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15화 (15/285)

제15화. 자이언트 고구마 (2)

우우우우!

그때 멀리서 커다란 늑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변에 있는 수백 마리의 블러드 시커가 피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성가신 놈들이군.”

아무리 1급 각성자라고 해도 수백 마리의 블러드 시커가 몰려들면 일단 몸을 피해야 한다. 일 대 다의 싸움이란 생각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니.

하지만 천마는 윙윙 파리떼를 보는 듯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사사경혼마극퇴!”

사사경혼마극퇴법은 다리에 강력한 회전력을 담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몸을 회전시킬수록 파괴력이 더욱 강해진다.

허공에 몸을 빙글빙글 회전시킨 천마는 달려오는 오는 블러드 시커들을 연속으로 걷어찼다.

케에에.

퇴법에 의해 목이 꺾인 마지막 블러드 시커가 신음성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수백 마리의 블러드 시커가 쓰러진 주변은 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

[대단하시군요. 천마 님은.]

“이딴 마물은 몸 푸는 용도도 못 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천마 님의 무력이 1급 각성자보다도 웃돈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무명은 새삼 놀랍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대단하다고 느낀 건 천마 님의 정신력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각성자라도 수백 마리의 몬스터의 시신을 보고 덤덤하게 서 있는 자는 드무니까요.]

“본좌는 천마다. 무림에 있을 땐 이보다 더한 광경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곳에도 몬스터가 있었습니까.]

잠시 두 눈을 가늘게 뜬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마물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섭고 집요한 게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인간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담긴 생각을 꺼낸 듯, 천마의 눈빛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위이잉.

그때 둥글둥글한 머리를 전방위로 회전시키던 무명이 눈을 번뜩였다.

[천마 님. 동쪽 1킬로미터 부근, 크랩 피트가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던전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리로 가지.”

이백여 미터쯤 앞으로 나가자 뿌옇게 피어오르는 안개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앞으로 달려가는 천마의 눈앞엔 세이프던전과 비슷한, 폐허가 된 도심의 풍경이 보였다.

“저곳인가.”

푸른색 화살표를 쏘아내는 곳을 따라간 천마의 시선 끝에 점차 까맣게 물든 둥근 탑 하나가 보였다.

마치 거대한 쇳덩이를 박아넣은 듯한 탑에는 기분 나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꼭 굴뚝처럼 생겼군.”

까맣게 물든 던전 입구를 바라보던 천마가 미간을 모았다.

“이곳에 그 게딱지 마물이 산다고?”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입니다.]

묵묵히 서 있던 천마는 까만 공간으로 보이는 입구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후욱.

던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천마의 안면에 쏟아졌다.

동굴처럼 되어 있는 긴 통로 내부에선 어디선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흠.”

천마는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안쪽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좁았던 내부는 점차 넓어지더니 갑자기 사방이 바위로 된 넓은 공터가 보였다.

걸음을 멈춘 천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바위처럼 보이는 벽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불도마뱀입니다. 위험도 2,500의 몬스터로 몸에서 300도 이상의 불꽃을 내뿜습니다.]

그제야 던전 안에 있는 바위들 중 대부분이 주변 바위 색과 똑같이 물들어 있는 도마뱀이라는 걸 깨달았다.

크르륵.

고개를 돌린 수십 마리의 도마뱀들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천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화르르륵.

도마뱀 피부에 돋아난 미세한 돌기들에서 불꽃이 솟더니 온몸이 숯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던전 초입부터 불도마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던전은 A급 이상의 고위험 던전인 것 같습니다. 후퇴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

[천마 님이 아무리 강해도 A급 이상 던전은 상급 각성자 수십 명, 때로는 수백여 명이 투입돼야 클리어할 수 있습니다.]

화아아악.

그 순간 바위에 있던 불도마뱀 하나가 입을 쩍 벌리며 천마를 향해 시뻘건 불꽃을 쏟아냈다.

“한령빙백신공!”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오자 천마는 한 팔을 벌려 무림 최고의 빙공, 한령빙백신공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내공이 10년 수위 정도밖에 되지 않은 탓에, 천마의 손에는 아주 얇은 살얼음만이 끼었을 뿐이다.

치익.

천마의 손바닥에 불꽃이 닿자 순식간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크윽.”

화아아악.

불도마뱀이 또다시 불꽃을 쏟아내자 천마는 맞서지 않고 재빨리 몸을 빙글 돌려 불꽃을 피해냈다.

[천마 님. 억지로 돌파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곳에 자이언트 고구마가 있을 확률은 희박하니까요.]

천마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고수였으나 만용을 부리는 필부는 아니었다.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리려던 천마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지.”

이후로도 천마는 무명과 함께 가변던전 지역의 경계선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때때로 튀어나오는 블러드 시커를 제외하고는 크랩 피트나 자이언트 고구마는커녕, 던전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경계에 있는 던전은 저 불도마뱀이 있는 것뿐이잖나.”

천마가 지친 표정으로 바라보자 무명이 말끝을 흐렸다.

[죄송합니다. 분명 가변던전 지역 초입에서 크랩 피트를 보았다는 각성자들의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올라왔습니다만…….]

띠리릭, 철컥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또다시 연산을 시작한 것 같았다.

연산을 마친 듯 정상적으로 눈빛이 돌아온 무명이 앙상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 위를 매만졌다.

[가변던전 지역의 지도엔 던전의 위치가 정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분명 경계지역 부근엔 각성자들의 자취가 많이 남겨져 있습니다.]

“벌써 그 말만 네 번째다”

[죄송합니다. 다시 북동쪽으로 한 번만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젠 본좌의 방식대로 하지.”

정면에 있는 폐건물에 삐죽 튀어나온 철근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일권을 날렸다.

콰앙 소리와 함께 앙상한 벽이 무너지고 철근만이 앙상하게 서 있었다.

“흐읍!”

수도를 펴 철근을 단숨에 자른 천마는 평평한 철근을 ㄱ자로 구부렸다.

[철근으로 뭘 하려는 겁니까.]

“사악한 기운이 올라오는 장소를 찾는 본좌만의 방법이다.”

ㄱ자로 구부린 철근을 짚은 천마가 두 눈을 감았다.

“던전이라는 곳 역시 마물이 모여 있는 곳이니, 분명 사악한 기운이 올라오겠지.”

[다우징 로드(Dowsing rod: 수맥 탐지봉)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철근 막대를 든 채 두 눈을 감고 걷는 천마를 보며 무명이 낮게 말했다.

[천마 님이 하시는 행위는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겁니다.]

“꼭 마기자(魔機子)처럼 이야기하는군.”

[마기자가 누굽니까.]

“있다. 너처럼 뭐든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던 본좌의 부하가. 그 녀석도 내 비법을 보고 미신이라 코웃음을 쳤지.”

잠깐 눈을 뜬 천마는 무명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조용히 해라. 말을 걸면 본좌의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그리고 다시 눈을 감은 천마는 철근을 쥔 채로 이리저리 걸어갔다. 한참 동안 길을 걷던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음?”

눈을 떠보니 천마는 안개가 껴 있던, 세이프던전과 가변던전 지역의 경계에 서 있었다.

[천마 님. 다시 경계 지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상하군. 분명히 여기서 뭔가가 느껴졌는데.”

천마는 다시 눈을 감고 철근을 잡았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던 그는 초입의 어느 한군데의 땅에서 기묘한 기운이 올라옴을 느꼈다.

“땅 밑이었나.”

[무슨 말씀이신지…….]

“천마대능력!”

파앙!

천마대능력을 끌어올리자 강력한 힘이 천마의 전신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잠시 몸을 웅크린 천마가 어기충소의 수법으로 하늘 위로 솟구쳤다.

어깨에 붙어 있던 무명은 갑자기 하늘 위의 풍경이 보이자 깜짝 놀라며 앙상한 팔로 어깨 부근의 옷을 꽉 잡았다.

[천, 천마 님.]

“권마칠식…….”

시뻘건 아지랑이로 뒤덮인 천마의 양 손바닥에서 진홍빛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천수공파(天手空破)!”

양손을 내뻗자 진홍빛 불꽃은 지상으로 하강하는 화룡이 되어 지면을 파고들더니.

퍼엉!

폭발음과 함께 땅에 있던 흙더미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동시에 쇳덩이로 뒤덮인 계단 하나가 바닥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던전의 입구였다.

“후우.”

땅으로 착지한 천마는 쇳덩이로 되어 있는 계단과 그 아래에 보이는 던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역시 지면 아래에 있었군.”

끼이이이.

그런데 까만 문에선 기묘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게 모양의 몬스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둘, 스물…. 헤아릴 수없이 많은 크랩 피트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천마 님. 새로운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저 게딱지 마물이 있는 걸 보니 어딘가 고구마도 있겠다.”

천마는 쏟아져 나온 크랩 피트가 있는 던전 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초입부터 헤아릴 수 없는 자이언트 고구마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몇 개 정도를 가져가야 점주가 신뢰를 처리할 수 있나.”

[자이언트 고구마 한 개로 풀 30포 이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 개만 가져가도 충분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규모로 보아 전에 있던 던전보다도 훨씬 대량의 자이언트 고구마가 있을 듯했다.

무명도 감탄했는지 끊임없이 조잘댔다.

[자원을 채취할 새로운 던전을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협회에 던전의 위치를 알리면 규모에 따라 1천만 원에서 최대 10억 원까지의 포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만…….]

“어차피 본좌는 등록하지 못한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관심 없다. 어차피 점주와 3년간 일을 해주기로 했으니. 본좌의 내공 회복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가방을 연 천마는 자이언트 고구마 하나를 따서 가방에 욱여넣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천마 님.]

던전의 입구에 주렁주렁 열린 자이언트 고구마를 바라보던 무명이 말했다.

[자이언트 고구마로 친환경 풀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선, 누군가 이 던전의 위치를 세상에 공표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누군가 이 던전을 세상에 알려야 각성자들이 자원을 채취해 가고, 풀 공장에서 친환경 풀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천마 님이 자이언트 고구마를 직접 납품하는 상인이 되지 않고선 말입니다.]

“별일 아니군. 점주의 이름으로 등록하라.”

[장채원 님께서도 각성자로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뭐라고?”

천마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점주마저도 미등록 각성자였다니.

“그렇다면 익명으로 제보하도록.”

[불가능합니다. 협회에 등록된 각성자만이 등록을 할 수 있습니다. 설령 소문을 흘린다고 해도 협회에서 언제 조사 나올지도 미지수고요.]

“등록한 각성자라…….”

자이언트 고구마가 담긴 가방을 바라보던 천마는 문득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커다란 짐을 멘 채 손녀딸을 떠올리며 활짝 미소 짓고 있는 노인. 그리고 아픈 자식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유물을 찾던 노인의 얼굴이.

* * *

“어라?”

며칠 후, 복복 인테리어 내부.

장채원은 친환경 풀을 잔뜩 싣고 온 잡품 대리점 직원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 풀은 다 뭐예요? 그새 던전이 재건된 거예요?”

“아, 사장님. 소문 못 들으셨어요?”

양손에 들고 있던 친환경 풀을 내려놓은 직원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자이언트 고구마가 잔뜩 쌓여 있는 던전이 발견되었어요. 세이프던전 지역의 경계 부근에서요.”

“네? 진짜요?”

“네. 그것도 노인들로만 구성된 팀이 발견했다나 봐요.”

“노인으로만 구성된 팀이라고요?”

장채원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리 경계 부근이라고 해도 가변던전과 맞물린 그곳은, 안개도 올라오고 위험도가 높은 몬스터들이 바깥에 돌아다니는 곳이다.

“상위 팀 중에 노인들만 있는 곳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아뇨. 7급인가 8급 각성자 팀이래요. 여기저기 유물 찾으러 돌아다녔다가 우연히 던전 입구를 발견한 거죠.”

차에 있던 친환경 풀을 모두 내린 직원이 부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재료가 있는 던전이라서 포상금도 엄청 크게 받았나 봐요. 인당 1억인가? 2억인가 받았다네요.”

“와아.”

“어쨌든 재료 수급이 잘 되니, 이젠 걱정 마세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직원이 나간 후, 장채원은 문득 응접용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며칠 전.

“와, 자이언트 고구마잖아? 이거 어디서 난 거야?”

던전에 다녀온 천마가 둘러멘 가방에는 산더미처럼 커다란 고구마가 실려 있었다.

바로 친환경 풀의 재료가 되는 자이언트 고구마였다.

“던전을 돌아다니다, 어떤 노인장에게 얻었다.”

“노인?”

“그렇다. 짐꾼 일을 하는 노인인데, 우연히 얻었다고 하더군.”

장채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신뢰를 못 받을까 봐 고구마를 찾으러 간 거였어?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선 던전에 가면 안 된다고 했지!”

“그럴 리가 있나? 던전에 관한 공부를 위한 공익적인 목적으로 이동 중, 정말 우연히 얻은 거다.”

거짓말이라는 게 얼굴에 빤히 적혀 있지만 꼬치꼬치 물을 처지가 아니었다.

자이언트 고구마가 없으면 당장 신뢰를 처리하는 데 애먹을 수도 있었으니까.

‘저 녀석. 온 던전을 다 뒤져 크랩 피트를 찾은 거였어.’

영지에서 일하는 자는 던전의 발견이나 새로운 몬스터를 발견해도 등록을 해선 안 된다.

그것 역시 사사로운 이득을 얻는 것이니까.

“다행이로군.”

장채원과 시선이 마주치자 천마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이언트 고구마가 발견되어서 다행히 한시름 덜었다. 그렇지 않나.”

“으응. 그렇지”

시치미를 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긴 천마. 그 모습을 보며 장채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넘어가 줄게. 이번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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