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본좌는 천마다 (2)
“어헉.”
짧은 신음성과 함께 천마는 눈을 떴다.
“내가 의식을 잃다니.”
살수들이 익히는 냉혼심법마저 익힌 천마. 그의 정신력은 소심줄보다도 더 질기다.
“무공을 익힌 이래, 단 한 번도 의식을 잃어본 적이 없건만.”
주위를 둘러보니 누런 황토벽이 보인다.
날이 밝았는지 창호지가 붙어 있는 나무문 사이로 은은한 빛이 스며들어 왔다.
“대체 여기가 어딘가.”
몸을 일으키자 천장이 쿵 닿는다.
키가 칠 척에 가까운 천마에겐 너무나 낮은 천장이었다.
끼이익.
나무문을 열자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쌓여있다.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습한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인 듯하다.
좁은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천장에서 빛이 쏟아지는 생소한 공간이 보인다.
“으음.”
그곳은 아주 깔끔하게 정돈된 집무실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탁자 위엔 다양한 물건들과 책이 쌓여 있었고, 정 중앙에도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둥근 탁자가 있었다.
“신기하군. 도술사의 집인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화려한 빛들을 바라보던 천마는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빠아아앙.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팔 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이 보인다.
잘 닦인 거리.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쇳덩이들. 독특한 양식의 옷을 입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여긴 대체 어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무렵, 입구 앞에 서 있는 천마를 향해 걸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어젯밤 한옥의 앞마당에서 보았던 소녀였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걸어오던 소녀는 천마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제 일어난 거야?”
“본좌에게 하는 말인가.”
“여기 말고 누가 또 있어?”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건가.”
“아,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그냥 놔둘 수 없어서 잠깐 창고 방에 재워준 거야.”
소녀는 천마가 나온 매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내가 운영하는 매장이거든.”
이제 보니 한옥은 안쪽의 주거지였고, 입구와 가까운 바깥쪽은 매장인 것 같았다.
천마는 나무로 된 고풍스러운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복복 인테리어?”
왜 읽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천마는 난생 처음 보는 글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고 있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인가?”
“한글 몰라? 인테리어 매장이잖아.”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가녀린 소녀의 얼굴과 번듯한 매장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이런 매장의 점주라니. 훌륭하다, 절… 소녀.”
다행히 절구통이라는 단어를 재빨리 삼킬 수 있었다.
“소녀 아니거든? 나 나이 엄청 많다고.”
민망한 표정을 지은 소녀는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 천마에게 내밀었다.
“혹시 몸이 안 좋거나 하면 연락해. 어쨌든 내 잘못이니까.”
“무슨 잘못 말인가.”
“거, 거기 말이야.”
천마의 하음부를 두번이나 강타한 기억을 떠올린 소녀가 얼굴을 붉혔다.
“아프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빤히 바라보던 천마가 중얼거렸다.
“장채원. 소녀의 이름이 장채원인가?”
“소녀 아니라니까.”
“그럼 역시 반로환동인가.”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 장채원을 빤히 바라보던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내공이 상상을 초월하나 보군.”
어젯밤 일을 떠올린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 본좌의 금강지체를 파괴했겠지.’
천마는 놀라움의 연속이였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가 상상하지 못한 오를 수 있는 아직도 오를 수 있는 여지가
“정말 무협지에 과몰입했구나. 너.”
“무슨 말이냐.”
소녀는 가슴과 팔뚝이 드러난 천마의 옷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옷은 집에서나 입어.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아?”
“그런 옷?”
천마는 장엄한 표정으로 자신의 도복을 가리켰다.
“이 광마혈투의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무림에서 제일가는 보의(保依)다. ”
“뭐야, 그게.”
“수화불침에 도검불침은 기본이고, 착장 시 언제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해 주는 공능까지 있지.”
왠지 모를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 같은 모습에 장채원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그래. 일어났음 어서 가.”
천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라고? 어젠 그토록 붙잡지 않았나.”
“그땐 내가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아. 아무리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고 해도 어떻게 지령(地靈)이 보호하고 있는 정령수를 부쉈겠어? 뭔가 다른 일이 있었겠지.”
“뭔가 비싼 물건이라 않았나.”
“아아, 오래되어서 잊고 있었지 뭐야.”
장채원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 보험에 들어놨었거든. 자연재해에 의한 파손은 보상받을 수 있어.”
“으음.”
천마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방긋 웃는 얼굴을 보니 일이 잘 해결되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알겠다. 그리하지.”
“그래그래. 조심히 가.”
천마가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장채원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그런데 묘한 느낌이 든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저 녀석. 아직도 안 갔네?”
웬일인지 천마가 아직도 매장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망연히 서 있는 모습은 왠지 길 잃은 아이처럼 측은해 보인다.
“온전치 못한 정신에 헐벗고 돌아다닌다라…….”
손에 턱을 괸 채 천마를 보던 장채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덩치를 봐선, 역시 산도깨비 계열인가?”
그때 멀뚱히 서 있던 천마가 갑자기 도롯가로 뛰어들었다.
끼이이익!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도로를 달리고 있던 차들이 지그재그로 멈춰 섰다.
천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멈춘 자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뿐이다.
“야, 이. 죽고 싶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안 비켜?”
운전자들이 머리를 내밀고 항의하자 천마가 시뻘건 혈광을 번뜩였다.
“지금 본좌에게 시비를 거는 건가.”
레슬러 같은 덩치를 지닌 천마가 인상을 쓰자 항의하던 운전자들은 도로 쏙 들어가 버렸다.
“각성자인가 보네.”
“쳇, 가끔 저런 놈들이 있지.”
“등급도 낮은 놈 들이 꼭 시민들에게 으스대더라.”
창문을 열고 한 마디씩 내뱉던 운전자들은 천마를 피해 차량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야?”
매장에서 나온 장채원은 도로 한 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천마의 손을 이끌었다.
“너 미쳤어? 도로에서 뭐 하는 거야?”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온 천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것들의 정체가 궁금했을 뿐이다.”
천마가 가리키는 것은 도로를 내달리고 있는 각양각색의 자동차들이었다.
“궁금하다니, 뭐가? 자동차가?”
“자동차(自動車)… 스스로 움직이는 마차란 말인가.”
턱에 손을 괸 천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모르겠군. 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설마, 기억을 잃은 거야?”
“그럴 리가 있나. 단지 이곳이 어딘지 도저히 모르겠다. 만마집궁으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만마집궁?”
장채원은 천마의 복장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중국집에서 일해?”
“의미를 모르겠다. 중국집이 뭔가.”
“짜장면 파는 곳 말야. 음식점에서 일하냐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천마는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어찌나 낭랑하고 걸걸한지 산천초목… 아니, 동네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재밌었다. 으하하하!”
“그래. 아니면 됐어.”
주위를 살펴보던 장채원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래도 이 녀석과 계속 붙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무공을 배우기 전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너무 배고파서 말이야.”
지난 과거를 회상하는 듯 천마는 눈빛이 깊어졌다.
다만, 아주 괴로웠던 기억은 아닌 듯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정신 나간 녀석이라고 보기엔 눈빛이 너무나 맑은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장채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혹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거야?”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던 천마는 그녀를 바라보며 흠칫했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누, 누가 누구보고 제정신이래? 내 말은 그러니까, 하도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하려던 찰나,
“장 사장. 여기서 뭐 하는 겨?”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이 인도 앞에 서 있는 장채원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오늘 아침에 일꾼들 보내기로 했잖여? 근데 하도 안 오길래, 슈퍼에 들를 겸 한번 들렀지.”
“맞다! 아, 그런데…….”
손뼉을 친 그녀는 이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젯밤에 갑자기 별채가 무너지는 바람에 정령수들이 몽땅 부서져 버렸어요.”
“으잉? 정령수가? 그럼 어떡혀? 장 사장, 가게 영지(靈地)에서 탈락되는 거 아녀?”
“괜찮아요. 다행히 보험은 들어놨거든요.”
“으음. 그랬구먼.”
“우선, 외부 일꾼들을 섭외해서 보내드릴게요. 다행히 인족 일꾼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장채원이 웃으며 대답하고 있는데, 문득 식은땀을 흘리며 굳어 있는 천마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왜 그래?”
“왜 그러냐니. 이 노인장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가.”
천마의 손은 할아버지의 뒷머리를 가리켰다.
그곳엔 두 눈을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어르신 얼굴이 왜?”
“노인장의 뒤통수에 다른 얼굴이 달려 있지 않나.”
“아아, 처음 뵌 거야?”
장채원은 해맑게 웃으며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어르신은 이면귀(二面鬼)셔. 요괴들의 길흉화복을 봐주시고, 가끔 점도 쳐주시지.”
“이면귀? 귀신이란 말인가.”
“무슨 소리야. 당연히…….”
말을 하던 장채원은 천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집채만 한 덩치,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 길게 늘어진 송곳니만 있다면 도깨비라고 해도 무방한 면상이다.
“너, 요괴는 맞는 거지?”
“요괴?”
천마는 눈을 껌뻑였다.
“정파 놈들에게 오만 욕을 다 얻어먹어 봤지만 요괴라는 말은 처음 듣는군.”
“뭐? 그럼 눈은 왜 빨간 건데?”
“반극신공을 극성으로 익히면 혈염광휘(血炎光輝)로 인해 눈동자가 살짝 붉어진다.”
천마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새삼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었단 말이야? 이 외모가?”
“무슨 뜻인가.”
“아, 아니. 그러니까… 꽤나 힘들게 살았겠구나 싶어서.”
다급한 그녀의 변명에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이다. 본좌처럼 치열하게 살아온 자는 없을 거다.”
“그, 그래. 그래 보여.”
어색하게 웃던 장채원은 갑자기 눈을 깜빡였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온 거야? 이면귀 어르신의 반대편 얼굴은 어떻게 보는 거고?”
“무슨 말인가.”
“인간이라면서?”
“으음.”
침음을 낸 천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알아듣게 설명해 줄 순 없겠나.”
그런데 할아버지의 뒷머리에서 쿨쿨 잠들어 있던 할머니가 번쩍 눈을 떴다.
“……!”
천마는 흠칫 놀랐다.
지금까지 수많은 강적들과 싸웠지만 안면이 두 개인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눈을 뜬 할머니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가만 보게. 이 녀석…….”
천마를 빤히 바라보던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장 사장, 이 녀석 요괴가 아니여. 다른 세계에서 온 인족(人族)이구먼.”
“네?”
장채원이 눈을 깜빡이자 할머니가 흘흘 웃었다.
“이곳의 인족들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 몸에서 흐르고 있어. 게다가 시공의 파편이 아직도 얼굴에 묻어 있잖여.”
“뭐라고요?”
“다른 세계에서 왔다니? 자세히 설명해 달라, 노인장.”
천마가 앞으로 나서자 할아버지 쪽의 얼굴이 혀를 찼다.
“저런, 각박한 삶을 살았군. 삭막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어.”
고개를 가로젓던 할아버지는 식지를 내밀었다. 손가락 끝엔 연녹빛 광채가 머물러 있었다.
“백 마디 설명보다는 이게 낫겄지.”
“이게 뭔가.”
번쩍! 손가락에 맺혀 있던 연녹빛 광채가 천마의 얼굴을 뒤덮었다.
동시에 둥그렇고 푸른 구체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단편적인 지식들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으으윽.”
지식들이 머릿속을 헤집자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천마의 눈동자에서 붉은 혈광이 피어올랐다.
“이게 무슨 사술인 건가.”
“사술이 아니라 심령에 교량(橋梁:다리)을 만든 거여. 머릿속에 있는 걸 전달할 수 있게.”
할아버지는 고통스러워하는 천마에게 나직이 말했다.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 뭐,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만…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것이니.”
할아버지의 진지한 눈빛을 바라보던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붉게 달아올라 있던 눈빛도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지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