이 웃던 장채원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천마를 보며 또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이히히히히!
“그만 웃어라, 점주. 옷에 침 튄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천마는 소매를 탁탁 털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바로 호광이 입고 있던 최고급 우리옷이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상급신만 입을 수 있다는 백 퍼센트 신사로 만들어진 ‘우리옷’ 말이다.
“그 표정을 영상으로 찍었어야 하는데! 그 산군이… 내기로 삥을 뜯기다니! 크하핫!”
장채원과 호광 사이엔 과거에 어떠한 일이 있었고, 해묵은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천마가 통쾌하게 복수해 준 덕택에 그녀는 10년 묵은 체증이 단숨에 내려가 버렸다.
“그 옷 짓는 노야와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천마의 물음에 장채원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천마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왜. 무슨 일이 있어 보여?”
어색한 미소를 지은 장채원이 되묻자 천마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라, 신들의 옷을 만드는 인물치고는 배포가 상당히 작아 보여서 말이다.”
“응?”
“그저 입던 옷 한 벌 가져가는 것뿐인데, 본좌를 불구대천 원수를 보듯 노려보더군.”
“풉! 그만 웃겨!”
장채원은 또다시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천마는 자신이 입고 있는 우리옷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대체 호광 신의 옷은 왜 고른 거야. 남이 입던 걸 왜 뺐어 입은 건데.”
“그 노인네가 입고 있는 게 제일 그럴듯해 보이더군. 그래서 골랐다.”
이제 보니 천마는 ‘우리옷’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의외로 눈썰미는 좀 있네.”
“어쨌든 본좌는 고민이다. 신들의 옷을 만든다고 하니, 여러 신들과 안면을 많이 튼 것 같던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정파 무림인들이 관부의 인맥을 통해 본좌를 음해했던 것이 떠올라서 말이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점주와의 사이가 꽤나 안 좋아 보이던데. 혹시 이번 일로 앙심을 품어 본점의 신뢰도를 하락시키려는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지 않겠나.”
장채원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천마는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신뢰를 못 받아 내공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산신령인데, 설마 남을 음해하는 소문을 퍼트리겠어?”
“모를 일이다. 덩치는 본좌와 비슷한데 속은 매우 좁은 것 같더군. 그 쪼잔한 면상을 보건대, 안심할 수 없는 일이다.”
“푸하핫!”
천마를 노려보던 장채원이 또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네 눈에는 신님이고 뭐고 얄짤없구나!”
“그만 웃어라. 정신 사납다.”
“천마야. 오늘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다 살게!”
“으음. 그렇다면 삼선짜장으로 하지. 물론 탕수육도 포함이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마에게 옷을 내밀던 호광을 떠올린 장채원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내가 다 사줄 테니까, 히히히.”
장채원의 낭랑한 웃음이 창밖을 벗어나 도로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