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9화 (19/285)

제19화. 약선동 능웅신 (1)

만마집궁은 신마대제 이후, 마도십전(魔道十殿)이라는 열 개의 파벌로 나뉘어 세력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마도십전의 직계제자 중 한 명이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때문에 만마집궁은 정파의 견제뿐만 아니라 마도십전의 후계자끼리 벌이는 암투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름조차 없이 버려진 고아 소년이 만마집궁에 입궁했다.

무림에 나갔던 만마집궁의 장로가 소년이 절세의 무학기재라는 걸 알아보고 직접 손을 잡고 이끌어온 것이다.

“빙동으로 가겠소.”

만마집궁에 입궁한 소년은 무공 단련을 위해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빙동(氷洞)으로 들어갔다.

마고(魔庫)라 불리는 빙동은 천하마도무학과 마문대법을 집대성시켜 놓은 곳이다.

하지만 마도무학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십대마전의 무학은 제외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마고로 들어가는 이가 없었다.

“설령 빙동에 있는 모든 무학을 익혀도 십대마전의 무학은 능가할 수 없다!”

장로는 소년을 말렸다. 그의 자질이라면 충분히 십대마전의 제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건 싫소.”

소년은 오만한 말을 남긴 채 스스로 빙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십여 년 동안 벽곡단과 지하수를 먹으며 빙동에 틀어박혔다.

“고금제일마인이 탄생했다!”

빙동에서 나온 소년은 어느새 건장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빙동에 있는 모든 무학과 대법을 연성했다. 뿐만 아니라, 마도 최고 무공을 지닌 십대마전의 후계자들마저 일수에 격파했다.

“오오, 천마시여!”

만마집궁의 모든 마인들은 신마대제에 버금가는, 아니 고금제일마인의 경지에 이른 그를, 하늘이 내려준 천상천의 마인이라 하여 천마라 불렀다.

“천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복복 인테리어 내부.

창고에 쭈그린 채 공구함 청소를 하고 있던 천마는 벼락같은 호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점주로군. 무슨 일인가.”

“무슨 일?”

장채원은 쭈그리고 있는 천마의 안면에 덜렁거리는 벽지 하나를 내밀었다.

“잘 바르겠다고 사정사정해서 도배일을 줬구만! 벽지가 다 떨어져서 난리가 났단 말이야!”

“아아, 그 일 말인가.”

“알고 있었어?”

“물론이다. 어젯밤에도 매장으로 전화가 왔으니까.”

“뭐?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장채원이 눈을 깜빡거리자 천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비자가 뭘 모르고 한 연락이니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드릴을 공구 통에 넣은 천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하자 없이 완벽히 도배를 시공했다. 심지어 도배지는 삼 일 정도 후에 마른다고 고객에게 친절히 설명까지 했지.”

“근데 왜 벽지가 다 훌러덩 떨어졌다고 연락이 온 거야?”

“고객의 말에 의하면, 기존에 붙여져 있는 벽지가 알고 보니 실크 벽지라고 하더군.”

순간 창고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실크 벽지 위에는 합지 도배가 안 붙잖아? 거기 위에다 바로 도배를 한 거야?”

장채원이 더듬더듬 말하자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 하지만 고객은 나에게 그러한 정보를 주지 않았지. 단순한 착오였던 것 같다.”

달칵.

공구 통의 덮개를 잠근 천마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고객을 원망하지 마라. 그들은 실크 벽지 위에 합지가 붙지 않는다는 걸 모르고…….”

하지만 이미 장채원의 얼굴은 옷을 찢기 전 헐크처럼 변해 있었다.

“고객을 원망하겠냐? 너를 원망하지?”

“나를 왜 원망하나.”

뻔뻔하게 고개를 돌린 천마의 옆얼굴을 본 장채원의 이마엔 지렁이 같은 핏줄이 튀어나왔다.

“고객이 실크인지 합지인지 알 게 뭐야? 네가 구별해야지!”

“구별했다. 그리고 소비자에게 획기적인 시공 방법까지 제안했지.”

“뭐?”

장채원이 손을 놓자 천마가 두 눈을 반짝였다.

“실크 벽지에 코팅된 비닐 즉, pvc 부분만 제거하면 합지와 마찬가지로 겉에 시공이 가능하다는 사례가 있다.”

몸을 돌린 그는 창고 방에 있는 벽지 인테리어 관련 책자를 그녀의 앞에 펼쳤다.

“거기다 해당 시공 현장은 벽면이 고르지 않았지. 실크 벽지를 제거한 후 다시 합지를 붙이면 기존의 속지(부직포)를 살릴 수 없다. 그래서 합지 시공으로 벽면을 고르게 하기 위해 이러한 시공법을 제안한 것이다.”

장채원은 입을 벌렸다.

벽지 기사들도 잘 모르는 전문적인 시공 지식을 천마가 알고 있을 줄이야.

“뭐야. 겉멋으로 책을 펼쳐놓고 있던 게 아니었어.”

“후후후. 본좌는 빙동에서 십만 팔천 종의 무공과 대법을 모두 습득했다. 인테리어 시공 지식 서적을 독파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럼 왜 벽지가 떨어진 거야?”

장채원의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웃던 천마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 세계, 아니 우주 안의 모든 현상에선 괴리라는 것이 존재한다.”

“뭐?”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고금 이래로 지식과 실천은 언제나 동떨어져 있지. 경험이라는 구조를 면밀히 살펴보면 결국 자신의 기호적 사상과 본성적 괴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천마가 장황한 헛소리를 늘어놓자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시공을 망쳤다는 거잖아.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의 차이라고 해두지.”

“대체 이게 뭐야. 육체노동에 천직인 얼굴을 하고선, 나보다 손재주가 더 없잖아?”

몸 쓰는 일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을 것만 같던 천마.

의외로 책벌레 스타일인데다 인테리어 시공일엔 젬병이었던 것이다.

“당장 가서 다시 하고 와야 해. 공구 챙겨!”

“알겠다.”

장채원의 외침에 천마는 군소리 없이 창고에 있는 벽지와 벽지 재단기를 꺼내 들었다.

“아아, 피곤해.”

시계를 보니 어느덧 시간은 정오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천마와 한바탕 벽지 작업을 하고 온 장채원은 찌뿌둥한 어깨를 문지르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또 짜장면 먹을 거야?”

주섬주섬 벽지를 정리하고 있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짜장면만 한 식사가 또 있는가?”

“차라리 제육볶음 정식은 어때. 좀 다른 것도 먹어봐.”

“점심 식사는 간단한 면류가 최고로 좋다. 고기 같은 건 저녁에 먹으면 좋지.”

천마의 단호한 대답에 장채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따르르르릉.

책상에 올려져 있는 골동품 전화기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화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장채원은 목을 가다듬고 원통으로 된 수화기를 들었다.

“네. 복복 인테리어입니다. 아 네네. 안녕하세요?”

나팔관에 대고 이야기를 받던 장채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네?”

며칠 후. 기분 좋은 바람이 슬슬 풀어오는 화창한 여름날.

부우우웅.

장채원의 승합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 운전하는 그녀의 옆엔 회색빛 도복을 입은 천마가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곰이라.”

조수석에 앉아 휙휙 지나치는 차들을 멀뚱히 바라보던 천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곰도 식당을 운영하는가.”

“말 조심해. 능웅(能熊)신 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 했다간 당장 쫓겨난다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던 그녀가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무슨 말인가.”

“흑곰 아저씨 말이야. 대신 청소라도 해줬어? 어떻게 그 흑곰 아저씨가 능웅 님 일을 소개시켜 줬지? 그것도 천마, 너를 딱 지명해서 말이야.”

일전에 들어왔던 전화는 뱀파이어 남자의 아랫집에 살던 흑곰 아저씨가 신뢰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말인즉슨 네 싹싹함과 시공의 깔끔함에 감동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돼? 네가 한 거라곤 벽지 뜯어주고 윗집에 배관 뚫어준 게 전부잖아?”

“아아, 그것 말인가.”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흑곰의 말을 들어보니, 윗집 흡혈귀는 단 한 번도 사과를 하러 아랫집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강호의 도리를 알려주고 온 것뿐이다.”

“강호의 도리?”

“그렇다. 피해를 줬으면 그만큼의 상응하는 보상과 진심 어린 사과. 그리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하는 것이 원칙 아닌가?”

“피해보상은 해줬잖아. 물론 집주인이 해준 거지만.”

팔짱을 낀 천마는 당시를 상상하는 듯 두 눈이 깊어졌다.

“피해보상은 당연한 거다. 하지만 아랫집 흑곰은 처자식이 있는데도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했고, 보상해 준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묵묵히 참고 있었더군.”

“그래서?”

“흡혈귀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더불어, 피해를 받은 흑곰과 그의 처자식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종용했을 뿐이다. 아, 그리고 핏물에 의해 오염된 부분도 직접 청소하라고 지시했다.”

장채원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시건방지긴 해도 뱀파이어인데… 그렇게 망신을 줬다고?”

“망신이라니? 청소를 시키는 게 왜 망신인가.”

“그 양반, 꽤나 상위 요괴란 말이야. 거기다 그 짝은 엄청 자존심 강한 요괴라고.”

그러자 천마는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위든 하위든 상관없다. 잘못을 했으면 그만큼의 도리를 하는 것이 강호의 법칙이 아닌가?”

희미한 과거를 떠올리는 듯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본좌 역시 그 빌어먹을 정가 놈과 싸우다 무림성지라 불리는 무원정종(無願靜宗)를 파괴했을 당시, 막대한 배상금과 더불어 깊은 사과를 했다.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본좌가 말이다.”

“그, 그래. 그렇구나.”

장채원은 연민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사과를 하고, 걸레를 들고 열심히 청소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을 떠올리며.

장채원과 천마가 도착한 곳은 지리산이었다.

그녀는 가방을 멘 채 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숲속을 걷고 있었다.

천마는 등산복을 입은 채 열심히 걷는 장채원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파른 산길을 평지처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런데 걸음을 옮기던 장채원이 까마득한 나무숲을 바라보았다.

“역시 걸어서 산길을 오르는 건 좀 귀찮긴 하네.”

장채원이 낮게 중얼거리자 천마가 물었다.

“그럼 전에는 산길을 어떻게 올랐나.”

“그야 당연히 정령수들을…….”

천마를 바라보던 장채원이 눈을 반짝였다.

눈앞에는 정령수보다 훨씬 튼튼하고 널찍한 탈 것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크흠.”

헛기침을 하던 장채원이 천마의 어깨를 가리켰다.

“날 좀 어깨에 태우고 갈래?”

“거절한다.”

“뭐, 왜? 내가 무거울까 봐? 나 그렇게 안 무거워.”

천마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누구도 본좌의 몸 위로 오를 수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어째서?”

한 손가락을 하늘에 치켜올린 천마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본좌가 정한 무림의 법도다.”

몸을 홱 돌린 천마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야, 정말 그냥 가는 거야?”

천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채원이 입맛을 다셨다.

“저 매정한 녀석.”

물론 힘을 쓰면 금세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저 넓고 튼튼해 보이는 어깨에 올라타고 싶었다.

“좋아. 열흘 동안 점심은 간짜장하고 탕수육!”

순간 천마의 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짧은 순간 그것을 캐치한 장채원이 아랫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저번에 배우고 싶다는 타일 기술도!”

“…본좌가 정한 법도이니, 언제든 바꿀 수 있겠지.”

다시 뒷걸음질 친 천마는 충성스러운 말처럼 장채원 앞에 쭈그려 앉았다.

천마는 장채원을 어깨에 태운 채 묵묵히 걸음을 재촉했다.

온몸이 근육으로 된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장채원은 마치 재밌는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아. 진작에 이럴 걸 그랬어.”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장채원의 아름다운 산속의 풍경과 풀 내음을 만끽했다.

기분이 좋아진 장채원은 문득 바위 같은 천마의 옆얼굴을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항상 이런 식이야?”

“무슨 말이냐.”

“매정한 척을 하는 것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처음엔 진짜 삭막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냥 솔직하지 못한 스타일 같네.”

걸음을 멈춘 천마가 눈을 껌뻑이자 장채원이 히죽 웃었다.

“저번에 이무기 모자 도와줬잖아.”

“도와줬다고?”

“쑥스러워하기는.”

장채원은 웃으며 천마의 어깨를 두들겼다.

“다 봤어. 네가 그 이무기 청년 어머니 병을 치료해 주고, 혈액순환 잘 되는 엑스 키메라의 유물까지 준 거.”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그치?”

역시 내심은 따뜻한 녀석이었어.

흐뭇하게 웃던 장채원은 이어진 천마의 대답에 입가에 걸린 미소가 싸악 사라졌다.

“몸을 어느 정도 치료해 두어야, 추후에 내단을 꺼낼 수 있지 않나.”

“뭐? 뭘 꺼낸다고?”

“몰랐나. 이무기 내단은 몸에 상당히 좋은 영약이다.”

어깨에 앉아 있던 장채원은 공포영화 속 악당과 마주친 것처럼 눈빛이 흔들렸다.

“장난치지 마.”

억지로 미소 지은 장채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병 치료해 준 거잖아. 그치?”

“맞다. 본좌의 반극진기를 주입해 기혈을 뚫어주었지.”

걸음을 옮기는 천마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눈가의 주름을 세어보니 곧 있으면 내단을 생성할 나이더군. 본좌의 반극진기를 머금고 있으니 어디에 숨어 있던 찾는 건 식은 죽 먹는 일이겠…….”

퍽.

장채원의 주먹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천마는 목이 90도로 꺾였다.

“갑자기 무슨 짓인가.”

“그걸 말이라고 해? 꺼내긴 뭘 꺼내?”

천마의 어깨에서 내려온 장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너 설마, 나중에 이무기 할머니를 찾아 죽이려 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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