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화령신 (2)
꽃이 지르는 비명은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음공, 소림사자후를 꾹 찍어 닮아 있었다.
“말했잖아. 쉬운 일 아니라고.”
“대체 이게 뭔가. 왜 꽃이 소리를 지르나.”
“천마, 네 붓질이 거칠어서 그래. 결대로 천천히 부드럽게 칠해줘야 해.”
혀를 찬 장채원은 들고 있던 붓을 꽃 옆에 서 있는 나무에 갖다 대었다.
“이건 내가 칠할게.”
휘익.
그런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나무가 몸을 배배 꼬더니 장채원의 손길을 피했다.
“저, 저기 가만히 있어줄래?”
장채원의 부탁에도 나무는 콧방귀만 뀔 뿐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붓질을 피해냈다.
“니추공(泥鰍功)?”
나무가 하는 동작은 미꾸라지의 움직임에서 따온 회피 무공, 니추공을 영락없이 재현하고 있었다.
“뭐냐, 점주. 이자들은 무림의 고수인가.”
“이익.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말 안 듣는 꽃과 나무일 뿐이야.”
-꺄아아아아!
휘익 휘익.
천마는 소리를 지르는 꽃과 눈을 감은 채 장채원의 붓질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나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화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워낙 까탈스러운 아이들이라 제가 섬세하게 만져줄 수…….”
‘여기선 이런 걸 까탈스럽다고 하는 건가.’
반쯤 미쳐 있는 꽃과 나무를 바라보던 천마가 나섰다.
“점주, 교대하는 게 어떤가?”
“뭘?”
“본좌가 그 나무를 칠할 테니 점주가 꽃을 칠하라.”
“그래. 좋아.”
장채원이 몸을 비키자 팔짱을 낀 천마가 나무를 바라보았다.
“니추공 따위는 본좌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휘익.
붓을 쥔 천마가 손을 뻗자 나무는 고무 인형이 된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붓질을 피해냈다.
하지만 상대는 마도의 하늘이자, 절세무학의 대종사, 천마였다.
“어림없다.”
붓을 든 천마의 손이 수십 개의 그림자로 펼쳐지더니,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이는 나무의 움직임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마도제일의 연환절초, 천월현환(天越玄環)의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휘리리리릭.
나무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천마의 손그림자도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났다.
털썩.
마침내 붓질에 온몸을 함락당한 나무가 양손으로 몸을 가리며 무릎을 꿇었다.
“본좌의 승리다.”
-꺄아아아아!
그때 옆에 있던 꽃이 또다시 사자후를 터뜨렸다. 조심히 붓질을 하던 장채원이 살짝 힘을 주자 또다시 발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마가 시뻘건 눈빛을 빛내더니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본좌가 입 구멍을 틀어막아 주지.”
“아, 안 돼. 식물들에게 겁을 주면!”
천마를 제지한 장채원은 꽃에게 얼굴을 바짝 대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정말 미안해. 아파도 조금만 참아줄래? 금방 끝낼게.”
파란 바다처럼 빛나는 장채원의 눈망울에선 신비한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뚝 선 채 그녀의 눈망울을 바라보던 꽃은, 갑자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외로 꼬았다.
“고마워. 금방 칠해줄게.”
“흠.”
천마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다시 붓질을 하는 장채원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제 이거 하나 남았네.”
천마와 장채원의 눈앞엔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높이가 십여 장은 넘어 보이는 이 나무는, 크기를 제외하고는 다행히 평범한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군. 이게 가장 시들었다.”
나무를 올려다보던 천마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하필 시든 곳이 꼭대기 쪽이군.”
하필 꼭대기 쪽은 얇은 잔가지만 남아 있어 허공에 떠 있지 않고서는 붓질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칠할 수 있겠어?”
“물론이다. 육지비행술을 펼칠 공력이 없지만… 다른 방법이 있지.”
하얀 통을 내려놓은 천마는 담겨 있는 액체를 붓에 듬뿍 찍었다.
“후흡.”
신법을 펼친 천마는 단숨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처억.
그의 육중한 몸이 꼭대기 부근의 앙상한 가지 위에 살짝 올라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천마의 몸도 조금씩 휘청거렸다.
아마 무림인이 봤다면 절정의 일위도강(一葦渡江)이라고 박수를 쳤을 것이다.
쓰윽 쓰윽.
바짝 마른 가지에 정성스럽게 붓질한 천마는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후두두둑.
갑자기 땅이 꺼지듯 움푹 패이더니 바닥에 내려놓은 하얀 통이 통째로 땅속에 삼켜졌다.
“어어? 안 돼!”
장채원의 비명 소리를 들은 천마는 두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들통에 담겨 있던 액체들이 모조리 사라져 있지 않은가?
“감히 본좌의 이목을 숨기고 도둑질을 했다고?”
재빨리 땅으로 내려온 천마가 바로 땅에 엎드렸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선 시뻘건 혈광이 폭사되었고 동시에 귀는 살아 있는 동물처럼 펄쩍펄쩍 움직였다.
절정의 격공도청술(擊空盜聽術)을 시전한 것이다.
“이노옴!”
벼락같은 노성을 터뜨린 천마는 한걸음에 이십여 장을 날아갔다. 허공에 몸을 띄운 그는 어느 바위 근처에 꿈틀거리는 땅을 발견했다.
“신룡파미(神龍擺尾)!”
머리를 아래로 한 채 땅에서 내려온 천마가 일장을 후려쳤다.
퍼엉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튀더니 싯누런 뱀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크으!”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돈 뱀은 누런 옷을 걸친 청년으로 변했다.
“네놈은 뭐냐!”
“네놈?”
천마의 눈동자에선 활화산 같은 불꽃이 터져 나왔다.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것도 모자라, 본좌에게 네놈?”
“흥, 영지에서 일하는 따까리 인간 주제에…….”
하지만 그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천마가 번개같이 다가와 청년의 목을 움켜쥔 것이다.
“그게 마지막 유언인 게냐.”
신마대제를 능가하는 고금제일마인 천마. 그가 살기를 내뿜자, 산천초목이 흔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