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천마와 불가사리 (2)
이름 모를 산의 커다란 토굴 내부는 매우 쾌적했다.
종유석이 보이는 천장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흐르는 돌이 박혀 있었고, 내부에는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토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자 고색창연한 나무로 된 문이 보였다.
똑똑똑.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기자 스르륵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렸다.
그러자 우아하고 고상한 집기들로 꾸며진 작은 방이 보였다.
“복복 인테리어에서 왔는가.”
안으로 들어가자 선글라스를 쓴 노인이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바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준다는, 토룡신(土龍神)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복복 인테리어에서 온 장채원입니다.”
장채원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천마 역시 두 손을 모으며 깊이 포권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노야.”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토룡신이 세련된 선글라스를 벗자 회색으로 물든 눈동자가 보였다.
늘 어두운 땅속에서만 지내기 때문에 눈이 퇴화되어 버린 것이다.
“철거 공사를 요청하셨는데, 어디를 철거해 드리면 될까요.”
주위를 둘러보던 장채원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방 내부의 집기와 책들은 상당히 많았으나 대부분 가벼운 나무로 되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장채원이라도 두 시간 안에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하하. 아무래도 이제 노부가 늙어서 말이야. 예전에는 혼자 나르고 그랬는데, 이제는 힘이 들어서 밖으로 옮길 수가 없구먼.”
“노야께선 이곳의 물건들을 모두 밖으로 내다 버리길 원하시는 것이오?”
방 안을 둘러보던 천마가 묻자 토룡신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네. 듣자 하니 복복 인테리어의 직원이 그렇게 힘이 세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말야.”
집기들을 보고 있던 천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각만 기다려 주시오. 금방 처리해 드릴 테니.”
그리고 토굴에 세워진 의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것은……’
놀랍게도 이 작은 의자가 천마의 근력으로도 쉽게 들리지 않았다.
“아아, 그 의자는 대략 3톤은 나갈 걸세.”
“3톤?”
순간 천마의 눈이 번뜩였다.
“이 작은 의자가 800관이 넘는단 말이오?”
“뭐, 그런 셈이지. 신령목(神靈木)으로 만든 것들이니까.”
“나무? 세상에 이렇게 무거운 나무가 있단 말이오?”
“정확히 말하면 나무가 아니라 금속에 더 가까울 걸세. 다만 신력으로만 가공할 수 있고 표면에 나무무늬가 새겨져 있어, 신령목이란 이름이 붙여진 걸세.”
토룡신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 내부에 있는 집기들은 대부분 신령목으로 만든 것들일세. 어지간한 완력으로는 옮길 수조차 없지.”
그런 거였나. 토룡신이 할 일이 없어 철거 의뢰를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노야. 그런데 왜 이곳에서는 내공이 솟구치지 않소이까?”
“응? 내공이라니.”
“그 땅에서 올라오는 뜨겁고 강렬한 기운 말이외다.”
“아아, 신지에서 올라오는 신력 말인가?”
토룡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노부는 다른 곳에 거처를 옮겼지. 이곳은 이제 신지라고도 부를 수 없는 공간일세.”
“으음. 그렇구려.”
천마는 덤덤히 이야기했지만,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나왔다.
현재 그의 공력은 고작 20년 남짓.
토룡신이 거처를 옮긴 탓에 물건을 옮기기 위해선, 육체에 막대한 무리가 가는 천마대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역시 어려울 것 같나?”
토룡신이 걱정스럽게 묻자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 물건을 옮기는 건 일도 아니오.”
두 손을 휘저은 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시진. 넉넉잡아 두 시진 안에는 모두 철거가 끝날 것이외다.”
“그렇구먼. 다행일세.”
고개를 끄덕인 토룡신이 팔을 벌렸다.
“고생이 많을 테니 보수는 미리 주겠네. 크게 인심을 썼으니 만족할 걸세.”
순간 천마의 몸이 불타오르듯 뜨거워지더니, 단전 안으로 맹렬한 힘, 신력이 솟구쳤다.
‘10년?’
놀랍게도 그 양은 무려 10년 정도의 공력에 달했다. 지금까지 신뢰를 받은 것 중에서 가장 큰 내공을 얻은 셈이다.
‘이제 반 갑자. 일 갑자를 채우는 데 절반까진 온 셈이군.’
“힘들겠지만 고생 좀 해주게.”
토룡신의 말에 천마는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걱정 마시오. 완벽히 철거해 드리리다.”
빙긋 미소 지은 토룡신은 장채원에게 말했다.
“그럼 철거를 하는 동안 점주께선 노부와 같이 읍내에 동행해 줄 수 있겠나? 새로 꾸민 거처에 인테리어 소품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싶은데.”
“아, 네. 그러세요. 그럼 고생 좀 하고 있어.”
장채원의 말에 천마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라.”
“허억. 허억.”
천마의 혀가 턱 밑까지 내려올 지경이다.
작은 의자의 무게가 800관. 조그만 탁자가 1,300관. 그리고 작은 서랍장은 자그마치 2,400관이 넘었다.
“그나마 일상품들은 나무로 되어 있지 않아서 다행인 건가.”
만약 방 안의 모든 집기들이 나무로 되어 있었다면…….
아마 천마는 날이 새도록 토굴을 왔다 갔다 하며 물건을 날라야 했을 것이다.
“후읍. 후읍.”
어느덧 시간은 한 시진 정도가 흘러 있었다.
방 안에 있던 집기들 절반 정도를 철거한 천마의 얼굴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상하군. 어째서 체력이 바닥났단 말인가.”
가쁜 호흡을 몰아쉬던 천마는 문득 아침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혈선난무.
철사로 이은 수십 개의 목각인형에 공력을 주입해 무림 고수와도 같은 무공을 펼치게 하는 혈선난무 수법은 엄청난 공력이 요구된다.
제비를 길들이고 싶던 천마는 천마대능력을 남발하였고, 결국 몸에 무리가 갔던 것이다.
“으음.”
천마는 방 안에 남아 있는 커다란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천마의 몸뚱이보다 폭이 넓은 책장은 못해도 3,000관은 넘을 것만 같았다.
다시 한번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린 그의 동공에선 신비한 빛이 흘러나왔고 전신에선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후읍.”
커다란 책장을 등에 짊어지는 순간, 그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핏발이 선 눈으로 책장을 짊어진 그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옮겼다.
“크으으.”
점차 몸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그의 몸엔 굵은 핏줄이 바짝 섰다.
마침내 육체에 담긴 잠력까지 폭발시키는 천마대능력마저도 몽땅 사용한 것이다.
쿠웅.
결국 천마는 책장을 놓쳐버린 채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등에서 떨어진 책장은 동굴 바닥과 부딪쳐 윙윙하는 금속성을 울리고 있었다.
“무림천하를 제패한 본좌가 고작 집기에 무릎을 꿇었단 말인가!”
내공이 없다시피 한 상태에서 13톤에 가까운 무게를 든 것만으로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수준이다.
하지만 천마는 책장 하나 옮기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크게 절망하고 있었다.
“이럴 순 없다.”
조금 있음 장채원과 토룡신이 올 것이다.
힘이 다해 볼썽사납게 쓰러져 있는 모습을 들킨다면? 그 치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크으.”
천마는 다시 온 힘을 다해 책장을 짊어졌다.
하지만 몇 발짝을 채 옮기기도 전에 쿵 소리와 함께 천마는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틀린 건가.”
아무리 몸을 일으켜도 책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학을 익힌 이래 처음으로 느껴보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모든 힘을 써버린 천마가 탈진한 채 서서히 눈을 감을 무렵.
-뀨?
그때 맑은 울음소리와 함께 천마의 눈앞으로 하얀 물체가 보였다.
바로 불가사리, 제비였다.
“네놈. 또 몰래 숨어들어 온 게냐.”
제비는 번개처럼 민첩할 뿐 아니라, 원한다면 몸을 밥그릇 안에 욱여넣을 수 있을 만큼 크기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천마가 아무리 공구통을 확인하거나 장채원의 차를 살펴보아도, 현장으로 숨어오는 제비를 막을 수 없었다.
-뀨규.
제비는 쓰러진 천마를 보며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본좌를 비웃는 거냐.”
-뀨.
“그래. 네놈을 훈련시키려다 천마대능력을 헛되이 낭비했지. 마음껏 비웃어라.”
자책하던 천마는 두 눈을 감았다.
이 세계는 너무나 평화롭다.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 빠졌을 때도 삼 푼의 힘을 숨기던 습관마저 잠시 잊었던 것이다.
서걱서걱.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마의 전신을 누르고 있던 책장을 제비가 조금씩 씹어먹고 있었다.
“뭐야? 불가사리가 어찌 나무를…….”
그 모습을 보던 천마는 문득 토룡신의 말이 떠올랐다.
“나무가 아니라 금속에 더 가까울 걸세. 다만 신의 힘(신력)으로만 가공할 수 있고 표면에 나무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것도 질 좋은 쇠란 말인가.”
어느새 등을 짓누르던 무게가 거뜬해졌다. 제비가 절반 이상의 책장을 먹어 치운 것이다.
쿠웅.
천마가 몸을 일으키자 책장은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제비는 본격적으로 책장을 씹어먹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챱챱챱챱.
금속보다 수백 배 무거운 신령수를 마치 과자 부수듯 수월히 먹는 것이 아닌가?
“신수 중 최고라더니.”
어느새 책장을 몽땅 갈아먹은 제비가 천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안쪽에 있는 집기들을 보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천마는 마침내 제비의 울음소리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뀨?(저것들도 먹어도 되냥?)
제비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도 된다. 어차피 모두 철거할 것들이니까.”
-뀨!(감사감사. 압도적 감사!)
제비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내부에 있던 집기를 대부분 갉아 먹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토굴 밖으로 나오자 제비 역시 천마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토굴 앞에는 천마가 옮겨 두었던 의자와 책장 등이 쌓여 있었다.
“여기 있는 걸 먹지 않는 거냐?”
예전 같으면 밖에 있는 것부터 몽땅 먹어 치울 녀석이건만.
“설마, 본좌의 허락을 받고 먹으려고 온 건가.”
-뀨.(아닌데.)
“그렇군. 이제 본좌의 말을 듣는 건가?”
-뀨뀨.(그게 아니라 주인한테 혼날까 봐 그랬다냥.)
울음소리의 해석이 몽땅 틀렸다는 걸 깨닫지 못한 천마의 표정이 점차 환해졌다.
“그런가. 혈선난무의 훈련이 효과가 있었군.”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팔짱을 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녀석을 본좌의 수하로 삼아주지. 너도 이제 복복 인테리어의 직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비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뀨우…….(착각도 자유다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