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천마의 자취방 (2)
천마는 이사를 완료했다.
애당초 이사랄 것도 없었다. 그의 짐이라곤 몇 가지 작업복과 신발, 그리고 인테리어 서적이 전부였으니까.
게다가 옥상에는 튼튼한 평상과 여러 가지 화분들이, 옥탑방엔 TV와 냉장고, 세탁기 같은 필수 가전들이 옵션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다만 불편한 것은 식사였다.
매장의 창고 방에 지낼 땐, 저녁은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시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드 경계에 딱 맞닿아 있는 이 건물까지 음식을 배달해 주는 곳은 없었다.
“이사할 때는 짜장면이 국룰인데.”
승합차 트렁크를 닫은 장채원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는 건 각성자 전용 편의점뿐이네.”
세이프던전 지역과 붙어 있는 이 지역은 각성자들을 위한 24시간 편의점이 있다.
그곳엔 간단한 음식뿐만 아니라 각성자들에게 필요한 약품들이나 무기, 그리고 던전 아이템의 환전까지 겸하고 있었다.
“저곳에서도 음식을 파는 것 같은데.”
“저기서 파는 건 음식이라기보단 식량에 가까워. 맛도 없고 칼로리만 높은 걸 파니까. 안쪽에선 유물뿐만 아니라 몬스터의 부산물도 거래하기 때문에 괴상한 냄새도 난다고.”
고개를 저은 장채원은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무명에게 말했다.
“천마를 잘 부탁해. 이제부터, 네가 알려줘야 할 게 많을 거야.”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정수기 사용법부터 변기 사용법까지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참, 이것도.”
그녀는 품속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작은 카드를 내밀었다.
천마의 한 달 식비와 차비를 넣어둔 체크 카드였다.
“이거, 카드라는 거야. 종종 본 적이 있지?”
“점주가 지불 수단으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닌가.”
“맞아. 이제부터 현금 들고 다니지 말고 이 카드를 쓰면 돼. 버스 탈 때나 밥집, 편의점 등등 모든 곳에서 이걸 내밀면 계산이 될 거야. 네 월급도 여기로 들어올 거고.”
장채원은 웃으며 말했다.
“아껴 써. 필요할 때만 쓰고. 잔액은 무명이 잘 확인해 줄 거야. 뭐, 카드가 없을 땐 무명이 결제하는 것도 가능하니 걱정 말고.”
카드를 내려다보던 천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대체 이 얇은 물건에 어떻게 돈을 넣은 건가.”
“음, 그게…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은행에서 알아서 돈을 그곳에 넣어줘.”
천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럼 전장(錢場:은행)에선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 얇은 곳에 돈을 넣는 건가.”
이 녀석. 평소에 쓸 때는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더니, 막상 자기가 쓸 때가 되니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리고 이걸 갖다 대는 것만으로 어떻게 계산이 되는 거지. 본좌는 도무지 모르겠군.”
장채원은 입맛을 다셨다.
은행 업무나 카드 결제 시스템에 대한 걸 알지도 못할뿐더러, 안다고 해도 제대로 설명해 줄 자신이 없었다.
“그건… 나중에 나노봇에게 물어봐.”
“알겠다.”
천마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장채원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난 갈게. 푹 쉬고 내일 출근 잘해. 이제 버스나 지하철 타야 하니까.”
“참, 버스라는 거 말이다.”
천마는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차량들을 가리켰다.
“굳이 저것을 탈 생각은 없다. 경공을 펼치면 더 빠르게 출근할 수 있을 테니까.”
“안 돼. 그러다 협회 같은 데서 불시 검문이라든가, 각성자 신분증을 요구하면 어쩌려고.”
“날파리들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장채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능한 이 세계의 방식을 따라줘.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면 영영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없을 거야.”
“으음.”
간곡한 표정을 짓는 장채원을 응시하던 천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혼자 산다는 게 쉽지 않아. 앞으로 내가 없이도 잘 헤쳐나가야 해.”
“물론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천마의 눈은 신나 보였다.
‘처음에 자취할 땐 다 저러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천마가 느낄 해방감과 행복을 짐작한 장채원이 픽 웃었다.
“오늘부터 이 세계 자취 생활을 마음껏 즐겨봐.”
* * *
“흐음.”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을 바라보던 천마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엔 복복 인테리어 매장에 전시된 인테리어 책자들이 통째로 옮겨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장채원이 집들이 선물로 준 새 책자들까지 꽂혀 있었다.
<간단한 재료들로 만드는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적힌 서적을 꺼내든 천마는 방 안에 놓여 있는 커다란 교자상 앞에 앉았다.
[천마 님. 또 책을 읽으시려고요?]
“그렇다.”
충전스테이션에 둥그런 몸을 뉘고 있던 무명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TV라도 시청하는 게 어떨까요. 이곳엔 창고 방에는 없었던 위성 TV가 설치되어 있으니까요.]
“TV라.”
더러 식당에 설치된 TV를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천마의 눈에는 의미 없는 말을 떠벌거리는 느낌이라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관심 없다. 이상한 이야기만 떠들더군.”
[천마 님이 보신 건 대부분 국내외의 크고 작은 사건을 알려주는 뉴스입니다.]
“음?”
[TV엔 다양한 채널과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시청하는 것만으로 즐겁거나, 혹은 꽤나 좋은 정보 등을 알려주지요.]
“정보…….”
천마가 흥미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무명은 재빨리 교자상 위에 올려진 검정색 물건을 가리켰다.
TV 리모컨이었다.
[이 물건으로 TV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사용법을 알려드릴까요?]
“흠.”
[천마 님이 원하는 채널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여긴 천마 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천마 님 전용 TV이니까요.]
전용(專用).
남과 공동으로 쓰지 않고 혼자서 쓰는 것. 혹은 특정한 사람만이 쓰는 것.
마도의 하늘이라 불린 이후, 천마는 단 한 번도 타인과 함께 물건을 공유해 본 적이 없다.
신발부터 젓가락 하나까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천마 전용으로 새로 맞춰졌다.
“본좌 전용… 이라고?”
마음에 드는 단어가 나오자 천마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한번 사용해 줘야겠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충전스테이션에서 펄쩍 뛰어오른 무명이 차근차근 설명해 준 덕에, 천마는 TV 리모컨의 사용법을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었다.
한 시간 후.
“저런 호로 쌍놈의 자식이 있나!”
어느새 인테리어 서적을 던져둔 채, TV 연속극에 푹 빠져 있던 천마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저놈의 간악한 면상을 반드시 기억해 두겠다! 그리고 머지않아 본좌가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이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아침 드라마에 익숙한 주부들도 혀를 내두른 막장 중의 막장 드라마라는 것도 모른 채, 천마는 분노에 떨고 있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무명은 두 눈이 흐뭇하게 번뜩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쭉 책만 읽거나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것보다는, 저렇게 드라마를 보며 열을 올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쿠웅.
그런데 그 순간, 건물이 낮게 진동하더니 먼 하늘에서 희미한 폭음 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퍼엉. 콰앙. 끼이이이.
TV에 집중하고 있던 천마는 성가신 소음이 계속 들려오자 눈썹을 찌푸렸다.
“으음.”
꾹 참고 계속 TV에 집중하려 했지만, 연달아 들려오는 소음에 결국 천마는 짜증이 폭발했다.
“대체 이 야밤에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냐.”
벌떡 일어난 천마가 옥탑방 밖으로 뛰쳐나갈 무렵.
빰바바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방송국 로고가 커다랗게 뜨는 TV 화면으로 바뀌더니 단정한 양복을 입은 아나운서의 모습이 보였다.
-속보입니다. ●●시 세이프던전에서 각성자들의 실수로, 히든몬스터인 ‘기간트 펩’이 방사되었습니다.
-현재 실드경계지역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입니다. 이에 대한각성자협회에선 급히 상급 각성자들을 모아…….
바깥으로 나온 천마가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혈염광휘가 맺혀 있는 그의 눈동자는 매보다도 뛰어난 시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둠을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었다.
“음?”
하지만 굳이 어둠을 꿰뚫어 볼 필요도 없었다.
천마의 눈앞엔 대략 80척(:약 25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지네가 몸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긴급 방송에서 나온 위험도 1만 급의 마물, 기간트 펩이었다.
“저건… 흑오공이 아닌가.”
이 세계의 마물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천마는 기간트 펩을 그저 무림에서도 볼 수 있는 거대 흑오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천마로서도 80척에 가까운 흑오공은 들어본 적이 없다.
쿠웅! 콰앙!
천마의 머리 위까지 솟은 기간트 펩은 기다란 앞발로 연달아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둔탁한 소리만 들릴 뿐,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넘어오려고 하는군.”
던전 밖을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은 인간들을 노린다.
기간트 펩 역시 본능적으로 세이프던전 지역에 둘려진 투명한 보호막을 부수고, 인간들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흠. 저 정도 크기라면 못해도 1,000년은 넘었을 것 같은데.”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기간트 펩을 올려다보던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응당 영물이라면 내공을 증진시키는 내단을 갖고 있기 마련이니까.
[기간트 펩. 위험도 1만에 근접하는 몬스터입니다. 위험도에 비해 출현 조건이 간단한 데다가, 마석이라는 고가의 유물을 품을 확률이 높아, 1급 각성자들이 종종 세이프던전에서 불러들이는 히든몬스터입니다.]
어느새 밖으로 따라 나온 무명이 천마의 어깨로 올라탔다.
[하지만 세이프던전 초입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아마 실력 없는 각성자들이 과욕을 부린 것 같군요. 감당하지 못하고 바로 도망간 것 같습니다.]
쿠웅. 콰앙!
경계지역까지 온 기간트 펩은 날카로운 앞발로 연달아 실드를 내리쳤다.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실드에서 푸른 광채가 번뜩였다.
지이이이익.
날카로운 앞발이 실드에 닿을 때마다 번뜩이는 푸른 광채가 점차 약해졌다.
기간트 펩의 앞발 힘은 대단하여 점차 실드를 약화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 다들 도망갔군요.]
실드경계지역에 딱 맞닿아 있는 옥탑방.
이곳은 도심을 뚫고 들어오려는 몬스터들을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는 특등석이었다.
문제는 실드가 부서지는 순간, 가장 먼저 몬스터의 밥이 된다는 점이었지만.
지지지직. 퍼억.
마침내 실드의 한 부분에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순간 기간트 펩이 금이 간 실드 부분에 머리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감히 본좌의 공간을 침범하려 하다니.”
몸을 웅크린 천마가 공력을 끌어 올리자 눈동자에서 태양과도 같은 혈염광휘가 솟구쳤다.
“오늘은 네놈을 잡는 것으로 연공(練功)을 대신하지. 천마대능력!”
파앙.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리자 붉은 안개가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곧 천마가 낮게 몸을 웅크리자 무명이 황급히 바닥으로 뛰어 내려갔다.
“권마칠식…….”
단숨에 실드를 통과해 지네의 머리 위까지 튀어 오른 그가, 벼락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천수공파!”
* * *
“뭐야? 이거…….”
협회에서 보낸 던전방위팀의 1급 각성자 팀원들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비볐다.
실드를 부수고 있다는 기간트 펩이 경계지역 바로 앞에서, 머리가 터진 채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스킬을 사용했길래 기간트 펩의 머리가 박살 나 있냐?”
등에 커다란 대검을 꽂고 있는 이진혁은 박살 난 기간트 펩의 잔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간트 펩의 외피는 강철보다 단단하며, 특히 머리 부분은 더욱 튼튼해 티타늄 합금에 버금갈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그 기간트 펩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져 있다니…….
“팀장님. 유물은 그대로 있는데요?”
이진혁은 머리에서 빛나는 오렌지빛 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던전방위팀장, 박명준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급 각성자 팀이 이 도시에 있나 보군. 기간트 펩은 장물로 처리하기 힘드니까 그냥 두고 간 것 같은데.”
때때로 실력 좋은 각성자들 팀이 탈세를 위해 허가를 받지 않고 던전에 진입하는 경우가 있다.
“뭐, 유물까지 두고 갔으니 놔두자고. 그놈들도 좋은 일 한 거니까.”
이진혁이 들고 있는 기간트 펩의 유물을 회수한 박명준이 팀원들에게 소리쳤다.
“자자, 철수하자고.”
팀원들이 차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박명준은 기간트 펩의 머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단숨에 기간트 펩의 머리를 으깨버릴 각성자 팀이면,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을 정도인데… 대체 어떤 팀이 온 건지 모르겠군.”
* * *
쏴아아아.
옥탑방으로 돌아온 천마는 욕실에서 누런 체액이 묻은 손을 닦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묵었길래 내단이 돌이 되어 있나.”
손을 깨끗이 닦은 천마는 울적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공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내단을 얻을 줄 알았건만, 막상 흑오공의 머리엔 내단이 아닌 누런 돌덩이가 들어 있었다.
혹시 몰라 이빨로 깨물어 보았지만, 쇳덩이보다도 단단했다.
결정적으로 내단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영기(靈氣)가 없었다.
“1만 년을 살아도 굳지 않는다는 내단이, 돌이 되다니. 이 세계의 영물들은 몇만 년은 살았단 말인가.”
툴툴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 천마.
그사이 TV는 어느새 연속극 대신 예능프로로 바뀌어 있었다.
“뭐냐. 왜 이상한 걸로 바뀌어 있나.”
[프로그램이 끝난 겁니다.]
“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TV를 끈 천마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돌이 된 내단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단이라…….”
작게 중얼거리던 천마는 밖에 있는 평상으로 나가 가부좌를 틀었다.
“그냥 운공이나 해야겠군.”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던 천마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머릿속엔 무림에 널려 있었던 수많은 영물들의 내단이 떠올랐다. 피와 체액으로 젖어있는 내단의 모습이…….
“그들도 인간과 같은 생명이라고!”
순간, 이무기 내단에 대해 이야기하다 펄펄 뛰었던 장채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크흠.”
다시 눈을 뜬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세계에선 내단 따윈 기대하면 안 되겠어.”
낮게 툴툴거린 천마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 운공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천마가 옥탑방에 살고 나서부터는, 이 부근은 영지, 아니 신지에 가까울 만큼 마물이 없는 안전한 동네가 되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