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천마와 귀면탈
동쪽 하늘에서 먼동이 트고 있었다.
“으으.”
해가 뜨자 천마의 옥탑방 거실에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모주꾼들이 제일 싫어하는 시기가 바로 동이 틀 무렵이다.
천지 만물에 생명력을 내려주는 햇살이건만, 유독 술병이 난 인간들에게는 두통을 선사하니까.
“무… 무울.”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쥔 장채원이 간신히 새우 눈을 뜬 채 천마에게 말했다.
“물 좀 줘.”
-뀨우우.
그러자 그녀의 곁에서 졸고 있던 제비도 구슬픈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제비 역시 어젯밤 술자리에 따라다니며 소주를 열댓 병 이상 퍼마신 터였다.
“…….”
천마는 지금까지 수많은 모주꾼들을 봐왔지만, 자신에게 물을 요구하는 이는 없었다.
제비는 그렇다 치고, 고용주인 장채원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
잠시 갈등하던 천마는 발아래 놓인 생수통을 툭 찼다.
“여깄다.”
“으응.”
굴러온 생수통을 받아든 장채원이 물을 마실 무렵, 욕실에서도 신음성이 들려왔다.
“으으.”
욕실 문을 열자 김찬원이 변기에 얼굴을 처박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일어났능가?”
천마를 본 김찬원이 건더기가 묻어 있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렸다.
속이 뒤집힐 것만 같은 천마는 다시 문을 쾅 닫았다.
“대체 이게…….”
휴일은 천마에게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상쾌한 마음으로 운공을 한 후, 독서와 TV 시청을 하려 했던 천마는 좀비처럼 끙끙대는 두 사람을 보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어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라.”
“어허, 무슨 소릴. 해장은 하고 가야제.”
그때 화장실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김찬원이 주방으로 걸어 나갔다.
“이럴 줄 알고 어제 ‘할머니 사골탕’ 집에서 들깨 해장국을 포장해 왔구먼. 여기가 해장국으론 최고 맛집이여.”
자기 집인 양 자연스레 냉장고를 열던 김찬원이 냉장실에 있는 하얀 포장 용기를 꺼냈다.
“들깨 해장국이요?”
그때 바닥에서 꿈틀대던 장채원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먹으면 안 돼요!”
“왜 안 된디야?”
“들깨 해장국을 먹으면 술이 들… 깨.”
옥탑방 내부에는 싸늘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얼어붙은 천마가 간신히 입을 열 찰나.
“흐허허허허!”
노인네 입맛에 딱 맞는 농담이었던지, 김찬원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껄껄 웃었다.
“들깨 해장국을 먹으면 술이 들깨! 크허허허!”
“웃기죠? 웃기죠?”
서로의 얼굴을 가리키며 하하호호 웃는 두 사람을 보니 찌개를 한 사발 끓여 먹을 때까진 안 나갈 기세다.
생전 없던 두통을 느낀 천마는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천마 님. 일어나셨습니까.]
옥탑방 평상 위, 대자로 누워 있던 무명이 천마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밤새 즐거우셨는지요?]
“네 녀석은 왜 바깥에 누워 있는 거냐.”
[너무 시끄러워서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천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는 천마가 갖고 있는 상식 따윈 겨자씨만큼도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너무 당황하면 오히려 덤덤해진다고 했던가?
두 팔을 머리 뒤로 넘긴 채 다리를 꼬고, 충전스테이션에 누워 있는 무명을 바라보던 천마의 눈은 어느새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 자라.”
천마는 무명이 누워 있는 자리를 피해 평상에 앉았다.
“운공이나 해야겠군.”
마음을 가다듬은 천마는 내공을 모았다.
진기를 한 바퀴 일주천시키자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왔다.
현재 천마의 내공 수위는 반 갑자. 즉 무림 고수가 30년 동안 고련해야 얻을 수 있는 진기가 모여 있었다.
“십 갑자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군.”
십 갑자.
이론적으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내공 수위이자, 사실상 진기가 마르지 않는 무한의 경지를 말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600년의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련해야 얻을 수 있는 진기를, 천마는 단 20년 만에 얻었다.
사실 정확한 내공 수위는 1,000년 이상이었으나, 십 갑자 이상의 경지를 표현하는 단어가 없었기에 그냥 십 갑자라고 말한 것뿐이다.
“꼭 돌아가야 하나.”
문득 천마는 묘한 생각을 떠올렸다.
반드시 무림에 돌아가야 할까? 돌아가면 뭐가 달라지는가?
무림에 있든 이 세계에 있든, 천마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세계는, 천마의 어깨에 지독하게 달라붙었던 무료함이라는 감정을 날려 보내주었다.
무림에선 얻을 수 없었던 지식과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 쌓여 있다.
“하지만…….”
먼 하늘을 바라보던 천마의 두 눈동자에 혈염광휘가 머물렀다.
“반드시 돌아가야겠지.”
송곳니를 드러낸 천마의 몸에선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천마를 이곳에 보낸 음모자.
그자는 고금제일인이라는 천마의 기혈을 신비스럽게 끊어놓았을 뿐 아니라, 심령에 파고들어 일정 시간의 기억을 지운 채 다른 세계에 보냈다.
아마도 지금쯤 무림은, 만마집궁은 쑥대밭이 된 채 음모자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과연, 인간의 잠재력은 한량이 없군.”
어둠 속에 가려진 음모자를 떠올리던 천마가 탄성을 내뱉었다.
“마문대법에 한정되었다곤 하나, 고금제일이라 불리는 본좌를 능가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있을 줄이야.”
천마의 입가엔 미소가 흘러나왔다.
맞서 싸울 적수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천마의 투쟁심을 다시 불태워 줄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철커덕.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장채원이 목을 빼꼼 내밀며 소리쳤다.
“해장국 다 됐어!”
작은 교자상 위에는 펄펄 끓는 들깨 해장국이 냄비째 올라가 있었다.
“어서 먹어.”
장채원이 일회용 접시에 고기와 채소가 푸짐하게 들어 있는 해장국을 듬뿍 퍼다 주었다.
천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장국을 바라볼 무렵, 숙취에 찌든 장채원과 김찬원은 연신 크어 소리를 내며 국물을 떠먹었다.
“간만에 과음을 했구먼.”
접시를 통째로 집어 들어 국물을 들이켠 김찬원이 천마에게 말했다.
“앞으로 천 씨랑 술을 마시려면 맴을 단단히 먹고 와야 쓰겄어.”
“그러게요.”
“아참, 천 씨. 이거 받어.”
김찬원은 주머니에서 투명한 카드 하나를 꺼내 천마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으응, 상품권이여. 대형 마트나 영화관 같은 데서 돈 대신 쓸 수 있는 겨.”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김찬원이 말했다.
“집들이 선물이여. 집에 필요한 물건 있으면 하나 사. 아니면 어디 놀러 갈 때 쓰든가.”
“필요 없…….”
투명한 카드를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저을 무렵.
[감사히 쓰겠습니다.]
밖에 있던 무명이 재빠르게 굴러와 김찬원이 내민 상품권 카드를 냉큼 집어 들었다.
“뭐 하는 거냐.”
천마가 엄숙한 표정으로 묻자 무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충전스테이션을 가리켰다.
[저 밥그릇 모양의 충전스테이션은 어딘가 불편해서요. 요새 침대형으로 된 최신형 충전스테이션이 나왔더라고요.]
상품권 카드를 안아 든 무명이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천마 님과 함께 살고 있는 동거인이니, 집들이 선물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으음.”
또다시 머릿속의 상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낀 천마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하라.”
[감사합니다.]
그때 해장국 건더기를 우물우물 씹던 장채원이 천마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아 맞다. 밥 먹고 뭐 할 거야?”
“고요했던 본좌의 거처를 시끄럽게 만들고, 평온을 깨뜨린 침입자들을 쫓아낼 예정이다.”
“그럼 별다른 일은 없다는 거네.”
일회용 숟가락을 내려놓은 장채원이 웃으며 말했다.
“잘됐다. 온 김에 휴대폰이나 하나 사자.”
“휴대폰?”
주머니에서 네모난 모양의 골동품 휴대폰을 꺼내든 장채원이 씩 웃었다.
“천마 너, 휴대폰 없잖아. 신뢰나 시공일을 할 땐 나노봇을 데려가지 못하니까. 이제 휴대폰도 하나 장만해야지.”
“흠.”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하던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
“왜? 하나 사줄게.”
“번거롭군. 다음에 사도록 하지.”
“뭐야, 어제부터 집들이 선물로 생각해 둔 건데. 그럼 뭐 필요한 거 없어?”
“없다.”
고개를 젓던 천마는 문득 싱크대 아래 늘어진 술병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눈빛을 하던 천마가 다시 말했다.
“아, 하나 있긴 하군.”
두 시간 후.
팔뚝이 드러나는 광마혈투의를 입은 천마가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그 옆에는 청바지에 빨간 롱슬리브를 입은 장채원이 나란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김찬원은 집으로 돌아갔고, 무명과 제비는 옥탑방에 두었다.
천마는 장채원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외출을 한 것이다.
“뭐, 뭐야.”
지나가던 사람들은 엄청난 거구에 붉은빛을 번뜩이는 천마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거나 슬그머니 옆으로 피했다.
걸어갈 때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의 안색이 해쓱해지는 걸 지켜보던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옷이라도 좀 제대로 입을 수 없어?”
“무슨 말이냐.”
“그 산도적 옷 말이야. 옷 많이 사줬잖아? 왜 맨날 그 옷만 입어. 근육 자랑하려고?”
그녀가 통나무 같은 팔뚝을 가리키자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이 광마혈투의로 말할 것 같으면 수화불침, 도검불침…….”
“아무리 좋은 옷이라고 해도 세탁은 해야지? 매일 그걸 입으면 어떡해?”
“세탁은 필요 없다.”
“뭐?”
천마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광마혈투의는 오물을 스스로 배출해 낼 뿐만 아니라, 유해한 물질의 확산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
“세탁… 안 한다는 거잖아.”
“못 들었나. 유해한 물질의 확산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동안 광마혈투의의 공능을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두 사람은 번화가 뒷골목에 위치한 앤티크샵 앞에 섰다.
“여전히 좋은 물건들이 많네.”
천장에는 고풍스러운 조명들이 주렁주렁 반짝였고, 아래쪽에는 수많은 골동품들이 쌓여 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금은보화 창고와 같은 모습이다.
딸랑.
매장으로 들어오자 맑은 풍경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십시오.”
매장 안쪽에서 무언가를 닦고 있던 노인이 장채원을 보고 반갑게 미소 지었다.
“어이구, 장 사장님. 오랜만에 오셨군요.”
“오랜만이에요. 사장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그러믄요. 어이쿠, 옆에 계신 분은…….”
노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이르자 천마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위엄있는 표정을 지었다.
“본좌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골라.”
“아무거나 상관없나.”
주위를 둘러보던 천마를 보며 장채원이 씩 웃었다.
“그래. 맘껏 골라봐.”
매장 안에 있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신비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평범하게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천마도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매대에 진열된 물건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어라?”
장채원은 어느 고풍스러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의 겉면에선 은은한 서기가 올라오고 있다.
달칵.
상자를 열어보니, 마치 루비를 깎아 만든 것처럼 붉은 술잔 두 개가 푸른빛 천에 담겨 있었다.
“이거 진령석(震靈石)으로 만든 술잔이잖아?”
진령석은 요력(妖力)이 담긴 보석으로, 요괴에겐 활력을 주고 인간이 지니면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장님. 저 이거 주세요.”
“아아, 그거요?”
노인은 장채원이 집은 나무상자를 보며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세요.”
“얼마 드리면 될까요?”
“그냥 가져가세요.”
“네?”
“항상 오실 때마다 쓸모없는 물건들을 큰돈을 주고 가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노인은 골동품 가게를 접으려 했다.
그런데 우연히 손님으로 들어온 장채원이 남아 있던 물건들을 엄청난 고가로 매입해 주었다.
그 덕택에 노인은 다시 안정적으로 매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 사장님이 가치도 없는 골동품들을 비싸게 사주셔서 계속 이 가게를 운영할 수 있었지요. 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가져가세요.”
“가치 없는 것들이 아니라니까요.”
넉넉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노인을 보며 장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께서 가져오는 물건들…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굉장히 귀하고 값비싼 것들이에요. 저는 원래 가치보다 엄청 저렴하게 산 거고요.”
그러자 노인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을 한 지 올해로 40년째지요. 저도 제가 입수한 물건들의 가치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장채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저씨가 가치를 몰라서 그래요. 우리 쪽에선 돈 주고도 못 사는 것들이라고요.”
“우리… 쪽이요?”
그때 성큼성큼 걸어온 천마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본좌는 이것으로 하지.”
“이걸 사겠다고?”
장채원은 두 눈을 비볐다.
천마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커다란 탈이었다. 예리한 두 개의 뿔, 붉게 달아오른 피부와, 톱날과도 같은 치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악마의 모습과 같았다.
“미, 미쳤어? 그걸 쓰겠다고?”
사실, 천마가 필요하다고 한 물건은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가면’이었다.
싱크대에 잔뜩 올려진 술병을 바라보던 천마는 불현듯, 노병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을 떠올렸다.
아이스골렘을 부술 때, 그 젊은 여성이 멀리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딱 좋지 않나. 던전에 갈 때 본좌의 용모를 숨기기에는.”
장채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데다,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엄청난 근육질을 가진 천마.
가면 하나 쓴다고 못 알아볼 사람은 없을 터. 장채원은 그저 집들이 선물을 사주고 싶어서 데리고 온 것뿐이었다.
“됐어. 흉악해서 더 눈에 띌 거야. 다른 거 골라.”
“으음.”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집어 든 아이처럼 천마는 귀면탈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본좌는 이게 마음에 든다.”
“선물로 드릴게요. 가져가세요.”
노인이 웃으며 말하자 장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차피 너무 흉측해서 팔리지도 않는 물건인걸요.”
“그럼 계산할게요.”
“아니에요. 그저 나무로 만든 탈인걸요. 부담가지실 필요 없어요.”
그러자 천마는 전에 없던 환한 미소를 보였다.
“인심이 후하군. 대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본좌에게 연락해라.”
“아, 네에…….”
노인은 팔짱을 낀 채 헛인심을 쓰는 천마를 보며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부우우웅.
하얀 승합차 한 대가 경쾌한 속도로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장채원은 조수석에 앉아 귀면탈을 매만지는 천마를 보며 픽 웃었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
“물론이다. 마치 본좌의 위엄을 상징하는 듯 보이지 않나.”
천마는 들고 있던 나무탈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쿠웅.
그 순간, 시뻘건 오오라가 사방으로 퍼지며 지옥에서 소환된 마왕 하나가 씨익 웃고 있는 듯한 환상이 펼쳐졌다.
끼이이익.
장채원은 자신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아버렸다.
지금까지 온갖 신들과 요괴들을 봐왔던 장채원조차 놀랄 만큼 흉악스러운 기운이 차량 내부에 가득 찼기 때문이다.
“천, 천마야.”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을 닦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거 꼭 써야겠어?”
“당연한 말을 왜 하나.”
“그럼 절대 밖에선 쓰고 다니지 마.”
아연실색, 떨려오는 가슴을 꾹 누른 장채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던전에서만 써. 알겠지?”
이마에 땀방울을 닦은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약속해. 알겠지?”
“흐음.”
천마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곤 벗은 귀면탈을 품 안에 넣은 후 가슴께를 소중히 쓰다듬었다.
앞으로 닥쳐올 수 많은 위기속에서,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호신부가 된다는 걸 아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