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6화 (16/285)

제16화. 천마와 무명의 시장 나들이

시내 번화가, 전통시장 입구 앞.

[…노란색은 5만 원, 녹색은 만 원, 누런색은 5천 원, 파란색은 천 원입니다.]

천마가 봉투에 든 돈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어깨에 타고 있던 무명이 물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을 모두 알아들으셨나요.]

“물론이다. 노란색이 가장 큰 단위, 파란색이 가장 작은 단위다.”

[…….]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들고 있던 돈 봉투를 엉덩이 가방에 다시 넣은 천마가 전통시장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일요일, 복복 인테리어 매장도 쉬는 날이다.

그리고 천마가 매장에서 일한 지도 한 달을 넘긴 날이기도 했다.

[그래도 놀랐습니다. 쉬는 날엔 창고 방에 틀어박혀 책만 보시던 천마 님이, 이렇게 외출을 다 하시다니 말입니다.]

핀잔인지 감탄인지 모를 무명의 말에 천마는 낮게 말했다.

“점주의 조언 때문이다.”

두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어제 장채원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뢰는… 어차피 알아서 나눠지는 것이고. 자, 이건 월급.”

장채원이 내민 흰 봉투에는 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노란색 지폐가 열 장, 녹색 지폐가 열 장, 누런색 지폐가 열 장, 파란색 지폐가 열 장.

총 66만 원이었다.

“이게 뭔가.”

“종종 봤잖아. 돈이야, 돈. 현금이라고.”

“돈?”

봉투를 내려다보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다.”

“뭐? 무슨 소리야? 돈이 필요 없다니.”

“점주가 숙식을 제공해 주지 않나.”

천마는 장채원의 당황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게다가 본좌 때문에 큰 손해까지 본 상태가 아닌가. 이걸 받는다면 내 체면이 서질 않는다.”

“나 생각해 주는 건 정말 고마운데, 그래도 그건 아니지.”

피식 웃은 장채원이 다시 돈 봉투를 내밀었다.

“3년간 널 공짜로 부려 먹을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널 매장 직원으로 들이지도 않았을 거야.”

“흠.”

“거절할 필요 없어. 어차피 큰돈도 아니고, 숙식 비용이랑 생필품 비용 제하고 준 거니까. 때마침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나노봇이랑 밖에 나가서 먹고 싶은 거 있음 사 먹어.”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좌는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책을 읽겠다.”

“아아, 일을 열심히 하려는 건 좋은데 그럴 필요 없어.”

하얀 치아를 드러낸 장채원이 시원스럽게 미소 지었다.

“천마, 네가 평생 이곳에 있을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 세계를 조금 즐겨보라고.”

회상을 마친 천마가 낮게 중얼거렸다.

“즐긴다기보다는, 조금은 둘러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 맞겠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고개를 가로저은 천마는 시장 내부를 거닐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고소한 기름 냄새, 먹음직스럽게 쌓인 다양한 음식들.

온갖 음식점들이 줄지어 늘어진 전통시장의 모습은 무림에서 지내왔던 천마에게도 꽤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저건 빙당호로가 아닌가.”

어느 상점의 앞에 전시되어 있는 당과(설탕으로 코팅한 과일 꼬치)를 바라보던 천마가 탄성을 질렀다.

“여기에도 있었군.”

당과를 바라보던 천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빙당호로.

거지로 떠돌던 어린 시절. 천마가 유일하게 먹어본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

지독히도 추운 겨울, 어느 비단옷을 입은 아이가 빙당호로를 먹다가 넘어져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필 오물이 가득한 수로에 빠진 빙당호로를 보고 아이가 울자, 부모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하나 더 사줄 테니 울지 말렴.”

아이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돌아갔다. 그리고 그 수로 아래에는 몸을 웅크린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오물 위에 떠 있는 빙당호로를 바라보던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바로 훗날 무림의 지배자이자 마도의 하늘이라 불리는 고금제일마, 천마였다.

[천마 님?]

또다시 회상에 빠져 있는 천마를 보며 무명이 말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감상적으로 보이는군요.]

“감상적…? 본좌가 말인가.”

낮게 코웃음을 친 천마는 당과를 팔고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 얼마인가.”

“이거? 삼천 원.”

“그렇군. 많이 팔아라.”

의외로 천마는 가격만 물어봤을 뿐,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어깨에 올라와 있는 무명은 멀어지는 당과와 천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드시고 싶으시면서, 왜 구매하지 않으신 겁니까.]

“본좌가 먹고 싶은지 아닌지를 어찌 아나.”

천마의 질문에 무명이 가느다란 팔을 꺼내 팔짱을 끼었다.

[생체 반응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천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저는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 생체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합니다.]

“누구 멋대로 본좌의 정보를 수집한다는 거지?”

천마의 목소리는 얼음 칼처럼 날카롭고 싸늘했다.

잠시 침묵하던 무명이 기계적인 말투로 말했다.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생체 정보 수집을 던전 지역 내로 제한합니다. 던전은 위험 지대이므로 생체 정보 수집 설정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흥.”

낮게 코웃음을 치자 무명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천마 님이 당과 구매를 망설이시는 것 같아 조언을 해드린 겁니다.]

“그저 본좌가 있던 세계와 같은 음식이 있어 신기했을 뿐이다.”

어린 시절, 수로에서 건져 올린 빙당호로의 맛을 떠올린 천마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씁쓸한 맛일 테지만.”

[천마 님. 당과는 과일에 겉면까지 설탕을 입힌, 단맛이라고 표기된 음식입니다.]

“본좌가 먹은 건 더러운 오물 속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남이 떨어뜨린 걸 그대로 허겁지겁 입에 넣었었지.”

긴 침묵 끝에 흘러나온 무명의 목소리엔 깊은 유감이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천마 님.]

정말 이 녀석은 단순한 기계일까?

천마는 장채원으로부터 무명이 인간의 지능적인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고성능 기계라는 설명은 들었다.

하지만 때때로 무명은 감정이 메마른 자신보다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바로 지금처럼.

[하지만 괴로운 기억은 상한 음식과도 같다고 합니다.]

“또 무슨 말이냐.”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아두면, 결국 악취를 풍기게 되니까요.]

무명은 조심스럽지만,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한 번 다시 드셔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건방진 제안이다.

마도의 종주인 본좌의 마음을 가엾게 여길 뿐만 아니라, 감히 괴로운 기억이라 멋대로 짐작하다니.

만약 무명이 기계가 아닌 사람이었다면 천마는 크게 노했을 것이다.

“됐다. 본좌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무명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 님. 이 전통시장에는 다른 먹거리도 많습니다. 원하신다면 직접 다녀온 방문자들이 평가한 맛집 중에 맛집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시장 내부엔 당과 말고도 먹을거리를 파는 상점이 많았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전을 쌓아놓고 부치는 가게. 김이 오르는 떡판을 뒤집어 떡을 썰고 콩고물을 묻히는 떡집. 손님들과 흥정하는 채소 가게와 생선 가게.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론 낯선 풍경이다.

[천마 님, 선호하시는 음식이 있습니까?]

천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무명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던전에서 했던 말보다 오늘 이 시장통에서 한 말이 더욱 많게 느껴졌다.

[들려준 말씀으론 상당한 고위직에 호사스러운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분명 식사 수준도 상당할 거라 예상됩니다만.]

무명의 물음에 천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무림을 제패한 천마.

무림인들은 그가 술 한잔을 먹어도 호사스러운 청루를 통째로 빌려 마시고, 국수 한 그릇도 최고의 숙수가 만들어낸 것을 먹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림을 제패할 때까지는 끊임없는 혈투를 반복했고, 무림 패권을 쥔 후에도 만마집궁에 틀어박힌 채 책만 읽은 인생이었다.

“…….”

그제야 천마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단 한 번도 저잣거리에 나가 느긋하게 걸어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생기 있고 활기 넘치는 시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네가 추천해 봐라.”

[네?]

“본좌는 이곳에 대해서 모르니 네가 한번 추천해 보란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무명의 목소리는 약간 신이 난 듯 보였다.

[이곳 전통시장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떡볶이입니다. 이곳엔 전국 5대 떡볶이 맛집으로 꼽히는 삼평 분식집이 있지요.]

“떡볶이가 뭐냐.”

[떡에 양념을 묻힌 음식입니다. 특히 이 삼평 분식집은 각종 매체와 맛집 사이트의 평가에서, ‘중독성 있는 최고의 떡볶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중독이라. 어떤 종류냐.”

[네?]

무명의 되물음에 천마는 코웃음을 쳤다.

“뭐든 상관없다. 본좌는 만독불침이다. 무림맹의 계략으로 만년학령사(萬年虐靈蛇)를 먹은 적도 있지.”

팔짱을 낀 천마는 먼 과거를 회상하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본좌의 몸엔 어떠한 독도 침범하지 못한다.”

[…안내하겠습니다.]

무명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전통시장 중간 부근에 있는 분식집 매장이었다.

[여기, 떡볶이 1인분만 주세요. 먹고 갈 겁니다.]

천마의 어깨에 올라탄 채 능숙하게 주문하는 무명을 보자, 분식집 주인인 할머니가 눈을 껌벅였다.

“그거 나노봇 아니우?”

“그렇다.”

“우리 집에 각성자들도 많이 오긴 하지만… 그렇게 말 잘하는 나노봇은 처음 보는구먼.”

“그런가.”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중에 판매되는 나노봇도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다곤 하지만, 실제론 던전 안내와 몬스터 도감 분석, 효과적인 몬스터 대응 방법 안내 정도를 할 뿐이다.

무명처럼 인간과 거의 흡사한 인공지능을 탑재한 나노봇은 없다는 걸, 천마 본인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 여기 1인분.”

파란 그릇에 인심 좋게 떡볶이를 담은 주인이 빙그레 웃었다.

“손님 덩치가 크셔서 특별히 많이 드렸수.”

천마가 떡볶이를 멀뚱히 내려다보자 무명이 말했다.

[거기 컵에 있는 이쑤시개로 찍어 먹으면 됩니다.]

“흠. 떡인가.”

이쑤시개를 집어 든 천마가 떡볶이 한 덩이를 찍어 입에 넣었다.

잘 익은 쫄깃한 그것을 씹자, 떡에 깊이 밴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양념이 입안을 감싼다.

천마의 혀는 지금까지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색다른 맛과 식감을 느꼈다.

[어떻습니까?]

무명은 하얀빛이 반짝이는 두 눈으로 연신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집어 먹던 천마를 지긋이 지켜보았다.

만약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분명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눈빛이리라.

꿀꺽.

마지막 떡볶이를 삼킨 천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한 그릇 더.”

이후로도 천마는 무명과 함께 전통시장 내에 있는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았다.

신선한 육회에 채소가 가득 들어간 육회비빔밥이라든가, 꽈배기과자. 즉석으로 구워주는 모둠전,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씨앗호떡. 그리고 노릇노릇 잘 구워진 닭고기에 소스가 발라진 닭꼬치까지.

천마는 무명과 함께 시장을 느긋하게 걸어 다니며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했던 다양한 간식들을 맛보았다.

“상당한 맛이군.”

마지막으로 매대에서 즉석으로 갈아주는 사과인삼주스를 쭉 들이켠 천마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들은 입에 맞으셨습니까?]

“그렇군. 괜찮은 맛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종류도 퍽 다양하군.”

천마는 흡족한 얼굴로 시장을 둘러보았다.

“본좌의 배가 허락한다면 하나씩 전부 맛보고 싶을 정도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왜 점주가 운영하는 상점 주변에는 이런 먹거리를 파는 곳이 없는 건가. 본점 근처에도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이 파는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보통 이런 음식들을 파는 매장은 먹자골목, 그러니까 이렇게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곳에 입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군.”

[그렇기 때문에 장채원 님께서도 이곳의 맛집 데이터를… 방금 했던 말은 연산 논리에 맞지 않아 발생한 오류입니다.]

순간 무명은 갑자기 경직되었다.

[프로그램이 비정상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시스템을 재시작합니다.]

무명이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천마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였나.”

아무래도 장채원은 천마가 매일 창고 방에 처박혀 책만 읽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천마가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봐 무명에게 전달한 것이다.

[천마 님.]

“말하라.”

[방금 전에 했던 말은 비밀입니다.]

천마는 피식 웃었다.

기계가 이런 실수를 하는 건가? 아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무림에서와 달리 이곳에는 다양한 먹거리를 먹으라고 종용해 주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러지.”

천마의 입가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생소하면서도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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