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던전으로 간 천마
며칠 후, 어느 고층 아파트 인테리어 현장.
와지끈.
천장에 붙어 있던 석고가 우수수 떨어지며 하얀 가루가 사방으로 날린다.
위이이잉.
우당당탕.
욕실 위생기가 모두 분해되고 사방에 붙어 있던 타일들이 요란하게 깨진다.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위해 기존 기성품들을 모두 철거하는 중이다.
웨에에엥. 콰르르르. 우지끈.
지축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음과 먼지가 뭉게뭉게 오르는 철거 현장.
그때 시꺼먼 그림자 하나가 먼지를 뚫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천장에 닿을 듯한 큰 키, 무성한 잡초 같은 머리칼. 어느 영화의 로봇처럼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
회색빛 도복 위에 넝마 같은 작업복을 걸쳐 입은 천마였다.
“곤란하군.”
굵은 팔뚝을 가슴에 붙인 천마는 음산한 눈빛으로 철거 현장을 바라보았다.
“본좌가 이러한 일을 해야 하다니.”
그때, 쇠 지렛대를 들고 있던 철거반장, 김 씨가 천마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다.
“어이 천 씨! 왜 자꾸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거야! 빨리 폐기물 마대, 아래로 옮겨!”
천마는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김 씨를 내려다보았다.
“본좌의 성은 천씨가 아니다. 그건 별호다.”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치워. 시간 없단 말이야.”
김 씨는 항의하는 천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쇠지렛대로 천장 석고를 부수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했다.
경시, 무시, 멸시, 업신여김…….
천마는 그동안 뜻만 알고 있던 단어들을 직접 체험하는 중이다. 그리고 머릿속엔 오만 감정이 쏟아졌다.
“어처구니가 없군.”
독보천하 하며 무림을 호령하던 그가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될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하…….”
어이가 없던 천마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에 강력한 내공을 실어 보내는 혈마굉천소(血魔轟天笑)를 펼친 것이다.
“으하하… 커억.”
입을 크게 벌리고 웃자 천장에서 떨어지는 석고 가루가 그의 목구멍에 한 움큼 들어가 버렸다.
“쿨럭쿨럭.”
쪼그린 채 한참 동안 기침을 한 그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내공이 소실되었으니니 굉천소를 펼쳤다고 해도… 소용없겠지.”
웅얼웅얼 중얼거린 그는 바닥에 떨어진 폐기물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폐기물이 잔뜩 쌓이자 천마는 육중한 다리를 수직으로 치켜올렸다.
덩치에 맞지 않은 놀라운 유연성이다.
“후읍,”
낮은 기함 소리와 함께 그는 함께 쌓아둔 타일과 나무들 사이로 치켜든 다리를 힘껏 내리쳤다.
콰직. 빠각. 우지근.
다리가 내려올 때마다 폐기물들은 커다란 해머에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기계처럼 다리를 치켜올려 폐기물을 부수는 모습은 마치, 보너스 스테이지를 맞아 자동차를 박살 내는 게임 캐릭터의 모습 같다.
“느리군.”
폐기물을 모조리 쓸어 담은 천마, 그는 아직도 천장 석고를 부수고 있는 김 씨를 바라보았다.
김 씨는 앙상한 몸으로 쇠지렛대를 든 채, 연신 천장을 부수고 있었다.
“비효율적인 움직임이다.”
그 모습을 무심히 응시하던 천마는 천천히 김 씨에게 다가갔다.
“비켜라. 본좌가 단숨에 부숴주지.”
“뭐? 뭘 부숴?”
“살짝만 쳐도 부서지는 무른 재질이 아닌가. 굳이 그런 쇠붙이를 이용해 부술 필요가 없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천마는 혈광을 번뜩이더니 몸을 낮게 웅크렸다.
그 순간 김 씨의 머릿속에는 장채원이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폐기물 담는 거 외에, 다른 작업은 시키지 마세요. 절대!”
“잠, 잠깐만 천 씨. 이건 내가 알아서…….”
당황한 김 씨가 두 손을 저을 무렵.
“권마칠식, 승풍항룡(昇風抗龍)!”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천마는 주먹을 치켜든 채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어류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씨는 눈을 껌뻑거렸다.
천마가 허공으로 펄쩍 뛰며 주먹을 치켜올리는 동작은 90년대 격투 게임에서 주인공이 사용하는 기술과 매우 흡사했다.
“하압!”
내공은 소실되었지만 극한으로 단련된 육체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천마의 주먹은 천장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천장 깊숙이 설치되어 있는 스프링클러 배관까지 박살 내 버렸다.
쏴아아아아아!
“음?”
바닥으로 내려온 천마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초식 성공을 축하하는 건가.”
“으어어!”
쏟아지는 물줄기 때문에 일을 하던 인부들은 모두 바깥으로 대피했다.
중년인은 들고 있던 쇠 지렛대를 바닥에 내던지고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천 씨! 스프링클러 배관을 부수면 어떡해!”
“무슨 소린가.”
“아파트의 고층 세대에는 화재 때문에 천장에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 있단 말이여!”
“스프링클러?”
멀뚱히 서 있던 천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야, 이… 어류겐 성애자야!”
복복 인테리어 내부.
벌떡 일어난 장채원이 천마를 향해 소리쳤다.
“대체 언제까지 어류겐을 날릴 거야? 왜 철거 현장에 갈 때마다, 왜 어류겐을 날리는데!”
“초식 이름이 틀렸다. 그건 권마칠식의…….”
“싱크대를 철거하라 했더니 싱크대에 대고 어류겐을 날리고, 화장실 내부를 철거하라니까 화장실 벽에 어류겐을 날리고, 이제는 아예 천장에 대고 어류겐을 날려?”
희번덕이며 눈을 뜬 장채원이 손을 휘저었다.
“시키는 일만 하라고 했잖아? 얌전하게 폐기물만 주으라고 했는데, 왜 스프링클러 배관을 박살 낸 거야!”
“천장을 부수려 하길래 도와주었을 뿐이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니까?”
“어쨌든 같은 전장(戰場)에 있는 자가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본좌는 전장의 동료를 외면하진 않지.”
“공사 현장이 무슨 전쟁터냐?”
“치열하다는 점에선 다를 바 없다.”
천마는 울적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게다가 철거반장 김 씨는 그 얼굴에 올해로 나이가 환갑밖에 되지 않았더군. 백 살은 넘은 줄 알았는데 말이다.”
“무슨 소리야, 그게?”
“폭삭 늙어버린 이유는 아마 젊었을 때부터 막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몸도 마른 것이고, 잔병에도 적잖이 시달리고 있겠지.”
“으응?”
깊은 한숨을 쉰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오늘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 비쩍 마른 몸을 이끌고 현장에 나왔다. 그런데 어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단 말인가.”
홀린 듯 천마의 수다를 듣고 있던 장채원의 눈이 짝짝이가 되었다.
“김 반장님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놀랍군.”
천마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 나이 먹고도 아직도 혼자란 말인가?”
“뭐, 그렇게 치면 나도 아직…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응접 테이블에 올려진 계산기를 두들긴 장채원은 머리칼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요 며칠간 네가 망친 일 때문에 계산이 안 나와! 계산이!”
벌떡 일어난 그녀는 석상처럼 앉아 있는 천마를 향해 절규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부순 집은 호선(狐仙:구미호) 님께서 인족 연인과 사시겠다고 우리한테 시공 맡긴 곳이라고!”
“호선? 요괴의 집이었나.”
“말 조심해. 호선 님은 요괴가 아니라 요신(妖神)이야. 인족들의 애정사를 담당하신다고.”
“뚜쟁이란 말인가.”
“시끄러. 어쨌든 스프링클러 수리 같은 건 우리가 할 수 없어. 전문 소방 업체에 따로 의뢰를 해야 한다고!”
“그런가.”
천마의 덤덤한 표정에 장채원의 눈동자는 점차 하얗게 변해 갔다.
“아파트 수도도 통째로 잠궈야 해서 엄청 항의가 들어왔단 말이야. 이게 호선 님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분 발 엄청 넓단 말이야.”
계산기를 움켜쥔 그녀의 치아에서 뿌드득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스프링클러 배관 수리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 줄 알아? 어엉? 얼만 줄 아냐고!”
“모른다.”
“…….”
이 바윗덩이에겐 구박을 해봤자 데미지가 박히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데미지가 되돌아오는 것 같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던 장채원이 고심했다.
‘일꾼을 얻은 게 아니라, 혹 덩어리를 얻은 거잖아?’
인테리어 시공 중, 가장 쉽고 단순한 철거 작업도 제대로 못 하다니.
그렇다면 아무짝에도 쓸모도 없는 짐짝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저 녀석. 일 안 하려고 수 쓰는 건 아니겠지?’
맨숭맨숭하게 서 있는 천마를 보니 왠지 속이 뒤집힌다.
‘웃기지 마. 그냥 보낼 줄 알아? 절대로 부려먹어 주겠어!’
두 주먹을 불끈 쥐던 장채원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천마의 주먹에 스치자 터져 버릴 듯 두 조각난 장판 쪼가리가 말이다.
‘그래. 이 녀석, 무엇이든 기가 막히게 박살 내잖아!’
“더 시킬 것이 없다면 본좌는 가겠다.”
서 있던 천마가 몸을 돌릴 무렵, 방긋 웃는 장채원이 손뼉을 쳤다.
“아니, 할 일이 더 남았어.”
장채원이 천마를 데려간 곳은 커다란 창고 안쪽에 있는 쇠문이었다.
청동색 광택이 번들거리는 금속문 중간에는 손잡이 대신 안쪽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구멍이 보였다.
“이게 뭔가.”
천마가 문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장채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우리매장 전용 비밀 통로.”
“비밀 통로?”
“응. 던전 지역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입구야. 사람들에게 비밀통로를 들키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도착 지점을 가변던전 경계쪽으로 해 놨지만….”
낮게 헛기침을 한 장채원이 다시 말했다.
“크흠, 정식으로 들어가려면, 각성자 신분증도 있어야 하고 세금도 떼고… 여러 가지 복잡하거든.”
“던전?”
처음 듣는 단어지만 왠지 낯설지 않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면귀가 전해준 지식 속에 들어가 있던 단어였다.
“다른 세계에서 온 마물들이 서식하는 곳 말인가.”
“그래. 맞아.”
금속문을 바라보는 장채원의 눈동자에선 묘한 빛이 흘러나왔다.
“원래는 이 세상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지.”
어딘가 모르게 우수에 젖어 있는 듯한 눈빛과 말투다.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짐작했지만 천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을 왜 관부에선 관리를 하지 않는 건가.”
“관리해. 각성자 협회에서. 세이프던전 지역까지는.”
“세이프던전은 뭔가.”
“이면귀 님이 던전 관련 지식을 전해준 거 아니었어?”
“그 양반이 내게 전해준 지식은 대략적인 이 세계의 사정이었을 뿐이다. 던전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고.”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늘어뜨린 장채원이 설명했다.
“세이프던전 지역은 간단히 설명하면 던전의 등급과 몬스터 분류가 고정된 곳이야. 안정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지 않지.”
“안정화?”
“그래. 안정화되어 있지 않은 던전은 몬스터가 밖으로 튀어나오거든. 그중에서 굉장히 위험한 던전이나 중요한 몇몇 던전은 각성자 협회에서 엄격히 관리해. 출입도 통제하고.”
“그럼 이곳은 뭔가.”
“던전 지역으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지름길이야. 던전 지역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천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장채원이 차분히 설명했다.
“쉽게 말해 도심 밖엔 세이프던전 지역이, 그리고 세이프던전 지역 밖으로 나가면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가변던전 지역이 있어.”
몸을 구부린 장채원이 바닥에 세 겹의 동심원을 그렸다.
“이 작은 원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라고 치면, 그 바깥에 있는 원이 세이프던전 지역. 그리고 이 마지막 원은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가변던전 지역이야.”
“그렇다면 다른 도시는 어떻게 되어 있나.”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야. 도시 밖은 세이프던전 지역, 그 밖은 가변던전 지역으로 되어 있어.”
“그렇다면 지금 던전 지역으로 가려는 것이군.”
“으응. 얼마 전에 신뢰 하나가 들어온 것이 있거든.”
장채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뒤덮인 입구를 가리켰다.
“신뢰를 처리하기 위해선 때때로 던전에 있는 재료들이 필요해. 보통은 정령수들을 시켰는데…….”
말꼬리를 흐린 그녀가 천마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턴 네가 한번 해봐.”
“본좌가 말인가?”
“그래. 적응할 때까진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녀가 했던 말을 곱씹던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신뢰라는 걸 처리하려면, 던전에서 재료를 구해야 한단 말이지.”
“대체로는.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장채원은 덤덤히 서 있는 천마의 어깨를 두들겼다.
“네가 정령수를 부숴 버렸으니까 이젠 네가 해야지.”
턱을 쓰다듬던 천마가 두 눈을 번뜩였다.
“알겠다.”
* * *
검게 물든 출입구로 안으로 들어가자 깊은 물 속에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자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변하더니, 황량한 폐허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고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반쯤 부서지거나 형체만 보였는데, 마치 먼 미래에 지어진 것처럼 양식이 매우 독특했다.
“이상한 곳이군.”
천마가 서 있는 곳은 멀리 보이는 건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부서진 빌딩 꼭대기였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천마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듣도 보도 못한 건물들이 있는 광활한 숲이나 평원이 펼쳐진 곳도 있었고, 반대편에는 아예 흐릿한 구름이 떠 있는 어두운 공간이 보였기 때문이다.
“흠.”
깊이 숨을 내쉰 천마는 하늘 주변으로 보이는 유리색의 투명한 빛을 가리켰다.
“저 하늘에 떠 있는 빛은 뭔가?”
“저건 실드야. 지금 우리가 있는 세이프던전 경계선에 설치되어 있고, 도심과 세이프던전 경계에도 있어.”
“도심에도 말인가.”
“그래 혹시라도 던전 지역에 있는 몬스터들이 도심 쪽으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각성자들이 힘을 모아 사람들이 있는 도심에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든 거지.”
“아아, 저것이 실드였군.”
다행히 이면귀에게 얻은 지식 중엔 도심을 보호하는 보호막, 실드에 대한 것이 있었다.
그 탓인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드’라는 의미가 쉽게 받아들여졌다.
“아, 저기로 가면 되겠다.”
가변던전의 경계선을 벗어나 폐허 속을 걷던 장채원은 어느 커다란 폐건물 앞에 섰다.
그곳은 반투명한 유리로 된 지붕이 세워져 있었고 아래엔 타원형 모양의 쇳덩어리들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여기가 던전이라는 곳인가.”
“응. ‘주유소’ 라고 불리는 F급 던전인데, 세이프던전 지역에서 유일하게 탁 트여있는 오픈형 던전이야.”
“오픈형?”
“응. 어디 들어갈 필요도 없이, 이 지붕아래 서 있으면 사이드 와인더가 몰려와.”
“사이드 와인더?”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천마를 보며 장채원이 씩 웃었다.
“응, 이곳에서 계속 출몰하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거대한 뱀 모양에 작은 날개가 달려 있는 몬스터였다.
“뱀을 뜻하는 거였나.”
“잡을 수 있겠어?”
장채원의 물음에 천마가 피식 웃었다.
“본좌더러 땅꾼 노릇을 하라는 것이군.”
“그냥 뱀이 아니야. 위험도 50의 몬스터라고. 외피는 강철처럼 단단할 뿐만 아니라…….”
위험도.
정식 명칭은 ‘추정 위험도’ 이다. 몬스터를 상대했을 때 끼칠 수 있는 피해의 추정치.
위험도 50이라면, 평범한 일반인 50명이 학살당할 수 있는 수치였다.
위험도에 관해서 설명하려면 꽤 긴 이야기가 필요한 탓에 장채원도 딱히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
“공력을 쓸 필요도 없다.”
천마 역시 딱히 궁금하지 않은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마칠식!”
앞으로 달려 나가는 천마의 눈에선 시뻘건 혈염광휘가 퍼져나갔다.
“승풍항룡!”
몸을 낮게 웅크린 천마가 펄쩍 뛰어오르며 사이드 와인더의 머리에 주먹을 꽂았다.
콰직!
강철처럼 단단한 외피를 지녔다는 사이드 와인더의 머리가 단 일격에 박살 났다.
“와.”
장채원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괜히 얼굴만 험악한 것이 아니었어. 이 정도면 8급 각성자 정도는 찜 쪄 먹겠는데?”
그리고 안도의 미소도 감추지 못했다.
“아아, 다행이야. 이렇게라도 쓸모가 있어서.”
“무슨 말이냐.”
“아, 아냐. 얼른 이빨 하나를 뽑아줄래?”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사이드 와인더의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예리한 독니는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뭐야? 다 부서졌잖아.”
“그렇게 됐군.”
“좀 살살 치지 그랬어.”
“살살 친 거다.”
“그럼 여기서 좀 기다리자. 이 던전 앞이 사이드 와인더가 잘 나오는 곳이니까.”
10분 후.
“승풍항룡!”
“야, 또 부서졌잖아.”
“생김새와 달리 상당히 약하군.”
“후려치지 말고 좀 살살 해봐.”
“알겠다.”
30분 후.
“또 부서졌잖아.”
“너무 약하군.”
“얼굴 쪽 말고 다른 곳을 공격해 보는 건 어때?”
“뱀은 머리를 잘려도 한동안 움직일 수 있다. 단숨에 머리를 으깨지 않으면 역공당한다.”
한 시간 후.
“성공했다!”
장채원은 환호성을 질렀다.
천마의 일격에도 사이드 와인더의 머리가 다행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빨도 약하군.”
“지금… 뭐 한 거야?”
장채원은 놀란 표정으로 천마에게 다가왔다.
그가 간신히 살살 잡은 사이드 와인더의 이빨을 뽑다 힘주어 부숴 버린 것이다.
“그거 어떻게 부순 거야?”
“어떻게라니. 이렇게 무른 재질이다.”
천마는 손에 쥔 독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자 단단한 독니가 으깨지며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뭐야. 이 녀석…….’
사이드 와인더의 독니는 부식에 강할 뿐만 아니라 강철보다도 단단하다.
각성자들이 가공해 무기로도 사용하는 독니를 과자처럼 으깨버리다니?
“너… 저번에 힘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 내공을 모두 잃어버렸지.”
끼이이이.
그때 하늘에서 괴음이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엑스 키메라?”
그림자를 발견한 장채원이 눈을 크게 떴다.
사자의 상반신에 박쥐의 날개, 말의 다리를 가진 몬스터로, 위험도가 2,000이 넘었다
쿠웅.
땅으로 내려선 엑스 키메라는 천마를 빤히 노려보았다. 마치 네놈이 나의 먹이라는 것처럼.
“이건 또 무슨 잡탕인가.”
“엑스 키메라야. 아까 사이드 와인더보다 몇 배는 더 강한 몬스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엑스 키메라의 시선을 마주하던 천마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럼 이놈은 힘을 조절하지 않아도 되겠군.”
“뭐? 안 돼! 그놈은…….”
장채원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천마의 주먹이 엑스 키메라의 안면에 격중되었다.
꾸엑.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엑스 키메라의 머리통이 하늘로 치솟았다.
위험도 2,000의 몬스터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오오!’
그 모습을 본 장채원의 눈에선 환한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한 천마가, 이 정도의 괴력을 가지고 있다니!
‘이 정도면 C급 던전에 있는 재료들도 수월히 갖고 올 수 있겠는데?’
장채원의 정령수들이 유독 잘 못 하는 것이 바로 던전의 재료 구하는 것이었다.
몬스터 사냥을 꺼리는 그녀의 심령이 영향을 끼친 탓이다.
투툭.
그런데 입을 벌린 채 쓰러진 키메라의 입에서 둥그런 알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게 뭔가?”
천마는 땅에 떨어진 작은 알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햇빛에 반사된 알은 환약 정도 크기에 오묘한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거 유물이야.”
장채원이 씩 웃으며 천마에게 다가갔다.
“던전 몬스터들을 잡으면 때때로 ‘유물’이라는 것이 나와. 이것도 그중 하나지.”
“유물이라.”
천마의 눈동자에서 붉은 빛이 짧게 번뜩였다.
‘독특하군.’
이 세계는 독특하다. 아니, 천마의 입장에선 독특한 수준을 넘어섰다.
무림세계의 문명 수준을 생각한다면, 말을 할 줄 아는 원시인이 현대에 떨어진 것과 다름없다.
만약 천마가 아닌 다른 무림인이 왔다면 이처럼 빨리 적응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엑스 키메라의 유물은…….”
한참 기억을 더듬던 장채원이 손뼉을 쳤다.
“혈액순환 질환에 엄청 특효약이라고 해!”
“그렇군.”
“실망할 필요 없어. 제법 비싸게 팔리니까. 내가 대신 팔아줄까?”
천마는 손안에서 반짝이는 엑스 키메라의 유물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덤덤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갖고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