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천마와 편의점 소녀 (1)
내 이름은 김혜원.
고등학교 2학년으로 아르바이트 대신, 아버지가 운영하는 편의점 일을 도와주고 있어.
우리 동네엔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있어.
몬스터 도감에 나오는 도깨비처럼 험악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키도 덩치도 엄청나게 커.
옷은 하나밖에 없는지, 두 팔뚝이 드러나는 도복 같은 것만 입고 다녀.
만약 어깨에 나노봇을 매달고 다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도깨비가 출현한 줄 알고 협회나 경찰에 신고했을 거야.
밤 8시에서 10시 사이쯤이면 항상 그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매장에 들어오지.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어깨에 매달린 나노봇의 수다가 시작돼.
* * *
[지금 천마 님이 손에 쥔 건 아이들이나 먹는 딸기맛 과자입니다. 제가 추천드리는 건 그 옆에 있는 ‘따봉 와사삭’입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많지요.]
매번 저런 식이다.
보통 나노봇은 던전 관련 정보를 조언해 준다고 하던데…….
저 아저씨 위에 올라탄 나노봇은 시도 때도 없이 수다를 떨거나,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상큼한 사과 향과 꾸덕한 고등어 향이 첨가되어 있는 ‘구봉산 맛과’는 어떻습니까? 이번에 나온 수제 과자인데, 출시하자마자 편의점 인기 제품 3위에 든, 히트 상품입니다.]
그거 아니야…….
명인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유명해진 건, 맛이 너무 괴상해서 벌칙으로 주는 과자로 유명세를 탄 거라고.
세상에 누가 사과 맛이랑 고등어 맛이랑 뒤섞인 과자를 먹겠…….
“괜찮군.”
무서운 아저씨는 지체 없이 구봉산 맛과를 집어 들고 카운터로 걸어왔다.
띠릭.
“육천 원입니다.”
시선을 피한 내가 나직이 말하자.
“뭐라고?”
무서운 아저씨가 갑자기 날 노려보며 눈을 번뜩였다.
“유, 육천… 원이요…….”
“이 조그만 간식 하나가 그리 비싸단 말인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수제 과자라고요. 구봉산 명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뭐든 상관없다. 이 작은 간식이, 엄마손 분식에서 반찬 네 가지와 국 한 그릇이 나오는 백반정식과 동등한 가치가 있단 말이냐.”
무서운 아저씨는 카운터에 있는 날 빤히 노려보며 말했다.
“소녀.”
“…넷, 네?”
“본좌는 천마다. 이 매장에서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가격을 다시 제시하라.”
‘으아, 인상만 무서운 것이 아니었어.’
이제 보니 생김새뿐만 아니라 행동도 완전 초특급 진상인 것 같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간신히 피한 내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저, 저희 매장에 있는 건 모두 정찰제라서요.”
“으음.”
아저씨는 몹시 분노한 표정으로 과자를 집어 들었다.
설마 던지려고? 두려움에 실눈을 뜨고 있을 무렵.
“사과와 고등어의 조합이라니… 사지 않을 수가 없군.”
과자봉지에 그려져 있는 사과와 고등어를 빤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계산하라.”
“네?”
“계산.”
“아, 네.”
딸랑.
계산을 마친 아저씨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도 나노봇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천마 님. 방금 한 행동이 얼마나 무례하고 몰상식한 행동인지 아십니까? 편의점 알바생에게 할인을 요구하다니요.]
“본좌는 천마다. 가격 절충 정도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노봇과 쉴 새 없이 투닥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야.”
볼 때마다 무서운 아저씨였으나, 오늘은 왠지 조금 덜 무서웠다.
“이상한 아저씨야…….”
오늘 이후로, 무서운 아저씨는 이상한 아저씨로 바뀌었다.
* * *
밤 10시경.
내가 알바를 끝낼 이맘때쯤이면 늘상 취객들이 편의점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이렇게 크고 작은 소란이 생기기도 한다.
“야, 뭐야? 장난해?”
카운터에 서 있는 나에게 술 취한 네 명의 남성들 중 한 명이 시비를 걸고 있었다.
“왜 여기엔 내가 좋아하는 산바다 소주가 없냐고?”
술을 마신 건지 몸에다 부은 건지, 비틀거리며 팔을 휘휘 저을 때마다 지독한 알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빠는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시계를 힐끔 바라본 내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니까 죄송하면 다냐고. 이 근방에 편의점이라곤 이곳 하나뿐인데. 제대로 술을 구비해 놔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됐어. 담배나 하나 줘봐.”
카드를 카운터로 툭 던진 남성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백미리 하나.”
“백미리요?”
“담배 말야, 담배. 백미리.”
“어떤 거요. 담배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야, 장난해? 백미리 담배는 구름산 하나뿐이잖아.”
구름산? 그런 게 있었나?
내가 열심히 카운터를 찾아봤지만 그런 담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건 없는데요.”
“아, 미안. 이 녀석이 착각을 했네.”
그때, 옆에 있던 남성이 낄낄대며 말했다.
“야, 그건 각성자 상점에 있는 담배잖아. 일반 편의점에 없다고.”
“아, 그런가? 깜빡했네.”
각성자였다고? 저 취객들이?
각성자들은 전용으로 마시는 독한 술이 따로 있으며, 파는 곳도 엄격히 정해져 있다.
취한 각성자들이 사고를 치면 도시는 쑥대밭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아, 짜증나네. 오늘따라.”
카드를 던진 남성이 카운터에 올려진 캔디 상자를 움켜쥐었다.
“언제까지 일당이나 받고 일해야 하냐고.”
으지직 소리와 함께 캔디 상자가 가루가 되었다.
성인이라면 당연히 부술 수 있을 만큼 약한 상자다. 그런데 남성은 굉장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놀라지 말라구. 힘을 쓸 생각은 없으니까.”
이제 보니 남성들은 아예 맛이 가버린 눈빛을 하고 있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무슨 약물에 취한 듯한 모습이다.
‘도저히 안 되겠어.’
내가 카운터 아래쪽에 있는 비상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아아, 걱정하지 마.”
취객 중 노란 머리를 한 남성이 내 팔을 붙잡고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각성자야. 일반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다구.”
반쯤 접힌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음흉해 보인다.
“팔 놔주세요.”
“너 몇 살이야?”
“저 고등학생인데요.”
“뭐라고?”
내 팔을 잡고 있던 노란 머리 남성이 히죽거렸다.
“거짓말하는 거 아냐? 고등학생이 뭐 이리 커?”
“놔주세요.”
이 동네가 도심과 떨어진 외곽 지역이니만큼 망나니 각성자들이 더러 산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바할 때 진상으로 만날 줄이야.
도무지 갈 생각도 하지 않는 남성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팔 놓으시라고요.”
“아아, 미안 미안.”
히죽히죽 웃으면서도 놓지 않는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동시에 내 손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격렬하게 튀었다.
지지지직.
“아, 따거! 이게 뭐야?”
재빨리 손을 뗀 노란 머리 남성이 붉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쥐며 소리쳤다.
“뭐야, 너 지금 뭐 한 거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방금 전기 충격기 같은 거 썼잖아!”
아아, 역시 이런 걸 한다고 그냥 돌아가 주진 않는구나.
나는 서글픈 표정으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세상엔 능력이 개화하다 말아버린 각성자도 있다.
그리고 어설픈 각성으로 인해 오히려 몸이 망가져 버린, 반푼이 각성자도 있다.
지금의 나처럼.
“야, 너. 이리 나와봐.”
그때 화가 난 노란 머리 남성이 씩씩거리며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어디 감히 손님에게 전기 충격기를…….”
그리고 팔을 뻗어 멱살을 쥐려던 순간.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시꺼먼 그림자가 불쑥 들어왔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시공 현장에도 절 데려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 말을 들었으면 그럴 일은 없었을 겁니다.]
나노봇의 기계음과 함께 그 이상한 아저씨가 등장했다.
“어, 어서 오세요. 아저씨!”
내가 반갑게 인사하자, 내 팔을 잡고 있던 남성이 재빨리 손을 뺐다.
“야, 나노봇이다.”
“저 사람은 진짜 각성자인가 보네.”
뭐야, 이 사람들. 가짜 각성자였어?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을 무렵, 쑥덕거리던 남성들은 아저씨의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살았다!’
매일같이 오는 이상한 아저씨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오늘따라 과자 코너에서 우두커니 선 채 고민을 하고 있는 아저씨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딸!”
그때 딸랑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웃으며 들어왔다.
“고생했어. 늦었으니 어서 들어…….”
아버지는 구봉산 맛과를 노려보고 있던 아저씨를 발견하곤 내게 속삭였다.
“몬스터? 실드가 뚫린 거야?”
“쉿,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시간에 자주 오는 손님이야.”
나는 재빨리 아빠 입을 막고 아저씨 위에 있는 나노봇을 가리켰다.
그날 이후로도, 때때로 한 번씩 취객들이 방문해 진상을 피웠다.
하지만 언제나 늦은 밤에 방문하는 이상한 아저씨 덕택에, 점차 우리 편의점엔 취객들이 오지 않게 되었다.
‘저 편의점엔 무시무시하게 생긴 각성자가 들락거려.’라고 동네에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저 늦은 시간, 과자 하나를 사기 위해 아저씨가 오랫동안 고민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안 되겠군.”
웬일인지 오늘 방문한 아저씨는 10분간의 고민 끝에 구봉산 맛과를 다시 매대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구매 안 하십니까.]
“너무 호사를 부린 것 같군. 이대로라면 월말에 잔고 부족이 될 거다.”
[장채원 님께 월급 인상을 건의드려 볼까요?]
“됐다. 어제도 문짝을 부숴서 손해를 끼쳤다고 타박받지 않았나. 점주도 돈이 화수분처럼 나오진 않을 터.”
그리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딸랑.
“딸, 고생했어!”
그와 동시에 또다시 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어여 들어가.”
“으응.”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과자 매대에서 구봉산 맛과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빠! 이거 나중에 계산할게.”
분명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저 멀리 언덕으로 올라가는 커다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잠, 잠깐만요!”
나는 헐레벌떡 뒤를 쫓았지만, 이상하게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뭐야.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저 언덕 위 끝에는 실드 경계선이 보이는 곳인데. 아저씨는 아직도 언덕 위를 계속 걷고 있다.
“설마 그쪽 건물에?”
경계지역 끝자락엔 높다란 건물 하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몬스터가 실드를 부수고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부수는 목표가 되는 곳이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고 하던데.
“잠, 잠깐만요!”
어느새 아저씨는 언덕 위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숨이 가빠 더 이상 뛸 수 없던 나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크게 소리쳤다.
“아저씨!”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나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빠르면 내일 또다시 방문할 텐데 뭣 하러 따라온 거지?
“무슨 일이냐.”
그때 내 눈앞으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바위 같은 얼굴에 하늘을 가리는 거구. 바로 아저씨였다.
“어, 어떻게.”
“본좌를 부른 건가.”
“아아, 네에.”
가쁜 숨을 내쉰 나는 들고 있던 구봉산 맛과를 내밀었다.
“이거… 이거 드세요.”
“안 샀다.”
“그냥 드리는 거예요.”
“어째서?”
은근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전혀 흥미 없는 표정으로 구봉산 맛과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왠지 시답잖은 이유를 말한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다.
매장에서 과자를 살 때 오랫동안 고민해 줘서?
매장에 험악한 각성자가 지켜준다는 소문이 나서?
생김새와 달리 주머니가 빈곤한 월급쟁이 같은데, 오늘따라 과자를 못 산 것이 안돼 보여서?
‘그런 말을 어떻게 해.’
고민 끝에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열 개 더하기 한 개 프로모션이에요.”
“그게 뭐냐.”
“제품을 열 개 구매하면… 그 제품을 하나 더 주는 거죠.”
턱을 매만지던 아저씨가 눈을 번뜩 빛냈다.
“왜 지금까지는 말하지 않았나. 본좌는 이미 열 개 넘게 구봉산 맛과를 사 먹었을 텐데.”
“그, 그게… 최근에 생긴 프로모션이라서요.”
“프로모오션?”
“네. 판촉 같은 거요.”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몸이 난쟁이처럼 작아진 기분이다.
과자 하나 주려다 이게 뭐람.
“헤헤…….”
그냥 웃자. 웃으면 되는 거겠지.
그런데 침묵하던 아저씨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갑자기 솥뚜껑 같은 손을 내 얼굴로 쭉 내뻗었다.
갑자기 무서워진 내가 눈을 질끈 감으려 하던 찰나.
“훌륭한 제도로다!”
아저씨는 커다란 손으로 내 손에 있는 구봉산 맛과를 집어 들었다.
받으려면 좀 빨리 받지. 역시나 이상한 아저씨는 이상한 아저씨였다.
“그, 그럼 맛있게 드세요.”
억지로 웃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다.
정중히 과자봉지를 쥐여준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반대로 뛰어갔다.
그날 이후, 아저씨는 편의점에 매일 오다시피 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늘 먹던 비싼 구봉산 맛과 대신, 저렴한 아이스바를 사 먹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상한 아저씨. 이름이 천마라는 아저씨와 아저씨의 나노봇과도 종종 잡담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각성자도 아니고… 인테리어 일을 하는데, 사장님이 나노봇을 사줬다고요?”
지금까지 드라마에 대한 잡담만 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아저씨의 직업을 알게 된 나는 새삼 놀랬다.
“나노봇은 엄청나게 비싸다고 하던데. 부유한 각성자들만 살 수 있다고.”
“가격은 모른다. 하지만 그냥 점주가 준 거다.”
무슨 재벌집 인테리어 매장인가?
단순 인테리어 시공자에게, 그것도 잡담까지 가능한 고성능의 나노봇을 사주다니.
“그걸 사준 사장님도 놀랍지만, 아저씨가 각성자가 아니라는 것이 더 놀랍네요.”
TV에 나오는 1급 각성자들도 저만한 근육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분명 높은 등급의 각성자라고 생각했는데… 인테리어 시공자일 줄이야.
[천마 님. 곧 있음 <나의 어사님> 13부가 방영될 시간입니다.]
“그렇군.”
밖으로 나가려던 아저씨는 들고 있던 아이스바 막대기를 가리켰다.
“아홉 개째다. 소녀.”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처음엔 괜한 말을 했나 싶었는데.
천마 아저씨가 매일 들러주니, 우리 편의점엔 취객은커녕 그 흔한 진상 손님마저 자취를 감췄다.
“소문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
피식 웃던 나는 무뚝뚝한 천마 아저씨의 눈빛을 떠올렸다.
“무서운 사람 아닌데. 아저씨는.”
얼굴은 조금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눈동자는 세상 무관심한 눈빛을 하고 있다.
얼핏 보면 득도한 스님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천마 아저씨의 그 무심한 눈빛이 싫지 않았다.
딸랑.
그때 풍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아빠가 들어왔다.
“우리 딸.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오늘따라 아빠의 얼굴이 초췌해 보인다.
낮에는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편의점까지 보는 터라, 늘상 수면 부족에 만성 피로를 달고 사신다.
“아빠. 들어가서 좀 더 자고 와. 내가 조금만 더 볼 테니까.”
“큰일 날 소리? 학생은 10시까지밖에 알바 못 하는 거 몰라?”
“그럼 창고에서 조금만 자. 요새는 취객도 없어서 괜찮아.”
내 간곡한 부탁에도 아빠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서 들어가. 아빤 하나도 안 피곤해.”
피곤하지 않다고 하는 아빠의 눈 밑엔 검은 그림자가 늘어져 있고 안색도 좋지 않았다.
모두 나 때문이다.
이곳으로 이사 온 것도, 아빠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미안해, 아빠. 늘 나 때문에.”
“어허, 혜원아. 무슨 소리야. 네가 있어서 아빠가 이렇게 힘을 내는데.”
내 어깨를 두들기는 아빠의 손길이 따듯하다.
“몸은 금방 괜찮아질 거야. 아빠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혜원이도 그런 말 하면 안 돼. 알겠지?”
“으응.”
나는 두 팔을 벌려 아빠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아무 일 없이 계속 지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라?”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진다.
숨을 쉬기 어렵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온몸이 물이 되어 바닥으로 녹아내린 것 같다.
“혜원아!”
나를 흔들던 아버지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냐. 빨리 구급차를!”
당황한 아버지의 얼굴이 계속 까맣게 물들어갔다.
조명이 꺼진 건가? 아아, 내 시야가 어두워지는 거였구나.
딸랑.
그때 문이 열리고 희미한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온다.
천장의 빛을 가릴 만큼 커다란 그림자에선 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그것이 정신을 잃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