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무명의 보고서 (1)
띠리링.
책상에 놓여 있는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장채원은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
턱을 괸 채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채원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의심암귀(疑心暗鬼)…라.”
의심암귀.
열자(列子)의 설부편(說符篇)에 나오는 이야기로, 의심하면 없는 귀신도 생긴다는 뜻이다.
즉, 그릇된 선입견 때문에 사람을 잘못 판단하는 경우를 말한다.
“편견이라고?”
장채원의 휴대폰에 띄워진 것은 무명이 보낸 천마의 행동과 성격에 대해 적어놓은 빽빽한 분석 보고서였다.
그리고 보고서 말미에는 의심암귀라는 단어와 함께 이와 같은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다.
-주 사용자이신 장채원 님께서 영지에 관한 긴급한 사안이라 판단하셨기에, 공동 사용자인 천마 님의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는 천마 님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정보도 제공해 드릴 수 없음을 양지하시길 바랍니다.
이 짧은 글에 담긴 의미는, 장채원에 대한 명백한 ‘책망’이었다.
무명의 보고서에 의하면 천마는 그저 남들과 생각과 사상이 다른 인간일 뿐, 악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계인 무명만이 어떠한 편견 없이 천마를 대하고 있었다.
타인에게 무심하고 스스로를 자존자대(自尊自大:자기를 높게 여김)하는 행동마저, 당연시하고 있을 만큼.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심지어 예전에 있었던 던전 발견 포상금을 고인물 팀에게 양보한 이유도, 그저 그 노인들이 우연히 눈에 띈 것뿐이라 한다.
미등록 각성자 신분으로 인해 빠른 던전 등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천마 님은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본인의 행위는 모두 옳다는 매우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일이 드물고, 양심의 가책 또한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인물에겐 흥미를 느끼고 깊이 관찰합니다.
휴대폰에 적힌 무명의 보고서를 읽던 장채원이 눈을 깜빡였다.
-천마 님에겐 도덕적 원리나 현대의 상식이 통하지 않으며, 무력이나 금전을 매우 중시합니다. 또한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를 갖고 있으며 약자를 경멸합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오직 자신의 이익이 최대화되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타인의 상황이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힘을 남용하지 않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목적과 수단 사이에서의 합리성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타인의 것을 갈취하거나 약자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말이야, 이게?”
휴대폰을 내려놓은 장채원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좋은 놈이라는 거야, 나쁜 놈이라는 거야? 도무지 앞뒤가 맞질 않잖아?”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장채원이 의자에 뒤로 몸을 젖혔다. 쓸데없이 장황한 무명의 보고서가 오히려 더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으음.”
턱을 괸 채 한참 동안 고민하던 장채원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의심암귀라는 말을 쓴 건가? 내가 헷갈려 할까 봐?”
결국 이래도 저래도 무명은 천마를 상당히 ‘좋은 놈’ 쪽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생각만 엄할 뿐, 실제로 나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건가.”
-신뢰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인지 한번 확인해 보려고 하는데, 나노봇을 동행시켜도 될까요?
장채원은 은랑신의 신뢰를 가기 전, 미리 양해를 얻고 무명을 동행시켰다.
게다가 일이 끝났을 때 은랑신은 장채원에게 ‘좋은 일꾼을 뒀군.’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 저쪽에선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았는지 몰라도 이곳은 평화롭잖아. 점점 적응을 시키면서 타이르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불현듯, 장채원은 날이 갈수록 천마가 조금씩 변화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래. 내일부터는 조금 더 신경 쓰면서 잘 대해줘 보자.”
왠지 천마에 대한 미안함이 불쑥 솟구친 장채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일도 짜장면 사줘야겠네.”
다음 날, 정오 무렵. 복복 인테리어 내부.
드르륵. 탁.
철가방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랩에 포장된 그릇들이 테이블 위로 하나둘씩 올려졌다.
마지막 투명 봉투까지 내려놓은 배달원이 고개를 숙였다.
“맛있게 드십셔!”
“수고했다.”
엉덩이 가방을 뒤적거린 천마는 만 원짜리 석 장을 배달원에게 내밀었다.
“어? 미리 계산됐는데요?”
“행하(行下:팁)다.”
“감, 감사합니다!”
방실방실 웃던 배달원은 허리가 부러지도록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통도 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장채원이 입을 벌렸다.
“음식이 삼만 원인데 팁으로 삼만 원을 줘?”
젓가락을 뜯던 장채원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천마가 엄숙한 눈빛을 보였다.
“본좌의 지위와 품위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 행하는 아무것도 아니지.”
장채원을 바라보던 천마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본좌에겐 평생 동안 돈을 물 쓰듯 써도 마르지 않을 재산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선 월급쟁이잖아.”
“임시일 뿐이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채원의 시선을 피한 천마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도 작장면인가? 본좌에게 약속한 열흘은 이미 지났을 텐데?”
비닐을 집어 올리던 장채원은 머쓱한 표정으로 코를 쓱 훔쳤다.
“그냥.”
천마가 그릇의 비닐을 벗기자 윤기가 흐르는 노란 면발이 보인다.
소스가 담긴 그릇을 뜯어내자 하얀 김과 함께 양파와 고기가 듬뿍 들은 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젓가락을 뽑아 든 천마는 간짜장 소스를 그릇에 부었다.
그리고 고춧가루를 듬뿍 뿌린 후 아주 섬세한 동작으로 소스와 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반숙 프라이를 터뜨려 소스와 면발을 아주 크게 한입 떠먹었다.
“후루루룩.”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장채원도 침이 고였다.
숟가락을 집은 그녀는 접시에 놓인 볶음밥을 크게 떠서 먹었다.
“우물우물.”
천마의 식사 방법이 매우 독특했다.
입안에 면을 가득 욱여넣은 뒤 더 이상 잘게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씹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그녀였지만, 천마에 대한 미안함 탓인지 관심이 콸콸 넘치는 상태였다.
“크흠.”
헛기침을 한 장채원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씩 먹는 게 낫지 않아? 왜 왕창 입에 넣고 오랫동안 씹는 건데?”
“뭔가 피해를 줬나.”
“아니, 아니. 그냥 궁금해서. 조금씩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나 싶어서.”
“오랜 버릇이다. 이렇게 음식을 먹으면 포만감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지.”
“포만감을 오래 느끼고 싶다고? 왜?”
면을 다 씹어 넘긴 천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좌는 만마집궁에 들어가기 전까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비럭질조차 하기 힘든 탓에, 수로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거나 쥐나 벌레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지.”
“뭐?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저토록 우람한 체구를 지닌 천마가 거지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니.
윤기 나는 간짜장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허기는 메워지지 않았다. 기근이 계속된 탓에 쥐나 벌레조차 씨가 말랐으니까. 그러다 오래 씹으면 더욱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숟가락을 들고 있던 장채원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미안, 괜한 걸 물어봐서.”
“괜찮다.”
천마의 얼굴엔 희로애락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본인의 비참한 과거사조차 무관심한 표정으로 말하는 천마.
그제야 무명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 나노봇보다도 더 천마에게 무심했구나.’
다시 우물우물 간짜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장채원은 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내 볶음밥도 한번 먹어볼래? 이것도 맛있어.”
“괜찮다. 이걸로 충분하다.”
“근데 짜장면 안 질려? 하루에 한 번은 짜장면 먹잖아.”
“질릴 리가 있나. 이렇게 맛있는 것을.”
천마는 다시 진지하게 짜장면을 먹었다. 그 모습에 장채원은 픽 웃음이 나온다.
평소라면 ‘이상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할 텐데, 지금 보니 저 무뚝뚝한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구나.’
순간 장채원은 어제 보았던 의심암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편견.
그것은 똑같은 사람을 마귀로 보이게도 하고, 천마로 보이게도 할 수 있는 무서운 말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장채원은 천마를 차에 태우고 인근의 어느 아파트로 향했다.
“여긴 어딘가.”
차에서 내린 천마가 눈을 껌뻑거리자 장채원이 씩 웃었다.
“저번에 계약한 인테리어 시공 현장이야. 아, 물론 신뢰는 아니고 평범한 공사 의뢰.”
“철거인가?”
“아냐. 곧 있으면 김 기사님이 타일 붙이러 올 거야. 같이 도우면서 타일 시공 배우라고.”
“타일?”
“그래. 전에 약속했잖아. 미리 부탁해 놨으니까 친절하게 가르쳐 줄 거야.”
평소와는 다른, 나긋나긋한 장채원의 표정과 태도에 천마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군.”
“뭐가?”
방긋방긋 미소 짓는 장채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상급요괴들은 인간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요신에 가까워진 만큼, 특권 의식이나 우월감에 도취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타일 기사인 김찬원은 일반적인 상급요괴와는 조금 달랐다.
풍령일족.
바람을 부리는 요괴 중에서도 가장 최상위의 힘을 가졌음에도 인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하급요괴들마저 기피하는 타일 시공 기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타일 작업은 덧시공이 있고 철거시공이 있어.”
주방 타일을 가리킨 김찬원은 자신의 등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천마에게 말했다.
“덧시공은 말 그대로 타일 위에 다시 타일을 한번 더 붙이는 시공이여. 대신 아무 데나 할 순 없고, 기존 타일 면이 단단히 부착되어 있어야 가능하지.”
김찬원은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덧시공의 장점은 비용이 저렴하고 시공이 빠르다는 것이여. 즉,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지.”
“단점은?”
아직 환갑도 안되어 보이는 새파란 천마가 반말로 되묻자, 김찬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지.’
어젯밤 장채원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린 그는 입맛을 다셨다.
“뭐, 단점이라면 덧붙인 만큼 공간이 조금 줄어든다는 것이제.”
“그렇군.”
“그럼 이곳에 덧시공을 해야 할까? 아니면 철거시공을 해야 할까?”
김찬원의 질문에 천마는 주방 타일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철거시공이다.”
“응? 이렇게 튼튼하게 잘 붙어 있는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다.”
주방 타일 앞에 우뚝 선 천마는 낮게 몸을 웅크렸다.
“기왕 시공하는 거 깨끗하게 철거 후 시공하는 게 좋겠지. 안 그런가?”
“흠. 그거야 선택 사항이긴 한데.”
“그럼 본좌가 선택하지.”
“무엇을?”
천마는 대답 대신 몸을 웅크렸다.
“권마칠식, 승풍항룡!”
콰앙! 콰앙!
천마의 주먹에 닿을 때마다 타일이 박살 나고 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설마, 저 녀석이?’
천마가 타일을 부수는 모습을 보던 김찬원은 며칠 전, 철거 시공자 박 씨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렸다.
“저번에 어떤 현장에 갔더니, 웬 미친놈이 철거한답시고 오만 군데에 어류겐을 날리더라니까?”
“으응? 어류겐이 뭐여?”
“왜 있잖여? 고오키가 쓰는 필살기. 고오키 몰라?”
당시 김찬원은 어류겐이니 고오키니 하는 박 씨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펄쩍 뛰면서 타일을 과자처럼 부수는 모습을 보자,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격투 게임의 캐릭터를 대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악마같이 생긴 게임 속 캐릭터를 말하는 거였잖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