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천마와 우리옷 (2)
나이트폴(Nightfall).
맞춤 정장 전문 테일러 샵이다. 그리고 그곳의 테일러는 아주 멋들어지게 생긴 늑대 요괴, 혈랑이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긴 머리칼을 세련되게 묵은 혈랑은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장채원의 설명을 실컷 들은 혈랑은 죄송하다는 듯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누님, 사정을 알겠습니다만 어려울 것 같네요. 아무래도 다른 곳을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왜?”
“그러니까… 그게.”
천마의 체구와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혈랑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셔츠와 질 좋은 검은 양복 한 벌을 꺼내 들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천마는 혈랑의 도움으로 위아래 양복을 입은 채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장채원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흐아…….”
분명 세련된 네이비 색감의 양복을 아래위로 입은 것뿐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분위기가 흘렀다.
도복을 입고 있을 땐 완력으로 험악한 일을 벌이는 범죄자 느낌이었다면, 양복을 입은 천마는 무시무시한 완력에 뛰어난 지능까지 더해진 국제적인 범죄자의 모습이랄까?
전 세계의 안보를 위협하는 국제적인 테러리스트가 눈앞에 서 있었다.
“어떠신가요.”
혈랑은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는 장채원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안 되겠죠?”
“그, 그러네.”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불안함이 심장을 파고든다.
만약 천마가 이 복장으로 출근을 한다면, 아무도 지하철을 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지하철 역사를 폐쇄할지도 모른다.
“바쁜데 시간 뺏어서 미안. 다음에 또 올게.”
장채원이 우울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혈랑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누님.”
“응?”
“저분에게 맞는 옷을 찾으시는 거죠?”
혈랑은 민망하지만 기품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으시다면, 산군(山君) 님 매장에 가보시는 것이 어떠실까요? 우리나라에서 저분의 옷을 만들 수 있는 분은 산군 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산군? 아, 싫어.”
“누님. 산군 님께선 그런 분이 아니세요. 누님이 방문하신다고 해도 덤덤히 맞아주실 거예요. 그리고…….”
천마의 몸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반극진기를 느낀 혈랑이 눈동자를 번뜩였다.
“저분도 반드시 산군 님의 옷이 필요할 것 같고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일요일 오전.
띠리리링.
탁자 위에 올라가 있던 무명이 알람 소리와 함께 외쳤다.
[천마 님. 장채원 님이 다시 연락했습니다. 빨리 내려오시랍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해라.”
[당장 안 내려오면 TV를 없애버리겠답니다.]
“으음.”
정좌를 한 채 TV를 보고 있던 천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싫다는데 자꾸 그러는군.”
아쉬운 표정으로 TV를 끈 천마는 금성당혜를 신고 주섬주섬 밖으로 나섰다.
[다녀오십시오, 천마 님. 부디 좋은 옷을 구매하시길 바랍니다.]
무명의 말에 천마는 귀찮은 듯 인상을 쓸 뿐이었다.
건물 아래로 내려가자 하얀 승합차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운전석에는 긴 머리를 경단처럼 둥글게 말아 올린 장채원이 앉아 있었다.
“왜 이리 늦어? 씻는 것도 아니면서.”
한참을 기다렸는지 장채원의 볼이 약간 뾰로통해 있다.
차에 쭈그리듯 올라탄 천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TV에서 아주 중요한 정보가 나오는 중이었다.”
“뭐, 또 막장 드라마?”
요 근래 천마가 막장 드라마에 빠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장채원의 물음에 천마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대낮부터 안 본다. 속이 터져서 아무 일도 못 하니까.”
“그래? 뭘 봤는데.”
“여러 가지 비밀스런 정보들이다. 덕택에 이 세계에 대해 많은 걸 배우고 있다.”
“또 무슨 이상한 프로에 빠졌구만.”
어느덧 장채원의 차량은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울창한 산들이 보이는 도로를 벗어나자 어느새 작은 변두리 마을에 이르렀다. 구불텅한 도로를 한참을 올라가던 차량이 멈춰 선 곳은 커다란 한옥 건물이었다.
‘호광 우리옷.’
고풍스러운 간판이 세워진 건물을 올려다보던 장채원이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따스한 햇살과도 같은 빛이 천장에서 쏟아지고 있다.
원목을 깎아 만든 바닥과 벽에선 향긋한 나무 향이 풍기고 있었고, 곳곳엔 한복을 입은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었다.
끼이익.
장채원이 나무로 된 사무실 안쪽 문을 열자, 천마와 버금가는 탄탄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산군 님. 오랜만에 뵈어요.”
장채원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노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누구신가.”
몸을 돌린 노인은 짙은 남색과 회색으로 물든 고급스러운 괘자를 걸치고 있었는데, 두 눈에는 위엄이 가득했다.
바로 이 일대의 산을 수호하고 있는 산군(=산신령), 호광이었다.
“허어. 정말 오랜만이군, 장 사장.”
노인은 탄식인지 놀람인지 모를 듯한 표정으로 장채원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네. 어르신.”
고개를 숙인 장채원을 내려다보는 호광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해묵은 지난날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다.
“자네는…….”
그러다 문득 장채원의 옆에 서 있는 천마를 올려다보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산도깨비는 오랜만에 보는군.”
“산도깨비가 아니라 평범한 인족이에요.”
“산도깨비가 아니라니. 눈동자 색이 미세하게 붉은데?”
호광이 천마의 붉은 눈동자를 살피자 장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그냥 빨간 거래요.”
“처음 뵙겠소이다.”
천마가 두 손을 모은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천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이면서도 예리한 기운을 느낀 호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미안하네. 정말 인족이시구먼.”
그리고 커다란 손을 천마에게 내밀었다.
“노부는 호광이라고 하네. 이곳에서 ‘우리옷’을 만들고 있지.”
천마는 스스럼없이 호광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순간 아주 예리한 바늘이 손바닥을 무수히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마라고 하오. 반갑소이다, 노야.”
하지만 천마는 담담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호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이만한 힘을 가질 리는 없을 테고… 설마 자네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인족인가?”
“맞소이다.”
“하하하. 한동안 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유명인이었군. 신뢰도 척척 해낸다고 들었네만.”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천마의 입가엔 미소가 넘실거렸다.
그런데 광마혈투의를 빤히 바라보던 호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엔 없는 재질의 옷이구먼. 이거이거, 놀라울 만큼 튼튼하구먼. 놀랍군 그래.”
신들만이 입을 수 있는 ‘우리옷’을 만드는 호광은 희귀한 옷감이라면 정신을 못 차린다.
“게다가 이거… 신사(神絲)처럼 신력을 넣으면 옷의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는 것 같은데.”
천마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시는구려. 신력은 아니지만, 내공을 주입하면 다른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본인이 있는 곳에선 이보다 튼튼하고 좋은 옷은 없소이다.”
“그렇군. 하지만 투기를 엄청나게 증폭시키는구먼. 이러면 인족들이 엄청 두려워할 텐데…….”
이불처럼 두툼하고 거친 광마혈투의의 재질을 매만지던 호광이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광마혈투의에서 흘러나오는 투기가 아니더라도, 도깨비 같은 면상과 육중한 근육만 봐도 사람들은 충분히 두려움을 느낄 만했다.
“보아하니 그 옷에 버금가는 옷을 맞추러 예까지 온 것이군. 그렇지 않나?”
호광의 물음에 장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춰주실 수 있으신가요.”
“하필 왜 ‘우리옷’을 입으려는 거지? 시중엔 다른 좋은 옷도 많지 않나.”
“신사가 들어간 옷이 필요해서요. 트레이닝복도 격렬히 움직이면 찢어질 정도고요.”
장채원의 물음에 산군은 덤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 짧은 한숨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호광은 자신의 눈빛을 피하는 장채원을 바라보며 덤덤히 미소 지었다.
“노부의 손을 덤덤히 잡을 정도면 충분히 ‘우리옷’을 입을 자격이 있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네. 자격이 있다 뿐이지, 노부가 옷을 만들어준다는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천마의 탄탄한 어깨 근육을 바라보던 호광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신사는 매우 귀한 재료일세. 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해도, 아무 이유도 없이 대지유신들이나 입는 ‘우리옷’을 입히겠…….”
“천마. 양팔 들어.”
장채원의 말에 천마는 순순히 양팔을 들었다. 순간 천마의 겨드랑이에서 삐져나온 붉은 털에 산군이 두 눈을 가렸다.
“어억.”
산군은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구역질을 했다.
“우욱. 우우우욱.”
바닥에 엎드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호광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덤덤히 말했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요. 매일 천마와 같은 출근길에 나선 직장인들이 불쌍하잖아요.”
“으으음. 어쩔 수 없지.”
한바탕 운 것처럼 눈동자가 슬퍼진 호광이 헛기침을 했다.
“인족이라면 어쩔 수 없지. 만약 장 사장이 옷을 맞춰 달라고 했다면 단호히 거절했을 거야.”
줄곧 공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채원은 그 말을 듣자 도전적인 눈빛으로 변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설령 천상계의 신님들이 빌어도 제가 안 입을 테니까요.”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 없네. 노부는 어디까지나 중립의 관점에서 이야기한 거니까.”
낮게 미소를 지은 호광이 천마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자네에게 딱 맞는 우리옷을 지어주지. 하지만 절대 양팔을 들지 말게나.”
줄자를 가져온 호광은 천마의 몸 사이즈를 치밀하게 측정했다.
신기하게도, 줄자로 사이즈를 측정할 때마다 어디선가 신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굉장한 육체로군. 굉장한 몸이야.”
연신 자질을 하는 와중에도 호광은 탄탄한 천마의 근육을 연신 눌러보았다.
“듣자 하니 육체에 담아놓은 힘을 일부 잃었다고 들었네만, 사실인가.”
“맞소이다.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내공이 대부분 사라졌지요.”
“대부분이라고.”
호광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육체에 담겨 있는 힘만 해도 하급 요신을 능가하는데, 본연의 힘을 대부분 잃은 상태라니.
“크험.”
입을 벌린 채 천마를 바라보던 호광이 헛기침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말이네만, 가능한 이 세계의 일에 관여하지 말게나.”
“무슨 말이시오.”
“뭐, 간신히 맞춰놓은 이 세계의 균형이 깨질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일세.”
그 순간 천마는 호광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장채원을 살짝 훑음을 느꼈다.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군.’
하지만 그는 타인의 사정에 무심하다. 아니, 자신의 생사에도 무심했다.
어쩌면 그 무심함 때문에 장채원이 천마를 편하게 대하는지도 몰랐다.
“자, 옷은 다 되었네.”
호광은 안쪽으로 들어가 빛이 머물고 있는 탈의실을 가리켰다.
탈의실의 문을 열자 그곳엔 회색 저고리에 바지, 괘자까지. 번듯한 한복 한 벌이 완성되어 있었다.
“안에 들어가 입어보게.”
탈의실에 들어간 천마는 걸려 있는 한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떤가.”
“흐음.”
팔다리를 휘젓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이다.”
“왜, 뭐가 불편한가?”
“내구성이 약해 움직이면 찢어질 것 같소이다.”
“으허허허!”
호광은 황당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바로 ‘우리옷’일세. 비록 신사를 조금밖에 넣지 않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절대 찢어질 리 없지.”
“절대(絶代)… 라.”
그것은 천마가 몹시 싫어하는 단어였다.
어쩌면 그는 ‘절대 ~않는다’라는 말을 파괴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 노력을 했는지도 몰랐다.
“노야. 그럼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