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31화 (31/285)

제31화. 각성자 김지환 (3)

“나, 죽는 건가.”

직감적으로 든 생각.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렸다.

뭐, 벌레처럼 사느니 이렇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문득 보고 싶었던 얼굴이 떠오른다.

늘 곁을 지켜주었던 연인의 얼굴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잊고 살라던 사랑스런 지향이의 얼굴이.

‘내가 어찌 널 잊겠어.’

그가 던전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지향이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쌓았던 추억이 이 던전 지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비록 미등록 각성자가 되었어도, 던전을 떠돌며 지향이와 함께했던 흔적들을 떠올렸다. 김지환은 그렇게 살아갔었다.

-밥 먹고 가.

문득 지향이의 모습이 엄마손 백반집의 이모 얼굴로 변했다.

돈은 없어도 꼭 밥은 먹고 가라며… 지향이와 닮은 미소를 보이던 이모님의 얼굴이.

“젠장!”

김지환은 부러질 듯한 팔을 다시 위로 치켜들었다.

“협회에서 올 때까진 버텨야… 죽어서 지향이를 볼 면목이 설 것 아니냐!”

콰직!

뼛속이 흔들리고 내장이 바스러지는 고통이 계속되었지만 두 팔을 내리지 않았다.

“씨발. 더 쳐봐!”

피를 흘리면서도 웃으며 소리쳤다.

얼마나 쾅쾅 소리가 흘러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버티고 또 버텼다.

“덤벼… 덤비라고.”

입을 벌리자 이젠 덩어리진 피떡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이제 죽는 건가?

지향아, 그래도 마지막은 좀 괜찮았지?

희미하게 웃으며 두 팔을 내리려던 찰나.

“권마칠식, 승풍항룡!”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두 팔이 거뜬해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에 힘을 줬지만, 시야가 흐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 * *

“흠.”

필드를 내리치던 라르바 킹의 다리를 쳐낸 천마가 쓰러진 김지환을 내려다보았다.

“벌레는 아니었나.”

그때 승풍항룡에 의해 뒤로 벌러덩 쓰러져 버린 라르바 킹이 분노한 듯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키이이이이!

그 순간, 하늘에 떠 있던 수천 마리의 라르바가 금이 간 필드를 부수기 위해 일자로 정렬했다.

그리고 그것은 검은 시체들로 만든 검고 긴 거대한 창이 되었다.

“재미있군.”

천마는 낮게 웃으며 실드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자 라르바 킹이 놀란 듯 싯누런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마물, 이걸 부술 필요 없다. 본좌는 절대 안으로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크흐흐흐.

라르바 킹이 낮고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일렬로 서 있던 라르바들이 천마의 몸을 향해 쏘아져 오기 시작했다.

“천마대능력!”

파앙!

천마의 몸에선 강력한 힘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 막강한 힘은 뼈와 살을 뒤틀리게 만들었지만, 천마는 덤덤히 고통을 받아들이며 권법을 펼쳤다.

“권마칠식, 망아동쇄(忘我同碎)!”

우뚝 선 천마의 두 주먹이 전동 드릴처럼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망아동쇄의 일격엔 강력한 회전력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적을 파괴하면 파괴할수록 더욱 위력이 강해진다.

파파파파파팍.

콰우우우우!

천마의 두 주먹에서 주변으로 퍼져나오는 나선형의 강력한 바람은, 쏟아지는 수천 마리가 넘는 라르바의 몸체를 모조리 가루로 만들었다.

후두두두둑.

하늘을 까맣게 물들였던 라르바를 모두 파괴시키자, 천마의 두 주먹이 회전을 멈추었다.

“생김새만 그럴 듯하지 내실은 없군.”

수천 마리의 라르바를 물리치고도 평온한 천마의 얼굴을 보자, 라르바 킹은 크게 포효했다.

쿠어어어어!

“어헉!”

그 엄청난 소리에 쓰러져 있던 김지환이 다시 눈을 떴다.

“이게 대체…….”

거대한 라르바 킹의 발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시야는 흐릿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익어 보이는 등짝이었다.

‘어디서 봤는데…….’

김지환의 시야는 다시 흐릿해졌다. 정말, 어디선가 보았던 뒷모습이었다.

“마화열극지!”

천마의 외침과 동시에 시뻘건 불줄기가 라르바 킹의 다리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초합금보다도 강하다는 라르바 킹의 다리뼈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그래도 크군.”

다리뼈가 잘려 나갔다고 해도 라르바 킹의 몸은 20미터 가까이나 됐다.

천마는 고층 높이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라르바 킹의 머리에 올라탔다.

“고루혈강기 같은 쉰내가 나는 걸 보니, 네놈도 불사 어쩌고 하는 존재로구나!”

괴상한 말을 중얼거린 사내의 주먹에선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위기를 느낀 라르바 킹이 재빨리 머리 위로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천마가 번개처럼 두 손을 휘젓자, 어느새 거대한 두 팔 역시 두 동강이 난 채로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천사교(天邪敎)의 무학을 이런 데다 쓰는군.”

천마가 두 주먹을 합치자 타오르는 불꽃은 어느새 검고 음유한 칼날로 변해 있었다.

“사자는 지옥으로… 천사귀문공렬참(天邪鬼門空烈斬).”

라르바 킹의 머리에 검게 물든 검날을 쑤셔 박자,

어어어어!

고통과 억울함이 뒤섞인 통한의 울음소리와 함께.

파스스스스스.

거대한 라르바 킹의 몸체가 까만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말도 안 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위험도 15,000의 마물.

단신으로 큰 마을 하나를 괴멸시킬 수도 있는 라르바 킹을 일격에 부쉈다고?

“죽지 않는다. 그 정도로는.”

또다시 정신을 잃어가는 김지환의 귓가에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도 무인이라면, 죽기 전까진 나약한 표정 따위 짓지 마라.”

갑자기 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더니,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 열기는 사방으로 흩어졌던 내장을 다시 원위치로 되돌리는 듯했고, 막혀 있던 핏줄을 시원하게 뚫는 듯한 느낌이었다.

‘힐, 힐러였어?’

1급 각성자를 능가하는 괴력을 가진 자가 치료 스킬까지 있다고?

놀라움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낀 김지환은 다리 힘이 풀려 쓰러지고 말았다.

“약해빠진 녀석.”

‘웃, 웃기지 마. 난 최선을 다했다고. 당신이 괴물이잖아.’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김지환은 마음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나도 당신과 같은 힘이 있으면… 지향이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분노와 자괴감이 눈을 타고 흐르자 희미한 그림자가 말했다.

“뭐, 이곳을 혼자서 지킨 용기는 인정해 주지.”

뒤를 이어 경건하고 엄숙한 목소리가 김지환의 머릿속을 울렸다.

“네놈도 이번 일로 느꼈겠지. 죽음과 맞닿은 사투(死鬪)는 무인의 육체와 정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죽음과 닿아 있는 싸움은 육체와 정신을 성장시킨다…고.’

던전에 매일 들어와 피에 젖은 길을 걸어가는 각성자들.

저 그림자의 말대로라면, 던전은 전장이며 각성자들은 전사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싸움을 반복하는 각성자들은 매일매일 자신을 성장시켜야 했다.

“그런 거였나.”

김지환은 깨달음과 후회가 뒤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

다시 눈이 감긴다.

그리고 그것이 김지환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 * *

며칠 후, 엄마손 백반집 내부.

-실드경계지역에서 숨진 각성자들은 협회 조사과 소속의 3급 각성자 성경하 씨와…….

-히든몬스터 등장으로 실드경계지역 일부가 파손된 것을 확인한 협회에서는 원인을 조사하고 있으며…….

-실드를 부순 히든몬스터를 홀로 막고 있던 숨겨진 영웅, 김지환 씨는 4년 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각성자 등록이 취소된 상태였으나 이번 일로 협회에서는 김지환 씨를…….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식당 내부에 울려 퍼지고 있었고, 각 테이블에는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머리에 먼지가 붙은 거구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천마였다.

“주인장. 생선구이 백반 하나, 제육 백반…….”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얼마 후 천마가 앉은 테이블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올려졌다.

숟가락을 집어 든 천마가 밥을 크게 뜨는 순간,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지환이었다.

“이모.”

“어머, 총각!”

이모는 활짝 웃으며 김지환을 반겨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뉴스에 온통 총각 이야기야! 깨진 실드를 막아낸 숨겨진 영웅이라고. 협회에서 포상금도 주고 각성자로 재등록도 해준다며?”

“아, 네에.”

“그런데 어디 가? 웬일로 옷을 다 빼입고. 협회로 가는 거야?”

이모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자 김지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 오늘 고향으로 내려가요.”

“응? 고향? 아니, 갑자기 왜?”

“각성자 일은 당분간 관두려고요.”

“무슨 소리야, 그게?”

고개를 저으며 웃던 김지환은 품속에서 두툼한 돈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지금까지 밀렸던 외상이에요.”

“됐어. 가져가. 이런 거 필요 없으니까.”

“안 돼요. 받으세요. 그래야 제가 다음에 이모한테 놀러 오죠.”

활짝 웃은 김지환은 고개를 90도로 숙여 꾸벅 인사했다.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이모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각성자들의 귀감, 도시를 구한 영웅이라 칭송받는 김지환이다. 지금껏 고생만 하다가 이제야 성공 길이 열렸는데, 떠난다니?

“하루빨리 이곳에서 다시 각성자 일을 하고 싶어 했잖아. 대체 왜?”

“나중에 제대로 강해지면 등록하려고요. 매일매일… 살아남을 수 있도록.”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모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밥이라도 먹고 가. 얼른 차려줄게.”

“아니에요. 차 시간이 다 되어서요.”

김지환은 다시 한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이모.”

“총각.”

“건강하세요. 꼭.”

이모는 대답 대신 따스하게 김지환을 안아주었다.

30년 전 발생한 던전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그녀는, 줄곧 밥 먹으러 오는 김지환을 아들처럼 생각했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총각도 항상 건강해야 해.”

“네.”

하루 사이에 부쩍 커버린 듯한 김지환. 그는 씩씩한 모습으로 다시 백반집을 나갔다.

“제대로 강해져서 돌아온다라.”

TV를 바라보며 우물우물 밥을 씹고 있던 천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인이 되어서 돌아오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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