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화령신 (1)
복복 인테리어 내부.
책상에 앉아 장채원은 얼음이 가득 담긴 양동이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에어컨이 고장 나다니.”
투명한 광택이 흐르는 나무에 삼족오 퀸의 털을 조심스럽게 붙이고 있던 그녀는 매장 한편에 설치된 타일 샘플을 정리하는 천마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냥 앉아 있어. 더운데 뭘 정리를 해?”
“앉아 있으면 뭐하나.”
“네가 열 내는 하마처럼 움직이니까 매장이 더 더워지는 것 같잖아.”
“조금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내공을 모을 수 있다.”
“어이구. 그놈의 내공.”
장채원은 눈썹을 일자로 만들었다.
“신뢰를 처리해서 벌면 되잖아? 그거 해서 얼마나 얻는다고?”
“하지만 신뢰가 없지 않나.”
“그러니까 누가 인테리어 시공 일을 망치래? 모처럼 잘하나 싶었는데!”
그녀는 얼마 전 천마가 망쳐놓았던 의뢰들을 떠올렸다.
“살짝 틀어진 문을 조절해 놓으라고 보냈더니 문을 쪼개고. 정자에 못을 박으라고 보냈더니 정자를 쪼개고… 도대체 왜 손만 대면 쪼개는 거야?”
“그건… 신뢰가 아니지 않나.”
“뭐? 너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화가 난 장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신뢰가 은총을 얻는다면, 인테리어 일은 돈을 얻는 일이야. 두 가지 일 모두 윤택한 생활을 지속시켜 주는 거룩하고 지엄한 일이라고. 알아들어?”
따르르릉.
그때 책상 위에 세워진, 골동품에 가까운 데스크 전화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네. 복복 인테리어입니다.”
2차 대전 시절에서나 나올 법한 원통 수화기를 뽑아 든 그녀가 나팔관 모양의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네? 아, 네네. 그럼요. 미리 준비해 두었는걸요.”
흐뭇하게 웃은 장채원은 손걸레로 벽지 샘플을 닦던 천마를 빤히 응시했다.
“네, 내일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달칵.
전화를 끊은 장채원은 이마를 매만졌다. 서랍을 열자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는 작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으음.”
입맛을 쩝 다신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천마를 노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나.”
“신뢰야. 일전에 들어왔던 화령(花靈:꽃의 정령)신 님의.”
“화령신?”
“그래. 이 화령신 님의 신뢰 때문에 삼족오 털을 구한 거야. 영기를 담을 수 있는 붓 만들려고.”
“그런 건가.”
타일을 정리하던 천마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잘되긴. 너처럼 신뢰만 따지는 녀석에게 이 일을 줘야 할지 말지 고민된다고.”
“그랬나. 그게 고민이었나.”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돌린 천마는 엄숙한 동작으로 짝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 합쳤다.
“뭐 하는 거야?”
“얼마 전에 타일 기술자 김 씨에게 배운 수법이다. 이럴 때 시전하면 백발백중이라고 하더군.”
두 손을 내려다보던 천마가 두 눈에 힘을 주더니 천천히,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손바닥을 비볐다.
“앞으로 인테리어 일도 성실히 하겠다.”
다음 날.
부우우웅.
장채원의 하얀 승합차가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번 신뢰는 더욱더 잘해야 해. 사실 화령신 님이 널 지명해 부탁한 신뢰였으니.”
조수석에 탄 천마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명이라니. 본좌의 실력이 벌써 이곳에도 퍼진 건가.”
“그게 아니라 사당신 님의 소개야. 저번에 네가 아주 훌륭하게 의뢰를 했다고 소개해 주셨대.”
“과연 그렇군. 참된 자는 참된 자를 알아보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어?”
그녀는 하얀 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말투 조심해. 화령신 님은 매우 섬세하신 분인데다 발도 넓으시다고. 이번에 일을 망치면 우리 매장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질 거야.”
“걱정 마라. 본좌는 천마다.”
“잘 알아. 그래서 걱정되는 거라고.”
장채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시련을…. 크흡.”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앉아 있던 천마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이번 의뢰에 무명을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건가.”
“아, 나노봇?”
“무명이다.”
“그래. 내가 설정한 이름은 그냥 나노봇이야.”
도저히 기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노봇의 인공지능을 떠올린 장채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뢰를 수행할 땐 나노봇을 데려가선 안 돼. 다른 신들께서 보시면 노할 물건이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노하다니.”
“뭐, 그런 게 있어.”
끼이이익.
하얀 승합차가 선 곳은 어느 외딴 산 밑에 지어진 작은 집이었다.
“저 집이야.”
장채원이 가리킨 곳은 그림처럼 하얀 단층집이었다.
앞마당엔 형형색색의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화원이 꾸며져 있었고, 아름다운 분수와 그네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엔 잘해. 알겠지?”
“염려 붙들어 매라. 미리 페인트칠 연습도 하지 않았나.”
“그, 그래. 엄청 망치긴 했지만.”
의뢰 내용을 살펴본 장채원은 미리 천마에게 페인트 칠하는 법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천마는 놀랍게도 연습하는 족족 칠을 망쳤다. 밑 작업을 잘못하거나 두껍게 칠하거나, 얇게 칠하거나 농도를 못 맞추거나…….
페인트 시공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모든 하자를 완벽히 재현해 내었다.
“본좌는 실전에 더 강하다.”
장채원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마가 굵은 팔뚝을 내밀며 씩 웃었다.
“안심하라.”
몸을 돌리려던 장채원이 어깨를 움찔했다.
안심하라.
그 말은 천마가 종종 내뱉는, 마법 같은 주문이자 사망 플래그와 같은 말이다.
‘해치웠나?’라고 말하는 순간 악당은 반드시 살아남고, ‘살아 돌아가면 결혼하자’라고 하면 반드시 죽는 것처럼.
‘그 말을 남길 때마다 반드시 일을 망쳤잖아!’
눈을 부릅뜬 장채원이 천마에게 다가갔다.
“안 되겠다.”
이번 의뢰는 결코 망칠 수 없는 신뢰 중 하나다. 하늘을 올려다본 장채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같이 갈게. 같이 하자.”
“본좌가 알아서 하겠다.”
“아냐. 같이 해.”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던 장채원이 낮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냥 처음부터 같이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어서 오세요.”
천마와 장채원이 단층집 앞마당에 들어서자 하얀 원피스에 예쁜 모자를 쓴 소녀가 물 조리개를 든 채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복복 인테리어에서 오신 건가요?”
용모는 열넷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으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매우 따사롭고, 또 강렬했다.
바로 그녀가 꽃의 생멸(生滅)을 관장하는 화령신이었다.
“그렇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화령신이시여.”
천마가 매우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자 소녀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신이라 불러주시니 민망하네요. 저는 아직 어리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알겠소이다. 화 소저.”
또다시 기도하듯 넓은 어깨를 둥그렇게 만 천마가 눈을 감자, 장채원이 옆구리를 찔렀다.
“눈은 왜 감는데?”
“정중한 예를 표한 거다.”
라고 하면서 천마는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았다.
“화령신이시여.”
“미쳤어? 왜 두 번 고개를 숙이는데?”
“무림의 예의다. 죽은 자와 신에겐 항상 두 번 인사를…….”
천마의 목을 잡고 얼굴을 바짝 들이댄 장채원이 저승사자와 같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입 다물어.”
“…….”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화령신은 웃음을 참기 어려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작은 집 뒤로 펼쳐진 동산 하나를 가리켰다.
“이곳은 제가 관리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나무들과 꽃 중에 제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있거든요.”
화령신은 마당에 놓인 커다란 들통 하나를 들고 왔다.
“제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인데… 워낙 까탈스러운 아이들이라, 제가 섬세하게 매만져 줄 수가 없어서요. 대신 제 손길을 이 통에 담았으니, 이 붓으로 꼼꼼히 칠해주시겠어요?”
하얀 통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엔 별빛을 담은 듯 오묘한 색채의 물이 들어 있었다.
“시들어 있는 아이들에게 꼼꼼히 발라주시되, 절대 바닥에 떨구거나 엉뚱한 데 바르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지맥을 건드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구려. 주의하겠소.”
넙죽 통을 받아든 천마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만…….”
“무슨 말을 하려고.”
장채원이 화들짝 놀라자 화령신이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편하게 말하세요.”
“아직 일도 안 했는데, 왜 계속 내공을 주입해 주는 것이오?”
“내공이요?”
“그 신력이라는 거 말이오.”
그러자 눈을 깜빡이던 화령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천마 님께선 인족임에도 신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셨죠.”
빙긋 웃은 화령신은 동산과 집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신의 힘이 닿는 곳은 신지(神地)와 다름없어요. 당연히 이곳에선 신력을 사용할 수 있죠.”
“그렇구려. 하지만 전에 갔던 사당신 님의 집에선 그런 것이 없던데.”
“그분께선 힘을 잃어가는 중이셨으니까요.”
“아아, 그랬구려.”
고개를 끄덕이던 천마는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그럼 신의 영역에 있으면 지금처럼 원 없이 신력을 끌어올 수 있단 말이오?”
“그럴 리가요. 신지에서 흘러나오는 신력은 한계가 있어요. 신지에서 벗어나면 신력도 사라지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 안으로 주입되던 신력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일전에 사당신 신뢰를 성공해 얻은 공력은 10년 수위. 지금 땅에서 주입되는 힘은 한 반 갑자쯤 되는군.’
공력을 살짝 끌어올려 본 천마가 입맛을 다셨다.
‘십 갑자가 채워지면 바로 천지무극통령을 실행할 수 있을 텐데.’
그 순간 천마는 신기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신에 따라서 신지에서 나오는 신력이 다른 것이오?”
“그렇죠. 아무래도 신의 힘에 따라 신지에서 흘러나오는 신력도 다르니까요.”
순간 천마의 눈앞에는 광명이 펼치지는 듯했다.
지금 충진(充眞)된 내공이 반 갑자 가량이니, 이곳보다 스무 배가량의 신력이 흘러나오는 곳이 있다면 천마는 당장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혹시 이 신지의 힘에 스무 배 정도 강한 힘을 가진 신도 있소?”
“저의 스, 스무 배요? 으음. 제가 알기론 땅을 딛고 인간들과 살아가는 대지유신 중에선 그 정도는 없을 거예요.”
“그렇구려.”
하긴 그런 방법이 있다면 장채원이 당장 알려주었을 것이다.
“자자, 이제 일해야지.”
화령신의 눈치를 보던 장채원이 천마를 쿡 찔렀다.
“도구는 잘 챙겨왔지?”
“물론이다.”
“천마는 엉덩이 가방에 꽂힌 투명한 붓을 꺼내 들었다.
주머니 하나 없는 광마혈투의만 입고 있는 천마를 위해 장채원이 사준 것이다.
“그럼 지금 당장 시작하겠소이다.”
“그 붓, 삼족오 퀸의 털이 아닌가요?”
“맞소이다. 이 일을 위해 점주와 본인이 미리 준비해 두었소이다.”
“그 귀한 걸…….”
화령신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복복 인테리어에 부탁드리길 잘했네요.”
그 미소는 아찔한 절벽에 피어난 한줄기 신비로운 꽃과 같았다.
작은 산에는 꽃과 식물들, 그리고 나무들이 풍요롭게 피어 있었다.
만약 천마가 페인트 붓 대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면, 신선이 사는 도원경이라 착각할 만한 수준이었다.
“반 갑자의 내공이 이렇게 강력한 것이었나.”
가볍게 땅을 박차자 거구의 몸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도제일신법, 야월극속을 펼친 것이다.
“좋군.”
본래 갖고 있던 내공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신법을 펼치자 그의 몸은 바람처럼 허공을 누볐다.
체내에 유전되는 반극진기로 인해 그의 감각은 공기의 흐름마저 감지할 만큼 더욱 예민해졌다.
휘익. 타악.
발레리노처럼 발끝으로 잎사귀를 튕기며, 나무를 오르내리는 천마를 보며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만하고 내려올래?”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던 장채원이 눈앞에 보이는 숲을 가리켰다.
“할 게 많아. 빨리 칠해야지.”
숲속의 나무들은 한결같이 잎이 바짝 시들었고, 가지도 힘없이 처져 있었다.
몸을 한 바퀴 돌린 후 허공에서 내려온 천마는 바닥에 놓인 하얀 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형언할 수 없는 상쾌한 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괜한 연습을 했군.”
시든 나무에 조심스럽게 붓질을 하는 천마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페인트 작업 의뢰라는 걸 들은 장채원은 하루 종일 천마에게 페인트칠 연습을 시켰다.
하지만 지금 하려는 일은 어제 배웠던 인테리어 상의 페인트 시공 방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하아.”
천마의 마음을 꿰뚫어 본 장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매장이 신뢰를 많이 하겠니, 일반 페인트칠을 더 많이 하겠어?”
매일매일 들어오는 집수리 의뢰에 비하면 신뢰는 많아야 보름에 한 번 정도다.
아니, 신뢰를 위해 던전에 가는 준비 과정까지 생각한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가.”
“그리고 걱정하지 마.”
아쉬운 표정을 짓는 천마를 보며 장채원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연습 아냐. 지금까지 연습한 거 이상으로 힘든 페인트칠이 될 테니까.”
사람 형태의 나무와 꽃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머리에 꽃이 달려 있거나, 몸 주위로 나뭇가지가 달려 있는 형태였다.
두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마네킹처럼 서 있는 괴상한 인간들을 바라보던 천마가 입을 벌렸다.
“이자들은 뭔가.”
“뭐긴.”
붓을 꽉 비틀어 쥔 장채원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화령신 님의 손길에 닿지 않는다는, 바로 그 꽃과 나무들이지.”
“이자들이 꽃과 나무라고?”
“응.”
“그럼 여기다 붓질을 하란 말인가.”
장채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굳어 있던 천마는 침음을 내더니 하얀 통의 뚜껑을 열었다.
“뭐, 하라면 해야겠지.”
통에 있는 맑은 액체에 붓을 담그자 오색 빛깔로 반짝이던 삼족오 퀸의 털이 하얗게 변했다.
붓을 내려다보던 천마는 천천히 두 눈을 감고 있는 꽃에게 붓질을 시작했다.
스윽. 스윽.
몇 번쯤 붓질을 했을까? 갑자기 눈을 감고 있던 꽃이 번쩍 눈을 떴다.
-아아아악!
갑자기 꽃은 입을 벌려 크게 비명을 질렀다. 순간 천마는 귓구녕에 쇠몽둥이를 박은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소림사자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