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화령신 (3)
“잠, 잠깐. 내가 누구인 줄 아냐?”
버둥거리는 청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치익 소리와 함께 천마가 서너 장 밖으로 밀려놨다.
“그, 그걸 맞고도 버텨?”
청년의 손가락에 담긴 힘은 바위를 부수고 쇠를 뚫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작 회색 넝마 옷에 검은 흔적만 남다니?
“너, 인간 맞는 거냐?”
“흐흐흐. 이거, 재밌구만 그래.”
광마혈투의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던 천마는 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들통에 든 액체는 어디 있나.”
“흥, 그건 이미 내 배 속에 있지.”
청년이 배를 두들기자 천마가 씩 웃었다.
“그렇군. 네놈의 배 속에 있군.”
“그래? 어쩔 거냐?”
갑자기 천마의 몸이 희끗하게 변하더니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청년은 크게 당황했다.
“어, 어디 갔지?”
“여기 있다.”
어느새 천마는 청년의 발아래에 몸을 낮춘 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퍼억!
불꽃으로 변한 그의 주먹이 청년의 배를 후려치며 하늘로 뻗었다. 하지만 청년의 몸은 강철보다 단단하여 주르륵 뒤로 물러나기만 할 뿐, 끄떡도 하지 않았다.
“흥, 고작 이 정도였냐.”
“권마칠식, 승풍항룡!”
순간 천마의 몸이 수십 개의 잔상으로 변하더니 연달아 초식을 전개했다.
콰르르르르!
퍼억. 퍼억. 퍼억!
회색빛 폭풍이 된 천마는 무려 서른한 번 동안 청년의 배를 연달아 후려쳤다.
“꾸에엑.”
승풍항룡에 연달아 얻어맞는 청년은 배 속에서 맑은 액체를 내뿜었다. 천마는 번개와 같은 동작으로 들통의 뚜껑을 열어 그 액체를 받아내었다.
쪼르르륵.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토한 청년이 쓰러지자 천마는 들통을 닫았다.
“하늘 아래 본좌의 품에 있는 물건을 훔칠 자는 없다.”
“크으윽.”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청년이 비틀거리자 천마는 또다시 바위와 같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도둑질을 한 것도 모자라, 감히 본좌를 희롱한 죄다!”
맹렬한 파공음과 함께 청년의 아랫배에 주먹이 틀어박히려는 순간.
휘익!
갑자기 땅속에서 또 하나의 뱀이 하늘로 튀어나왔다.
“그만하시게!”
누런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변한 뱀은 다름 아닌 허옇게 머리가 센 할머니였다.
“모든 게 내 잘못일세…….”
슬픈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저 아이가 도둑질을 한 건 다 내 잘못이니, 차라리 나를 벌하시게.”
“무슨 말인가. 노인장은 누군가.”
천마의 말에 노인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이무기일세. 화령신이 이곳에 산다는 말을 듣고 몰래 숨어들어 왔지.”
“어, 엄마!”
“이곳에 뿌려지는 화령신의 손길을 마시면 몸이 아픈 것이 한동안 나아지니 말일세.”
“흠.”
“부디 이 아이를 용서해 줄 수 없겠나.”
천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본좌의 권한 밖이다.”
“선처해 주시게나. 부탁일세.”
“선처라.”
한숨을 쉬던 천마는 동산 아래를 가리켰다.
“진정으로 용서받고 싶다면 당사자에게 빌어라.”
아름다운 화원 앞에는 천마와 더불어 두 이무기 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장채원과 햇살과도 같은 빛을 머금은 소녀. 바로 화령신이 나란히 서 있었다.
“화 소저. 이들은…….”
“알아요. 천마 님. 신지에 있는 모든 건 제 귀에 들리니까요.”
화령신은 고개를 돌려 이무기 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꾸 꽃과 나무들이 말라갔었군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청년은 앞으로 뛰어나와 화령신의 앞에 엎드렸다.
“어머니가 너무 아프셔서… 죄를 짓는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의 효심은 이해해요. 하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식물들이 죽거나 병들었어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절 매정하다고 탓하셔도 좋아요.”
화령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제 힘은 신지 아래에 있는 식물들을 관리하는 데에도 벅차요. 만약 당신들을 돕는다면 반대로 저 동산의 식물들은 모두 말라 죽겠죠.”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에 벌어진 일은 탓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제 신지에선 떠나주셔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청년이 절을 하자 노인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천천히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고생하셨어요. 천마 님. 아픈 아이들에게 정성스럽게 붓질을 해주셨을 뿐 아니라, 그동안 제 신지가 메말랐던 원인까지 찾아주셨네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오.”
“너무나 일을 잘해주셔서… 계약 보수 외에 추가로 은총을 드리겠어요. 감사해요.”
“추가라면…….”
“네. 제가 직접 드리는 거예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화령신이 하얀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모든 일을 마친 천마는 장채원과 함께 차량으로 돌아갔다.
“고생했어.”
안전벨트를 맨 장채원이 빙긋 웃으며 천마를 바라보았다.
“모처럼 신뢰를 처리해 버렸네. 하하.”
그 말에 천마는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일전엔 점주는 신뢰에 못 간다고 하지 않았나.”
“으응. 그랬지.”
시선을 피한 장채원이 차량의 시동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그땐 사당신 님이 아프시기도 했고…….”
부웅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으나, 장채원은 목에 무언가 걸린 듯한 표정이었다.
“뭐, 지금은 괜찮아.”
기어를 변경한 그녀가 액셀을 천천히 밟으며 물었다.
“근데 왜?”
“만약 본좌가 신뢰에 실패한다면, 매장 평판이 떨어진다고 걱정하지 않았나? 그렇게 되면 신뢰가 잘 들어오지 않을 테고.”
“그렇지.”
“그렇군.”
창밖을 올려다본 천마가 두 눈을 번뜩였다.
“신뢰라는 건 본좌의 내공 회복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네 말은…….”
“본좌 혼자 해도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신뢰가 아니라면, 한동안 같이 다니는 것이 어떤가.”
의외의 제안에 장채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화령신의 신뢰를 반드시 잘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같이 온 것뿐. 장채원은 천마와 함께 신뢰를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거절할 말을 고르고 있을 무렵, 갑자기 천마가 외쳤다.
“잠깐 멈춰라.”
도로가 멀리 보이는 농로엔 아까 보았던 이무기 모자가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엄마 쪽은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청년은 천마에게 얻어맞은 탓인지 아직도 이무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흠.”
그러다 문득 열려 있는 자신의 엉덩이 가방을 내려다보던 천마가 차문을 열었다.
“점주. 잠깐만 기다려 주겠나.”
“응? 왜? 화장실 급해?”
“잠깐이면 된다.”
휘리리릭.
재빨리 몸을 돌린 천마는 신법을 펼쳤다. 화령신에게 따로 신력을 받은 천마는 이번 신뢰로 5년 정도의 고련한 진기를 얻을 수 있었다.
‘총 15년의 공력을 가진 셈이군.’
단숨에 도로 반대편까지 넘어간 천마는 이무기 모자 앞을 막아섰다.
“어, 어쩐 일이시우?”
깜짝 놀란 이무기 할머니의 물음에 천마는 대답 대신 한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을 내놔라. 노인장.”
“으응?”
“어서.”
청년을 힐끔 바라보던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한 손을 내밀었다. 천마는 두 손가락을 뻗어 할머니의 맥문을 짚었다.
“과연, 요괴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군.”
“갑자기 무슨 말이냐.”
청년의 말에 천마는 씩 웃었다.
“기혈이 원활하게 돌지 못해 병이 든 거다.”
그는 천하에 산재한 모든 마공과 마문대법을 모두 익혔다. 때문에 어떤 의원보다도 혈맥경락골수(血脈經落骨髓)에 정통한 상태였다.
“절대 움직이지 말아라, 노인장. 본좌의 내공 수위는 완전히 바닥이니까.”
천마는 단전에 남아 있는 내공을 끌어올려 노인장의 명문혈에 지풍을 날렸다.
파파팍.
맹렬한 반극진기가 담긴 지풍이 막힌 기혈을 뚫자 창백했던 노인의 안색이 점차 밝아졌다.
“후우. 역시 이 정도 내공 가지곤 힘들군.”
15년의 내공력을 모조리 지풍에 담아낸 천마는 이마에 땀을 닦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치료를 했으니, 앞으로 몸을 잘 보신하라. 그리고…….”
천마는 품속에서 일전에 던전에서 얻은 엑스 키메라의 알을 내밀었다.
“이것이 혈액순환에 특효약이라고 한다. 먹으면 한결 나을 거다.”
“엑, 엑스 키메라의 알? 이거 구하기 힘든 유물인데…….”
“본좌에겐 하등 필요 없는 물건이다. 받아라.”
알을 받아든 청년은 감격하여 천마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고, 고맙습니다.”
“이 던전이라는 곳엔 좋은 약이 있다. 왜 직접 가지러 가지 않나.”
천마의 물음에 청년은 고개를 떨구었다.
“요괴들은 던전에 들어갈 수 없지 않습니까? 저희가 멋대로 사는 타락한 요괴도 아니고요.”
“그런가.”
정확한 건 모르지만 요괴는 던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 같았다.
“어째서 저희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알 거 없다.”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마의 붉은 눈동자를 보던 청년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보니 인간이 아니라 요신 님이신 것 같군요. 신력까지 희생하셔서 어머니를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천만에. 본좌는 신이 아니다.”
“그, 그러면……?”
팔짱을 낀 천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본좌는 천마다.”
“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장채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뭐, 한동안 같이 다녀볼까…….”
그녀의 중얼거림은 들릴 듯 말 듯 허공으로 사르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