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수리하는 천마-3화 (3/285)

제3화. 본좌는 천마다 (3)

이 세계는 던전이란 곳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왔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각성자들이 탄생해 그것들을 막아내고 있다.

그 덕택에 마물이 쏟아져 나온다 한들, 세상은 평화로운 편이었다.

또한 인간과 요괴. 그리고 땅을 밟고 살아가는 신, 대지유신들마저 인간세계에 머무르며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 중 요괴와 대지유신들의 존재를 아는 자는 극소수의 권력자들뿐이었다.

“확실히 다른 세계군. 요괴들과 인간들이 사이좋게 살아가는 곳이라…….”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 대부분의 인족들은 우리 존재는 모르니께.”

머릿속으로 전해진 지식을 잠시 음미하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납득했다.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걸.”

사실은 희미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살던 곳에는 어린 소녀가 금강지체를 파괴하고 유성을 끌어오는 일 따윈 없었으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천마가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그럼 당신은 뭔가? 신인가? 요괴인가?”

“글쎄.”

“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건가. 아까 보니 문자 역시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모르지.”

불성실한 대답이었지만 앞뒤로 달린 두 개의 얼굴을 보니, 천마는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럼 돌아가는 방법은?”

“내가 어찌 알겠누.”

“뭐라고? 그럼 본좌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이면귀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엔 시공의 균열로 인해 다른 세계에서 온 몬스터라는 게 있응께. 아, 마물이라고 해야 알아들을라나…….”

“그럼 그 마물들은 어떻게 원래 세계로 돌아가나.”

“돌아간 거 본 적 없는디?”

절망적인 대답이다.

천마의 얼굴이 굳어지자 할아버지는 머쓱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것, 참… 도움이 안 되어 미안하구먼.”

“천만의 말씀.”

천마가 왼 주먹을 오른 주먹에 감싼 채 정중히 포권했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설령 이곳이 다른 세계라고 해도 그에겐 돌아갈 비장의 수가 있었다.

장채원과 천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면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은 무슨. 그나저나 장 사장도 참 마음씨가 곱네그려.”

“네?”

“그토록 아끼던 정령수를 몽땅 부순 사람을 도와주니 말이야.”

“그게 무슨…….”

장채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자 할아버지가 눈을 껌뻑였다.

“몰랐던 겨? 봐 봐.”

할아버지는 반짝이는 식지를 그녀의 이마에 살짝 갖다 대었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하늘에서 커다란 유성이 어느 한옥 건물의 마당에 떨어졌다.

콰앙!

땅에 떨어진 유성은 빛의 도형을 만들어내고, 이윽고 한 사내가 나타났다. 천마였다.

“내상을 입었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은 천마는 문득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거대한 나무에서 오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됐군.”

순간 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영약을 밥 먹듯이 먹었던 그다.

나무에서 쏟아지는 빛이 신령스러운 힘을 가진 영초(靈草)에서 흐르는 것임을 단번에 깨달았다.

“역시나… 그런 건가.”

나무에 다가가자 신비한 힘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마치 투명한 벽 하나가 나무 주변에 둘러싸인 것만 같다.

모든 영초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강력한 효능을 가진 영초들은 때론 기관진식의 대가에 필적하는 진법과 같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방법이 있지.”

횃불 같은 안광을 번뜩인 천마는 힘껏 땅을 박찼다. 그리고 반짝이는 나무를 향해 몸을 날렸다.

“후읍!”

콰앙!

금강지체인 몸을 이용해 나무를 보호하고 있던 신비한 힘을 통째로 부순 것이다.

“크으.”

그의 입에선 또다시 가는 피가 흘러나왔고 어깨 쪽도 시큰거렸다.

금강석보다 단단한 육체에 고통을 느끼게 하다니? 심지어 더욱 내상이 악화된 듯하다.

비틀거린 천마는 나뭇등걸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틀렸군. 영약이 아니었다.”

박살 난 나무 조각엔 육체를 회복시키는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입에 넣어봤지만, 그저 딱딱한 돌을 씹은 것만 같다.

“이이…….”

이면귀 할아버지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장채원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이제 보니 별채가 부서진 것은, 저 고우키 닮은 뻔뻔한 녀석이 부순 것이다.

“정령수. 네가 부순 거였어.”

뿌드득. 고개를 돌린 장채원의 눈동자는 저승사자처럼 변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난 도둑놈을 창고에서 재워주고…….”

“잠깐만. 오해다.”

천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나무를 발견했을 땐 정신이 없었다. 본좌는 그냥 이름 모를 심산유곡에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럼 왜 어제는 아니라고 했지?”

“그건…….”

할 말이 없던 천마는 입술을 내밀며 장엄하게 말했다.

“걱정 붙들어 매라. 본좌는 천마다. 그깟 나무 하나쯤은… 어억!”

단단한 아랫배에 장채원의 주먹이 꽂히자 천마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대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내공이 온전했어도 안되는 거였나.’

배를 감싸 쥔 천마의 눈동자에선 초점이 사라졌다.

말이 금강지체지, 사실상 전설상의 천강지체(天罡之體)와 맞먹는 외공을 이룩한 터였다.

그런데 저 연약한 소녀의 주먹질 한번에 한 쪽 무릎을 꿇다니?

그 때, 분노에 찬 장채원이 울부짖듯 말했다.

“이렇게 되면… 자연재해가 아니라서… 보상도 못 받잖아! 어떻게 할 거야아!”

“장, 장 사장, 난 가볼 테니, 일꾼들 준비되면 다시 연락 주라고.”

당황한 할아버지는 이마에 땀을 닦으며 휑하니 사라졌다.

눈동자가 거의 하얗게 변한 장채원이 뿌드득 이를 깨물었다.

“이… 사이코 변태 입벌구 자식.”

전에 말했던 욕에 알 수 없는 단어가 하나 더 붙었다.

귀기스러운 눈빛으로 천마를 내려다본 그녀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따라와!”

복복 인테리어 매장 내부.

둥근 응접용 테이블에 앉은 장채원의 손엔 커다란 계산기가 쥐여 있었다.

“자, 계산해 보자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천마를 노려본 그녀는 탁자에 놓인 계산기를 빠르게 두들겼다.

“정령수 묘목 가격은 3천만 원이야. 하지만 3년 동안 정령수를 가꿔왔던 비용과 노력의 시간. 그리고 앞으로 일을 못 맡게 되면… 으으으.”

머리를 부여잡은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계산이 안 나와! 계산이!”

천마를 홱 노려본 장채원은 몸을 부들거렸다.

“무엇보다 신뢰(神賴:신의 의뢰)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되었잖아. 이러다간 우리 매장은 영지(靈地)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고!”

“신뢰? 영지?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매장은 영지야. 인테리어 일뿐만 아니라 신들이 의뢰하는 온갖 일을 처리해 주는 곳이라고!”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에선 금세라도 불티가 튀어 오를 것만 같다.

“어거지로 9등급 영지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제 삼 년 정도만 더 일하면… 이룰 수 있었는데…….”

“무슨 말인가.”

“네가 알 것 없어!”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천마를 노려보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인족인 이상, 네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금전적인 보상뿐이야. 정령수가 제 몫을 하려면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신뢰는… 됐고! 정령수를 신뢰에 투입시킬 정도로 키우려면 3년 정도 내 지식과 힘을 주입해야 한다고!”

‘신의 의뢰라.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군’

그제야 천마는 장채원의 무시무시한 힘과 능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입을 꽉 다물고 있던 그녀는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세계에 왔다는 걸 감안해서 최저 비용으로 보상을 받을게. 알겠어?”

“좋다.”

“그래. 시원시원해서 좋네.”

들고 있던 계산기를 내려놓은 장채원이 쌀쌀맞게 말했다.

“딱 1억 원만 물어내.”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펄쩍 뛸 금액이다.

하지만 천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단위가 달라 정확한 금액을 모르겠다.”

“호오, 그렇게 나오신다. 내가 무협지 안 본 줄 알아?”

휴대폰을 꺼낸 장채원은 금 시세를 단번에 계산했다.

“지금 시세로 금 426돈. 즉, 금자 마흔두 냥이야.”

“금자 마흔두 냥? 별거 아니었군.”

“뭐?”

천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굉장히 비싸다고 엄포를 놓길래 아명주 몇 개 정도 가격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금자 마흔두 냥이라니…….”

장채원의 이마에선 지렁이 같은 핏줄이 솟구쳤다.

“갚을 돈은 있고?”

“물론이다.”

천마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마집궁엔 본좌만이 드나들 수 있는 병기고가 있다. 그곳엔 헤아릴 수 없는 상고기병이 잔뜩 쌓여 있지. 마도에서 손꼽히는 거부였던 추금산(秋金山)도 그곳을 보고는, 자신이 가난뱅이처럼 느껴졌다고 할 정도지.”

“그러니까…….”

그녀의 이마에 솟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만마집궁인지 만두집궁인지가 저쪽 세계에 있다는 거잖아.”

“무례한 말이로다. 만마집궁은 마도(魔道)를 창시한 신마께서 직접 지으신 마도제일궁이다. 어찌 그런 불경한 말로 표현하는가.”

“됐고,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냐니.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저쪽 세계에 있는 돈을 무슨 수로 가져올 거냐고?”

장채원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천마를 노려보았다.

헐벗은 의복을 보니 저쪽 세계에 돈이 넉넉히 있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다.

“본좌는 천마다. 이 몸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저쪽 세계에서 돈을 가져올 수 있다고?”

“그건 아니다.”

“장난해?”

“천만에.”

팔짱을 낀 천마는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보였다.

“본좌에겐 돌아갈 방법이 있지.”

“어, 정말?”

꼬르륵.

그때 천마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고파?”

“크험.”

헛기침을 한 천마는 정색했다.

“본좌는 천마다. 칠주야 동안 음식 따윈 먹지 않아도 체력에 아무 이상이 없다.”

꾸르르르륵.

다시 한번 긴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정가 놈과 싸우느라 팔주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했군.”

“맛있게 드십쇼!”

철가방에서 요리를 모두 내린 배달원이 고개를 숙이며 돌아갔다.

둥그런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짜장면과 탕수육이 올려져 있었다.

다행히 돌아갈 방법이 있다고 하니, 장채원이 인심 좋게 탕수육까지 주문해 둔 것이다.

“후루룩.”

둥그런 테이블에 앉은 천마는 둥그런 그릇을 손에 쥔 채 쉴 새 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짜장면 그릇에 담겨 있는 양념과 탕수육 소스까지 모두 흡입한 그는 꺼억 소리와 함께 그릇을 내렸다.

“상당한 맛이다.”

천마는 빈 그릇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장채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깨물었다.

“이뻐서 시켜준 거 아니야. 보상해 준다니까 시켜준 거야.”

“걱정 마라. 확실히 보상해 줄 테니.”

덤덤한 표정을 보건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팔짱을 낀 채 천마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장채원이 말했다.

“근데 거긴 짜장면 없어? 오히려 그쪽이 더 정통의 맛을 낼 것 같은데.”

“비슷한 음식은 있다. 하지만 이만한 감칠맛을 내는 건 먹어보지 못한 것 같군.”

밥도 먹였겠다. 장채원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자, 그럼 그쪽으로 돌아가 돈을 갖고 오겠다는 거지?”

“그렇다.”

“근데 무슨 수로 돌아가? 온 이유도 모른다면서?”

“본좌는 천하마공뿐만 아니라 은밀히 전해져 오는 마문대법까지 모두 연성했다. 그 중엔 시공간에 균열을 일으키는 비법도 포함되어 있지.”

“오오, 너 정말 인간 맞아? 대단한데?”

이야기가 시원하게 진행되자 장채원은 칭찬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말을 잇는 천마의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인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그녀의 물음에 반짝이는 조명을 응시하던 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공을 완전히 회복해야 한다.”

“내공?”

“그렇다. 천지무극통령(天地無極通靈)을 사용하기 위해선 십 갑자에 이르는 내공이 필요하니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천마의 표정을 보아하니 당장은 안 된다는 뜻 같다.

“뭐야? 그럼 당장 못 간다는 거야?”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속에 기혈의 몇 군데가 신비스럽게 끊겨 있어 공력을 전혀 끌어올릴 수 없다. 대체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뭐라고?”

이를 꽉 깨문 장채원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날 속였잖아?”

“뭘 속였단 말인가.”

“아까는 돌아갈 수 있다면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공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제 보니 이 시꺼먼 자식은 남의 속을 뒤집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은 것 같다.

“그런 건 빨리 말해! 지금 누구 놀려?”

“놀리다니? 이해할 수 없군. 어떤 부분에서 그런 생각을 한 건가.”

“당장 보상해 줄 순 없단 말이잖아. 그 말부터 했어야지.”

“그런 건가.”

새삼스레 눈을 깜빡이는 천마의 면상을 보니 더욱 속이 뒤집혔다.

“그럼 어떡할 건데? 난 계속 손해가 발생하는데? 정령수가 없으니 신뢰는 어떻게 처리해? 영지 자격을 박탈당하면 어디서 은총을 얻어내냐고?”

“신뢰는 뭐고 은총은 또 뭔가.”

“신이나 요신들이 우리에게 맡기는 일을 신뢰라고 해. 은총은… 뭐, 네가 알 것 없고.”

장채원의 말을 절반 정도 이해한 천마는 턱을 괴었다.

“그러니까 당장 손해를 보상하라는 뜻인가.”

“그래.”

장채원이 팔을 둥둥 걷어붙이자 천마가 손을 내저었다.

“으음, 기혈이 끊긴 건 본좌의 사정일 뿐이니… 좋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 본좌가 돌아가면 열 배, 아니 100배로 보상하지.”

“100배? 그럼 100억?”

눈을 껌뻑거리는 장채원을 보며 천마가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마정강삭검(魔精鋼索劍)을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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