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사당신 (1)
따르르릉.
요란한 벨 소리가 매장 내부에 울려 퍼졌다.
매장 구석에 설치한 골동품에 가까운 데스크 전화기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네. 복복 인테리어입니다.”
2차 대전 시절에서나 나올 법한 원통 수화기를 뽑아 든 장채원이 나팔관 모양의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아, 네. 지금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괜찮습니다. 매장에 있으니 아무 때나 방문해 주세요.”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나팔 모양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딸랑하는 풍경 소리와 함께 젊은 여성이 천천히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여성은 매우 우아한 용모를 지녔고 두 눈이 길고 컸다.
여성의 얼굴을 본 장채원은 전에 없던 매우 정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어르신.”
여성은 엷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방긋 미소 지은 장채원이 입을 열려는데 창고로 걸어가던 천마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어르신이라니. 인간이 아닌 건가?”
“조용히 안 해?”
장채원이 눈을 부라리며 핀잔을 줬지만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본좌는 도무지 모르겠군. 외관만 보면 인간인지 요괴인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그사이 번갯불처럼 타오르는 장채원의 눈동자가 천마의 안면에 바짝 붙어 있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창고나 정리하고 있어.”
매서운 냉기가 몰아치는 그녀의 속삭임에 천마는 입을 다물었다.
‘무림’ 이란 세계관에선 그가 최강자였으나, 이 곳은 다르다.
장채원도 장채원이지만, 이 세계엔 수많은 신이 살고 있지 않은가?
고금제일인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천마는 이곳에서 그저 ‘평범한 인간’에 더 가까웠다.
“그러지.”
침음을 낸 천마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송구하옵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일꾼이라…….”
장채원이 고개를 숙이자 여성이 쿡쿡 웃었다.
“저런,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로구나.”
“아, 알고 계셨는지요.”
“이 세계에서 저만큼 육체를 단련해 낸 인족은 없을테지. 쉽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일은 서툴고, 힘만 세서요.”
여성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천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이방인을 직원으로 쓰려는 것이냐.”
“아니요. 그냥 일꾼이 없어서, 이런저런 일을 맡기려고요.”
“일꾼이 없다니?”
장채원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저 녀석이 저희 집에 있는 정령수를 망가뜨려서요.”
“후후후. 저자라면 정령수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저 녀석이요?”
여성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금강역사와 같은 육체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힘을 몸속에 담고 있다. 충분히 신뢰를 처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센스도 없고 아직 이곳의 일과 사회에 적응하는 중이라서요. 감히 어르신들의 일을 맡길 수 없을 것 같아요.”
“천만에. 잘 가르치면 정령수보다 나은 일꾼이 될 수 있을 거다. 저자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인족이니까.”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장채원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녀석, 아무래도 나사가 몇 번은 돌아간 것 같아서요.”
“…….”
“스스로를 본좌라고 칭하질 않나. 조금 크고 딱딱한 물건만 보면 어류겐을 날리거든요. 아, 그러니까 부순다고요.”
“크고 딱딱한 물건만 보이면 부순다고?”
고개를 갸웃하던 여성은 갑자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차라리 잘되었구나. 이번 일에 저 이방인을 불러다오.”
한편, 창고 내부에 웅크리고 있던 천마의 눈에선 고통스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전혀 회복되지 않는군.”
운공을 해서 내공을 양생하려고 해도, 한 방울의 진기도 모아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우 격체전공(擊體傳功)의 수법 밖에는 없는데.”
내공을 모을 수 없다면 외부에서 주입받아야 한다.
하지만 무림도 아닌, 이 세계에서 무슨 수로 육백 년의 내공을 주입받는단 말인가?
“젠장!”
가슴속에서 새어 나오는 무력감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천마는 극에 달한 무공으로 마도천하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운명조차 바꾸었다.
무기력감, 절망이라는 단어는 그와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뭐 해?”
그때 천마의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채원이었다.
“잠깐 생각 중이었다. 무슨 일인가.”
“크흠, 아까 버럭 화내서 미안해.”
그녀의 목소리에 연민이 녹아 있는 듯하자 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과할 필요 없다.”
“응?”
“강자가 약자를 헤아리는 일 따윈 무의미한 일이니까.”
천마는 장채원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굴복이 아니다. 언제고 그녀를 능가할 것이고, 자신의 발아래 둘 것임을 가정한, 일시적 웅크림일 뿐이다.
‘물론 그전까진 약자의 대접을 받아야겠지.’
천마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고,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지금 이런 대접은 찰나일 뿐이다.
“그쪽 세계는 그러는지 몰라도, 여기선 안 그래. 네가 있는 곳은 대한민국이라고.”
“알겠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요괴라는 말을 쉽게 꺼내면 안 돼. 특히 인족들의 대부분은 요괴와 섞인 채 살아가는 걸 모르니까.”
천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알면 안 되는 건가.”
“그런 건 아닌데… 사람들은 말이야, 자신들과 다른 걸 본능적으로 싫어해. 그건 역사로도 증명된 사실이야.”
장채원의 눈빛은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천마의 묘한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리고 신뢰 하나가 들어왔어. 너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신뢰라. 신이나 요신이 일을 맡겼단 말인가.”
“그래. 이해가 빠르네.”
“그런 일은 절대 내게 맡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런데 널 지명했어.”
장채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까 온 신님이 말이야…….”
“그런가.”
팔짱을 낀 천마는 반색하며 말했다.
“역시 신은 본좌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이군.”
“그, 그래.”
이마에 떨어진 땀을 닦은 장채원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보통 신뢰에는 필요한 도구들을 던전에서 구해오는 일이 많은데, 이번 일은 정령수가 만들어놓은 도구가 있으니까 바로 가면 될 거야.”
“도구라니.”
장채원은 창고 앞에 세워둔 슬레지 해머(대형 망치)를 가리켰다.
손잡이는 괴상한 뼈를 이어붙인 듯하고 망치 헤드에선 오렌지빛 광채가 흐르는 걸로 보아, 평범한 망치는 아닌 것 같았다.
“철거 작업을 해야 하거든.”
장채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뭐든 잘 다룬다고 했지? 내일 이걸 쓸 거니까 오늘 잘 연습해 봐.”
다음 날.
장채원은 조수석에 몸을 욱여넣은 천마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첫째도 친절, 둘째도 친절이야. 본좌니 어쩌느니 하는 말투도 쓰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거절한다.”
“왜?”
천마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본좌는 천마니까.”
“야, 저쪽은 신님이라고. 신!”
장채원은 천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 일을 하려면 신님이든 요괴든 인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고객한테는 언제나 친절해야 한다고.”
“으음.”
“그냥 물건 몇 가지만 철거해서 치우면 된다고 하니까. 정중하게 시키는 대로 하고 와.”
천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약속이라지만, 사소한 막일 따윈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마정강삭검을 줄 테니, 일을 시키는 걸 관둘 수는 없겠나.”
“무슨 말이야?”
“본좌는 하루라도 빨리 신비스럽게 끊긴 기혈을 회복해 잃어버린 내공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다른 일을 할 때가 아니다.”
“아아, 벌써 약속을 깨려는 거야?”
장채원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본좌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 라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누구였지?”
자존심이 상한 천마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알겠다. 약속을 이행하도록 하지.”
“존댓말은?”
천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존댓말을 하겠다는 내용은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쪽 세계엔 경로사상도 없어? 그냥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신이야. 신이라고?”
“본좌는…….”
천마의 말허리를 자른 그녀의 눈동자에선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지금처럼 말허리를 부러뜨렸다간 일을 못 하는 건 둘째치고 우리 매장도 영지 자격을 잃을 거야. 만약 그렇게 되면, 흐흐흐…….”
희번덕이며 눈이 뒤집힌 장채원이 음침하게 웃자, 천마는 전에 없던 불길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리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유성우를 떠올렸다.
꿀꺽.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천마도 그와 같은 힘을 반드시 얻고 싶다.
그렇기 위해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장채원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하니, 경어 정도는 쓰도록 하지.”
“잘해. 나도 정령수 대신 인간을 불러서 신뢰를 시키는 건 처음이란 말이야. 이건 나에게도 모험이라고.”
드르륵.
자갈을 밀어내는 타이어 소리와 함께 차량이 멈춰 선 곳은 어느 외곽 국도의 도로변이었다.
차에서 내린 천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저 위쪽이야.”
장채원이 가리킨 곳은 무성한 숲이 펼쳐진 산이었다.
“산? 산으로 가란 말인가?”
“그래.”
“산으로 올라가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
“올라가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남긴 장채원은 몸을 돌려 다시 차량으로 돌아갔다.
“어디 가나.”
“끝나면 내려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같이 가는 게 아니었나?”
천마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음성을 낮춘 채 조용히 말했다.
“이곳엔 난 못 가.”
“왜 못 가나.”
“사당 님은 몸이 안 좋으시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을 꾹 삼킨 장채원이 차갑게 말했다.
“네가 알 거 없어.”
다시 고개를 돌린 장채원의 긴 눈동자는 얼어붙은 설원처럼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천마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 역시 타인의 일에 관심 따윈 없었으니까.
산속으로 들어가자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내려온다.
성큼성큼 걷던 천마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황금빛 햇살이 마치 길을 안내해 주는 것처럼 숲속에 펼쳐져 있다.
산 중턱쯤에 올라가자 널따란 공터가 보였다. 그곳엔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은은한 빛으로 그린 듯한 작은 집은 마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긴가.”
천마가 집 근처로 천천히 다가가자, 툇마루에 앉아 있는 여성의 그림자가 보였다.
“왔구나.”
그녀는 바로 어제 매장으로 찾아왔던 여성이었다.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성의 머리칼과 눈동자는 엷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
“복복 인테리어에서 왔…소.”
정말 오랜만에 경어를 쓰자니 어색해 죽을 맛이다.
만마집궁의 지배자, 천마의 배분은 이백 년 전의 고수인 범마(梵魔)와 동일했다.
때문에 무림에선 존대할 일이 아예 없었다.
“철거 의뢰를 맡긴 고객이시오?”
다행히 여성은 개의치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찾아왔구나.”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여성의 몸 주변엔 햇살과도 같은 광채가 머물러 있었다.
아마도 무슨 무슨 신이라는 건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
“그래. 이곳까지 오는 데 불편함은 없었느냐.”
마치 장난꾸러기 손자를 대하듯 자상한 음성이다.
‘잘해야 이십 대로 보이는 외모건만, 어찌 저토록 만인을 감복시키는 기운이 흘러나오는지 모르겠군.’
“그렇소.”
그녀의 시선을 피한 천마가 헛기침을 했다.
“흠, 철거할 것은 어디 있소?”
그가 팔을 걷어붙이자 여성은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저것이다. 저걸 부수어 깔끔하게 치워다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마당 앞에 있는 작은 사당이었다.
나무로 지어진 사당의 외관은 매우 낡고 오래되어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만 같다.
‘신이라는 건 부자인가 보군.’
발로 걷어차도 단숨에 무너질 것 같다.
“이런 일에 굳이 사람을 쓰는 것이오?”
천마의 물음에 여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사람을 쓰는 게 아니라 반드시 써야 하는 것이다. 이 몸이 직접 부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묘한 대답이다.
마당 앞으로 걸어간 천마는 사당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작은 사당 안에는 작은 석상이 있었고, 아주 정성스럽게 올려진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거, 혹시 본인 아니시오?”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석상은 어딘가 모르게 툇마루에 걸터앉은 여성과 닮아 있었다.
천마의 물음에도 여성은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다.
‘뭐, 시키는 일만 하면 되겠지.’
천마는 슬레지 해머로 사당의 벽면을 후려쳤다.
낡을 대로 낡은 사당은 단 일격에 폭삭 주저앉을 것이다.
“아니?”
하지만 놀랍게도 사당은 멀쩡했다. 오묘한 힘이 망치를 튕기듯 밀어낸 것이다.
“호신강기(護身罡氣)?”
천마는 눈을 껌뻑거렸다. 어찌 한낱 무생물이 호신강기를 두를 수 있단 말인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건가.”
심호흡을 한 천마는 몸을 낮게 웅크렸다.
망치를 쓰는 대신 권마칠식의 절초, 승풍항룡을 다시 한번 사용하려는 것이다.
“하압!”
땅에서 끌어 올린 주먹이 사당의 벽을 후려쳤다.
내공 따윈 없었지만 온 힘을 다해 도약한 탓에 그의 몸뚱이는 허공에서 한 장(丈) 가까이 떠올랐다.
터억.
다시 땅으로 착지한 천마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낡은 사당은 뭐가 지나갔냐는 듯 거뜬히 서 있다.
부드러운 어떤 힘이 천마의 주먹을 또다시 밀어낸 것이다.
‘낡은 사당이 승풍항룡의 힘을 밀어냈단 말인가.’
천마는 눈을 부릅떴다.
이 세계는 독특하고 신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조차 어린아이보다도 약한 것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때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여성이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신력(神力)이 남아 있나 보구나.”
맑은 하늘을 올려다본 여성은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니면 미련이 남아 있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