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69)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소신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발. 소신들의 집안에서 공녀를 차출하는 어명을 거두어 주십시요.”

울움바다가 터지며 난장판이 되었다.

마지못해 끌려온 40명들은 꺼이~꺼이! 하며 통곡까지 해댄다.

오랜만에 진귀한 광경을 보게되네.

이 모습을 보고있던 흥선군 이하응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잘난체하던 조정의 관료들이 얼마나 허접한 수준인지를 깨닫게된 것이니 말이다.

“경들은 이래도 과인이 영은각으로 가서 청사신들에게 무릅을꿇고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라고 요청하고 싶은 것인가?”

“.....”

이제는 대꾸를 못한다.

여기서 고집을 부리는 놈이나오면 너네 집안부터 공녀차출~ 이거니까.

“그대들은 아직도 청을 상국으로 생각하고 두려워 하는거 같은데. 어제 과인이 말한대로 청은 더이상 과거와같은 대제국도 아니고 내부로는 썩어가고 있소. 그리고 외부로는 양이들과의 전쟁에서도 대패했고 그걸 조선에게도 숨기던 자들이요. 현재 청국의 상태가 이럴진데 조선이 뭣때문에 머리를 숙여야 하겠소? 한가지 알려줄게 있소. 청의 팔기들 2000명을 전멸시킨 조선군 부대는 기껏해야 500명 남짓에 불과했소.”

“그것이 사실입니까?”

“과인이 거짓말을 하는거같소? 여기 병조참의인 박규수에게 물어보시요.”

“전하의 말이 사실이요. 조선군은 청의 팔기보다 더 우수한 무기와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한 강군이요.”

박규수가 설명했고 상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조선군은 상대보다 적은 숫자로도 청의 팔기들을 섬멸했는데. 그대들은 아직도 청을 상국으로 생각하며 두려워 한다는 것인가?”

“조선군이 그처럼 강했다니?”

엎드린 관료들이 웅성거렸다.

이제는 그들도 상황을 깨닫게된 것이다.

선두의 노친네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지만 더이상 개소리는 못하고 있었다.

뒤쪽의 사간원과 홍문관의 관료들은 두명의 강압에 끌려와 상소한것을 후회하는 표정이다.

이제 두명 노친네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앞으로 사간원과 홍문관 관료들은 내말에 죽고사는 신세일 뿐이다.

“그대들이 어리석게 소란을 피운것에 대해서는 이번만 봐줄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소란을 피운다면 그때에는 조금전 과인이 말한것을 실행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사간원과 홍문관 관료들이 살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김좌근이 자존심 세우면서 내앞에 엎드리지 않고, 이런일을 배후에서 조종한걸 보니까 한가지는 확실하다.

김좌근은 내가 만들어논 함정에 반드시 걸려든다는것.

지금이라도 내앞에 머리를 쳐박으면 최소한의 기회라도 생기는데, 그걸 걷어찼으니 남은건 하나뿐이다.

* * *

“이제부터 저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는군.”

밤시간이고 희정당에서 서류를 검토하며 시간을 보냈다.

며칠전 청나라 사신단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개박살 내놓았다.

이후에 벌어질 상황들은 충분히 짐작되었다.

그리고 내쪽에서 준비할 것들은 두가지다.

첫번째는 청나라 놈들이 보복을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

두번째는 김좌근 세력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청과의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가기전, 조선왕의 실권을 획득하고 내부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방해되는 세력은 김좌근과 안동김씨 패거리다.

그때문에 청의 사신단을 이용해 미끼를 던졌다.

이윽고 송내관이 밖에서 말했다.

“전하. 예조판서가 도착했습니다.”

“들라해라.”

문이열리며 예판인 장우영이 들어왔다.

요즘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좋은 현상이다. 내부로 들어온 예판을향해 질문했다.

“청나라 사신단은 아직도 영은각에서 지내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전하.”

장우영이 대답했다.

이 자식들이...!

볼일이 끝났으면 본국으로 돌아가던지 할것이지.

며칠째 조선에서 뭉기적 거리고 있는거야?

그러나 강제로 쫓아내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해서 놔두었다.

대신 장우영을시켜 동태를 감시하게 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지금까지는 특별한 행동없이 영은각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선의 밥상이 입에맞는 모양이군.”

“아마도 허기를 채우기위해 억지로 먹는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장우영이 미소지었다.

과거에 청에서 사신들이 영은각에오면 예조판서인 장우영이 접대했다.

사신단의 온갖잡무는 물론이고 청나라 놈들의 비위까지 맞춰야 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사신들 앞에서 어쩔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얼마나 스트레스 였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그뿐인가? 과거에는 청 사신들을 접대한다고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영은각으로 데려가는 일도 했다.

그것이 장우영에게 얼마나 치욕을 안겨줬을지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임금이 사신단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박살을 내버렸고 영은각에 쳐박아 버린것이다.

얼마후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예판께서는 내일 과인이 지시한 일을 해줬으면 하는군요.”

“어떤 것입니까? 전하.”

“관원들을 데려가 영은각 앞에있는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철거하도록 하시요.”

“그것이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요. 청의 사신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줘야 하지않겠소. 조선이 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말이요.”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장우영이 곧바로 대답했다.

안그래도 부셔버릴 영은문이다.

기왕이면 영은문을 박살내고 그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것도 좋겠지.

실제 역사보다 수십년 빠르지만 말이야.

영은문은 조선에게 치욕의 역사를 드러내는 증거다.

영은문(迎恩門)을 세운 본래의 목적.

이름에서도 알수있듯 중국이 조선에게베푼 은혜에 감사함을 표시한다는 의미가 담겨져있다.

조선은 중국을 주인으로 모시고 영원히 노예처럼 살겠다는걸 맹세하는 증거다.

이처럼 굴욕적인 영은문을 놔둘수는 없는거.

그 때문에 조선말기의 개화파들은 영은문을 박살냈고 그자리에 독립문을 세운것이다.

독립문의 본래뜻은 조선이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는것.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된다는걸 표시하는 증거다.

그것을 수십년 일찍 한다해서 문제될것은 없지.

동시에 이것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알려주는것도 필요한 것이다.

“이제부터 조선의 백성들은 상국으로 생각했던 청나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것이요.”

“전하의 대의를위해 소신, 장우영 신명을 바치겠나이다.”

그가 머리를 바닥에 닿으면서 외쳤다.

음성에는 결의가 담겨져 있었다.

* * *

“자네들은 어딜 가는거야?”

“소식을 못들었나?”

“뭔데 그러나?”

“전하께서 어명을내려 엄청난 일을 하신다고 하네. 지금 도성내부가 난리야. 아무튼 가보면 알게될거야.”

동료를따라 김진표도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침부터 한양내 백성들 사이에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이 많이다니는 대로변에 새벽부터 붙여진 공고문 때문이다.

더 많은 백성들이 알수있도록 정음(한글)으로 쓰여진 것이다.

공고문은 여러장소에 붙여졌다.

그것을읽은 백성들은 놀랐다.

그럴것이 한양의 백성들에게 영은문이 어떤 곳인지는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성리학 탈레반이 된 양반 유생들은 그것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던 조선이 절대해서는 안될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후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외곽에있는 영은각 주변이다.

영은문은 영은각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백성들은 영은각에서 지내는 사신단을향해 분노의 감정까지 드러내었다.

“단시간에 이정도 숫자의 도성인들이 모여들다니.”

“그만큼 한양의 백성들이 뒈놈들에게 갖고있는 분노가 상당하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예조정랑이 대답했다.

그리고 예조판서인 장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종의 어명을받은 장우영은, 휘하의 예조관원들, 그리고 임금의 친위대에 속하는 호위청의 부대들도 동원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치욕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이다.

그순간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늘어뜨린 양반과 유생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도 새벽에 붙여놓은 포고문을읽고 득달같이 온것이다.

다만 이들이 온 목적은 달랐다.

선두의 유생들이 따지면서 소리쳤다.

“대감께서는 무슨짓을 할려는 것이요?”

“전하의 어명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저자거리에 붙여져있는 공고문을 보았소. 그런데 상국인 대청제국의 은혜를 표시하는 영은문을 철거하겠다니! 지금 제정신인 것입니까?”

“이미 결정된 사항이요. 방해하지 마시요.”

장우영이 매몰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대기중인 병사들에게 신호했다.

호위청 병사들이 신속하게 앞으로 나섰고 영은문 철거반대를 외치던 양반과 유생들을 밀어냈다.

몇명은 떠밀리며 바닥에 나뒹굴었고, 청나라의 은혜가 어쩌구 하다가 병사들에게 질질끌려서 나갔다.

이것을보던 백성들은 유생들의 작태에 분노를 일으켰다.

“조선의 사대부가 뒈놈들에게 아부하는 꼴이라니!”

“저러고도 양반이라고 할수있나?”

“저것은 임금님의 어명으로 하는것인데. 어명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백성들이 소리쳤다.

이런 상황을보며 장우영은 미소지었다.

‘이것이 전하의 신묘한 계책이구나.’

장우영은 감탄했다.

이윽고 대기중이던 관원들을향해 힘차게 명령했다.

“뭣들하느냐? 조선의 수치와도같은 저 흉물을 당장에 없애라!”

“예이!”

관원들이 대답하며 나섰다.

그들은 영은문을 박살내기위한 도구들을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잠시후 수천명의 한양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업을 시작했다.

쾅! 콰쾅! 힘차게 망치를 두들겼다.

그때마다 백성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굉음과 함성은 영은문 근처에있던 영은각과 내부에있던 사신단에게도 들렸다.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리!”

“무슨 일인데, 소란스럽게 구는거냐?”

식당으로 들어온 부하를향해 양무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사신단들은 장우영이 제공해준 식사를 하고있던 중이다.

식단은 초라했고 밥맛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저 허기를 채우기위해 겨우먹는 중이다.

조선에 왔는데 완전히 개털신세다.

그럼에도 조선을 떠나지 못한것은 다른 이유때문이다.

조선왕에게 굴욕까지 당했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황제는 물론이고, 천기대신 주광비의 분노를 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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