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32화 (32/285)

제32화. 천마와 술집 (1)

천마의 시선으로 보자면, 각성자들은 무림을 떠도는 낭인무사와 같았다.

생계를 위해서, 때론 맡은 바 임무를 위해서, 스스로 던전이라는 전장에 들어가 사투를 벌이니까.

“네놈도 이번 일로 느꼈겠지. 죽음과 맞닿은 사투(死鬪)는 무인의 육체와 정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이 말은 며칠 전 천마가 떠돌이 짐꾼으로 살아가던 8급 각성자, 김지환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정작 천마가 던전에 들어갈 때 죽음을 각오해야 건 천마가 아닌 무명이었다.

[천, 천마 님. 어깨에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앞장서서 출구를 찾던 무명이 고개를 돌린 채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던전은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저도 모르는 곳이라서요.]

“경계를 풀지 않고 걷는 건 무인의 기본소양이지. 방심은 금물이다.”

[저는 그냥 나노봇인데요…….]

무명의 항변을 가볍게 무시한 채 느긋하게 걷던 천마가 말했다.

“출구는 아직 멀었나.”

[네. 네.]

배터리도 부족한 데다 아직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을 미친 듯이 헤매던 무명 앞에 마침내 하얀 빛이 보였다. 출구였다.

[찾았습니다. 이제 출구를 찾았으니 앞으로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천마 님.]

허름한 초가집 모양의 던전에서 나온 무명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가늘고 희미했다.

“목소리가 왜 그리 힘이 없나.”

[이번에 출구를 찾는 연산 작업은, 새로운 몬스터의 전투 데이터와 움직임을 분석하는 것과 맞먹는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어깨에 올라타 있는 무명의 하얀빛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센서의 눈이 점차 희미하게 변했다.

[배터리가 5% 미만으로 남았습니다. 배터리 절약 모드 전환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배터리 절약 모드 작동 시에는 긴급 상황 시에 대한 안내만 받을 수 있습니다]

무명을 바라보던 천마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위잉 소리와 함께 무명의 눈에선 빛이 사라졌다.

찍소리와 함께 엉덩이 가방을 연 천마는 무명을 그 안에 소중히 넣어놓았다.

“고생했군.”

정말이지, 이번엔 무명이 큰 고생을 했다.

앞으로 있을 신뢰에 필요한 재료, ‘둥글 풍선 클로버’를 찾기 위해 천마는 세이프던전 남동쪽에 있는 ‘가정집’이라 불리는 던전을 찾았다.

다 무너져 가는 초가집 모양으로 되어 있는 이 던전은, 마치 일반 가정집처럼 꾸며진 거대한 방들이 무수히 설치되어 있는 미로형 던전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던전 중심부에 있는 둥글 풍선 클로버를 입수했으나, 돌아가는 출구 경로가 갑자기 바뀌어 버렸다.

덕택에 무명은 출구를 찾기 위해 계산을 시작했고 하루 다 되어 간신히 출구를 찾았지만, 배터리가 모두 소진된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천마가 복복 인테리어로 돌아오자 장채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루 내내 연락이 끊긴 상태였잖아. 지금까지 계속 던전에 들어가 있었던 거야?”

“그렇다. 출구로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길이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자 장채원이 천마의 엉덩이 가방을 힐긋 보며 말했다.

“그랬구나. 고생했어.”

“별거 아니다.”

“늦었으니까 바로 퇴근해. 집에 돌아가면 무명도 바로 충전스테이션에 넣어주고.”

“알겠다.”

매장으로 나와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던 천마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명은 잠들어 있다.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굳이 빙빙 돌아가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지 않고, 경공을 펼쳐 돌아가려는 것이다.

“흠.”

인적이 드문 상가 골목으로 들어간 천마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발끝으로 희미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후욱 소리와 함께 천마의 몸뚱이가 상가 위로 솟구쳤다.

휘익. 탁.

도약과 활공을 반복하던 천마는 문득 어느 빌딩 난간에 멈춰 섰다.

지금까지 수없이 경공을 펼쳤지만, 다른 세계의 야경을 배경 삼아 달려본 적은 없다.

아래쪽으로 보이는 수많은 빛, 낯선 복장들의 사람들,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쇳덩이들.

혹시 꿈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풍경이다.

“그렇군. 이상한 건 본좌였나.”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질감.

천마는 비로소 자신이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걸 실감했다.

“흠.”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천마의 문득 그리운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심야에 몰래 만마집궁을 빠져나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던 추억이었다.

“술이라.”

천마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감상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쯤이면, 배 속에 있는 술 벌레들이 아우성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타악.

빌딩에서 내려온 천마는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길을 걸었다.

그 골목길에서 유독 비틀거리며 걸어 나온 주정뱅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분명 괜찮은 술집이 있다는 증거였다.

“여긴가.”

천마의 눈에 목조로 꾸며진 선술집이 들어왔다.

꾸불텅한 골목길 끝자락에 위치한 이 외딴 술집은 손님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천마는 이 삭막하고 외로워 보이는 술집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노병이라.’

간판에 적힌 글자를 올려다보던 천마가 문을 열자,

끼익.

삐거덕 소리와 함께 목조로 꾸며진 실내가 보였다.

겉보기에 매장은 꽤나 넓었다. 안쪽으론 나무로 만든 바 테이블이 있고, 나무 기둥 사이로 설치된 아늑한 테이블이 예닐곱 개쯤 되어 보였다.

“…….”

너무 이른 탓인지 선술집 내부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천마는 안쪽에 있는 바 테이블에 앉았다.

“최근에 이사를 온 건가.”

바 테이블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칼을 멋스럽게 넘긴 노인은 천마를 보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손님이 왔으면 인사를 할 것이지, 환대는커녕 뭐 훔쳐 갈 게 없나 두리번대는 도둑 바라보듯 경계를 하고 있다.

노인의 푸대접에도 천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처음 왔으니까.”

“그랬구먼.”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노인은 험악한 천마의 인상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꽤나 힘들었던 하루를 보낸 것 같구먼.”

“쉴 틈이 없었지.”

무명이 탈출 경로를 쉽게 찾지 못해, 절반쯤은 문을 박살 내며 빠져나온 터였다.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천마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마실 텐가.”

“뭐가 있나.”

“무엇이든. 하루 내내 못 일어날 만큼 독한 것도 있고, 가볍게 마실 것도 있지.”

노인의 말은 천마의 흥미를 돋우었다.

모처럼 입가에 미소를 그린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독한 걸로.”

“그럴 줄 알았네.”

노인이 미소를 짓자 주름살이 잔뜩 피어났다.

몸을 숙인 노인은 카운터 아래쪽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이상한 액체들이 담겨 있는 커다란 병들을 올려두기 시작했다.

“첫 손님이니, 직접 독한 걸 한잔 만들어주지.”

카운터에 올려진 병들을 보며 천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반 상점에선 볼 수 없는 괴상한 액체들이다. 그러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조각을 발견한 천마가 눈썹을 올렸다.

‘자이언트 고구마?’

술병 안에 들어가 있는 조각은, 자이언트 고구마였다.

일반 시중에는 유통되지 않는다는 던전의 재료가 어째서 이런 술집에 있단 말인가.

“보아하니, 작은 잔은 못 쓰겠군.”

천마의 떡 벌어진 덩치를 바라보던 노인은 커다란 맥주잔을 카운터에 올렸다.

병에 들어 있는 재료들을 맥주잔에 섞은 노인이 카운터 아래쪽에 연결된 노즐을 열었다.

쏴아아.

맑은소리와 함께 맥주잔에 투명한 액체가 올라왔다.

냄새를 보아하니 주정(酒精)에 가까운 독한 술인 것 같았다.

탁.

투명한 술이 담긴 맥주잔을 내려놓은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마셔보게. 우리집 특제 술인 삼복구(三福口)일세.”

“삼복구?”

“세 가지 복을 마실 수 있다는 뜻일세. 즉, 세 가지 장점이 있는 술이라고나 할까.”

노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마셨던 술과는 차원이 다를 게야.”

안 그래도 맑은 잔에서 풍기는 주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있는 터였다.

노인을 바라보던 천마는 맥주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크어.”

어지간한 독주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는 천마의 입에서 구수한 탁성이 쏟아졌다.

마시는 순간 식도가 타들어 가고 배 속에 불이 일어나는 듯하다.

“삼복구라.”

1000cc 잔에 담긴 삼복구를 모조리 들이켠 천마는 만족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장점이 뭔지 알겠군.”

“벌써?”

“한 잔만 마셔도 스무 잔의 독한 술을 한꺼번에 들이켠 듯한 작미(炸味)가 있다. 굳이 여러 잔의 술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장점이겠지.”

천마의 말에 노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두 번째도 맞혀볼 텐가?”

“좋지. 한잔 더.”

탁. 말없이 천마를 바라보던 노인은 다시 삼복구를 만들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꿀꺽꿀꺽 소리와 함께 삼복구를 단숨에 들이켠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어떤가? 두 번째 장점도 알겠나?”

탁 소리와 함께 술잔을 내려놓은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복구 한잔이면 술기운이 오르니… 술친구가 필요 없겠군. 이것이 두 번째 장점이겠지.”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번째 장점을 맞추었기도 하거니와, 눈동자에서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온 자가 아니면 떠올릴 수 없는 색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 삼복구 한잔이면 기분 좋게 취해 버리니, 술친구가 필요 없지.”

“하지만 세 번째는 도무지 모르겠다.”

“후후. 세 번째까지 맞혔으면 그것만큼 망신스러운 일이 없었을 게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노인은 몸을 돌려 주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숯불로 구운 닭껍질 꼬치였다.

“삼복구를 마시면 이런 싸구려 안주도 천상의 맛으로 끌어올려 주지. 그것이 세 번째 장점일세.”

노인은 웃으며 꼬치를 가리켰다.

“들어보게나.”

천마는 사양하지 않고 닭껍질 꼬치를 집어 올렸다.

“후우.”

입에 넣자마자 하얀 김이 올라온다. 싸구려라고 하기엔 너무나 맛있는 꼬치다.

신선한 닭껍질에 소금을 뿌려 구워냈을 뿐인데, 어찌 이런 맛이 난단 말인가.

‘꼬치를 구워내는 솜씨도 일품이군.’

이제 보니 노인은 술을 잘 말아줄 뿐만 아니라 음식 솜씨도 비범한 편인 것 같았다.

닭껍질 구이를 꿀꺽 삼킨 천마가 덤덤히 말했다.

“좋은 곳을 찾았군.”

미소 지은 노인의 눈은 감겨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이 천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는 걸 짐작한 것이다.

“아아, 여기에도 술집이 있네.”

그때 나무문이 열리며 세 명의 젊은이들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주문!”

음침하고 어두워 보이는 술집 분위기와 달리 이 젊은 청년들은 잔뜩 흥이 나 있는 상태였다.

“홍아.”

카운터에 있던 노인이 주방에 대고 외치자 머리를 두건으로 질끈 묶은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치곤 눈빛이 매우 날카롭고 기세가 매섭다.

“주문은?”

테이블에 다가간 여성이 묻자 청년들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오, 이쁜데? 여기 알바생?”

“내 주문은 그쪽 연락처.”

청년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자 꼬치구이를 입에 가져가려던 천마가 고개를 돌렸다.

천마가 눈길을 주자 노인이 빙긋 웃었다.

“젊을 혈기엔 다 그렇지. 너무 그러지 말게나.”

그건 노인의 오해였다.

천마는 어지간해선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소리가 나서 돌아봤을 뿐이다.

“으으음.”

테이블에 서 있던 여성이 침음을 내더니 청년들에게 말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다른 데 가서 먹어.”

순간 천마는 흥미 있는 눈빛으로 그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매력 있게 생긴 여성이라곤 하지만, 저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을 테니까.

‘무림에 돌아온 것 같군.’

말보단 주먹이 나가는 무림에선 걸핏하면 박살 나는 곳이 주루요, 객잔이다.

고개만 돌리면 탁자가 박살 나는 터라, 오죽하면 ‘무림인은 정중히 사양합니다’라고 써 붙이는 객잔들이 속속들이 생길 정도였다.

“네, 죄송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청년들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천마의 눈에선 이채가 떠올랐다.

크게 확장된 여성의 동공에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꿰뚫어 본 것이다.

‘흐음.’

하지만 이내 다시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간 천마는 잔에 남은 마지막 삼복구를 쭉 들이켰다.

“계산.”

“벌써 가려는가.”

“아침 일찍 일이 잡혀 있다.”

몸을 일으킨 천마가 주섬주섬 엉덩이 가방을 매만지는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돈은 됐네.”

천마가 미간을 모으자 노인은 시원스레 미소 지었다.

“처음 온 손님에겐 술값을 받지 않으니까.”

닭껍질 꼬치가 담겨 있던 빈 그릇을 바라보던 노인이 다시 말했다.

“대신 다음에도 다시 방문해 주게나.”

“진담으로 하는 말인가.”

진위를 판별하는 듯 천마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노인이 가는 눈을 반달처럼 접었다.

“이런 서비스라도 있어야 이런 외딴 골목에 있는 술집이 단골이라도 잡지 않겠나.”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래도 한 번쯤 사양하며 돈을 내밀 것이다.

하지만 천마는 엉덩이 가방을 잽싸게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시킬 걸 그랬군.”

사양하기는커녕, 외려 아쉽다는 기색으로 입맛을 다신다.

“그런 말은 계산 전에 하라.”

뻔뻔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던 천마는 몸을 돌려 술집 밖을 나섰다.

“허, 어디서 저런 자가 불쑥 튀어나왔을꼬.”

들어올 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문밖을 나서는 천마를 보며 노인이 탄식을 내었다.

“저 정도 실력을 가지고도 각성자로 등록을 하지 않았다니.”

그러자 두건을 묶은 여성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냥 근육만 잔뜩 키운 근력증강 각성자 같던데요.”

“쯧쯧, 못 느꼈느냐. ”

혀를 찬 노인이 천마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지금까지 내가 본 각성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다. 게다가 삼복구를 석 잔이나 마시고도 내 정신 침입을 수월히 막아냈지.”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세 개의 맥주잔을 가리켰다.

“보통 각성자라면 소주잔 하나만 먹어도 정신 방어가 해제되는 술을, 커다란 맥주잔으로 석 잔이나 마시고도 말이다.”

놀란 여성은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문 것처럼 서늘함을 느꼈다.

눈앞에 서 있는 노인의 정신 조작 능력은 우리나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울퉁불퉁한 근육을 지닌 자가 그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다니?

“혹시 어르신과 같은 정신 능력자가 아닐까요?”

“글쎄.”

깊은 한숨을 내쉰 노인은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저자는 나를 능가하는 스킬을 가진 마스터일 게다.”

“그럴 리가요.”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여성은 침묵했다.

이내 두 눈을 반짝인 여성이 숨 한 모금을 깊숙이 들이켜며 말했다.

“어쩌면 각성자가 아닐 수도 있어요.”

“그 말은?”

“다른 종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 요괴라는 거 말인가.”

“네.”

그 존재를 아는 자가 극히 드물고 제한되어 있었을 뿐, 머나먼 시절부터 인간들은 요괴와 공존해 왔다.

그리고 각성자협회에서도 점차 인간들과 뒤섞여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들, 요괴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태생적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그 존재들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허허허.”

여성에게 이르렀던 눈길을 허공으로 돌린 노인이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하긴, 다른 세계의 몬스터도 튀어나오는데, 요괴라고 없다는 보장은 없지.”

“저자도 경계 대상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째서.”

“협회 내에선 가변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위협적인 불안 요소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정체를 모르는 존재는 언제나 두려운 법이니.”

어둠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험악스러운 협회의 인물들을 떠올리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노부가 인제 와서 뭘 나서겠느냐만은, 그래도 저자는 건드리지 말거라.”

“네?”

“저자가 요괴든 인간이든 건드리면 안 된다.”

걸레를 쥔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협회가 온전하길 바란다면 말이다.”

* * *

휘리리릭.

신법을 펼쳐 단숨에 옥탑방으로 돌아온 천마는 입맛을 다셨다.

각성자들조차 몸을 가누지 못한다는 삼복구.

그 삼복구는 지금까지 천마가 먹었던 술 중에서 가장 독하고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위험한 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금까지 생각이 날 만큼.

“술집에서 던전의 재료를 사용한다라. 보통 노인네가 아니군.”

천마는 눈처럼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를 단정히 넘긴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술을 섞어서 말아재끼는 솜씨가 주신(酒神)이라 불리는 상량(尙亮), 그 노인네 못지않아. 던전 재료를 쓰는 걸 보아하니 밀주(密酒) 쪽에서 도가 튼 자일 테지.”

사실 노인은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던 초대 각성자 중 하나였으나, 천마는 그저 던전 재료를 몰래 빼돌려 술이나 담그는 밀주업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노인장…….”

문득 천마는 술을 말던 노인이 때때로 눈에 힘을 주며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 곳을 빤히 응시하는 노인의 눈빛이 썩 기분 좋지 않았다.

“노안이 심하게 왔나 보군.”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천마의 양 뺨은 취기로 인해 발그레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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