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69)

병조판서가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그리고 불신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김좌근과 호조판서를향해 고개를 저었다.

병조판서의 강경한 대응을보자 김좌근의 표정도 약간 변했다.

처음에 호판과함께 병조판서 집으로 왔을때에는 분노로 얼굴마저 시뻘겋게 변해있던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 생긴것은 병조판서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고 책임을 물을 생각이였다.

그런데 상황을보니 병조판서는 일처리를 나름 잘했다.

그가 보낸 변재상에 대해서는 김좌근도 기억했다.

몇년전왔던 청국의 사신단을 잘 영접하고 한양까지 호위해 오청나라 사신단이 칭찬까지했던 것이다.

그만큼 사신단의 비위를 잘 맞추고 비굴하게 처신하는걸 잘하던 놈이였는데.

때문에 병조판서도 이번에 그를 보냈는데 이런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병판대감이 적임자를 보낸것은 사실인데, 대체 무슨이유로 상국의 칙사단이 과거와 다르게 이처럼 빨리 한양에 도착한다는 것이요? 청의 사신단이 통과할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각지역 수령들과 관찰사들에게도 칙사단을 환영하기위한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라고 통지를 보내놓았는데.”

“맞습니다. 칙사단이 지역의 수령들에게 환영과 접대를 받으면서오면 족히 세달은 걸리는 여정입니다.”

호조판서가 대답했다.

“그런데 병판대감. 경이 파견한 영접단과 변재성한테 다른 전갈은 받았소?”

“얼마전 전령을통해 받았습니다. 상국의 칙사단이 도착할 신의주 나루터에 100명의 영접단 병사들과함께 무사히 도착했고, 칙사단을 맞이할 준비중이라고 말이지요.”

“모든건 정상적이군. 하지만 그뒤에는 어떻게 되었소, 추가로 온 전갈은 없었소?”

“아쉽게도 아직 추가적인 연락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예정대로 진행중이라 그에게 모든걸 맡겨두었는데...”

대답하던 병조판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중간에 무슨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수조차 없었다.

한동안 김좌근과 측근들이 끙끙대는 사이, 아침이 밝아오는 중이다.

때문에 이후의 대응은 상황을 좀더 파악한뒤에, 비변사에서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 * *

“이런 개같은 경우가 있다니!”

분노로 가득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양무는 눈앞에 차려진 식탁을 엎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대청제국 황제의 대리자인 자신들이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한다니.

처음에는 강행군을통해 영은각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탈진했던 양무였다.

그래도 하루정도 휴식을 취하고 동시에 자신들을 개처럼 끌고왔던 간도정찰대도 가버리자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간도정찰대와 박민준이 있을때에는 찍소리도 못하고, 숨을 죽이다가 이제서야 기세가 등등해지는 상태다.

무엇보다 지금은 영은각이고 호위대인 팔기들도 무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소. 일단은 허기라도 채워야하지 않겠소?”

“지금 밥이 넘어가게 생겼습니까?”

양무가 동료에게 핀잔을 주었다.

성질내던 그였지만 배속에서 꼬르륵-소리가 터져나왔다.

할수없이 밥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입에다 쑤셔넣었다.

영은각에 도착해서야 식사다운 식사를 해본것이다.

그전까지는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잠도 허름한 초옥에서 잤다.

매일마다 강행군의 연속이였다.

조선 병사들이먹는 주먹밥을 나눠먹어야 하는 신세였다.

지금까지 태어나 이런 개고생은 처음이였다.

“오늘은 조선왕의 궁궐로 갈것이요. 그때 조선왕에게 우리들이 왜 왔는지 그리고 대청제국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요.”

“듣기로 조선왕은 즉위한지 일년도 안된 애송이라고 하는데. 대청제국 사신들을향해 이따위 취급을 하다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 놈이군요.”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촌놈이라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이요. 그리고 지금 조선왕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등비가 당황하며 질문하였다.

그에반해 조선사정을 좀 알고, 과거에도 사신단으로 왔던 양무가 기세를 높이며 말했다.

“조선에서 권세를 쥐고있는건 안동김씨 일족이요. 그들은 현재 조선내에서 중요한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소.”

“이제서야 경이 말한것이 이해되는군요. 조선왕놈이 허수아비라는 뜻이.”

“그렇소. 왕족의 피가 섞여있다해도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놈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왕이되겠소? 모든것은 조선에서 실권을 쥐고있는 안동김씨 일족들이 허수아비 왕을 세우기위해 벌인 것이요.”

“허수아비 신세인 조선왕놈이 뭣때문에 이런 미친짓을 벌인다는 것입니까?”

“어린 놈이니까 객기를 부리는 것이고. 조선에있는 다른 세력들이 애송이놈을 배후에서 조종해 그런 것일수도 있소. 아니면 그 허수아비 놈도 알지못하는 상태에서 이런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말이요.”

“하긴 조선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일이 생길수는 없지요.”

등비가 양무의 말에 동조했다.

수백년동안 대청제국에게 굽신거리며 눈치보던 조선이 갑자기 변한다니?

생각조차 힘들었다.

자신들이 이런 푸대접을 받은것.

뭔가 숨겨진 이유가 있을것이라고 판단했다.

조금후면 창덕궁으로 입궐한다.

그리고 황제의 교지를 펼치고 조선왕을 상대로 큰소리를 쳐대면 끝이다.

애송이왕과 조선의 대신들은 고양이앞의 쥐새끼처럼 벌벌 떨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이런 착각속에서 창덕궁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였다.

투견, 흥선군 이하응의 활약

“예판(예조판서)이 잘해주고 있군요.”

“하오나 전하. 청의 사신들을 너무 푸대접 한것이 아닐까 걱정됩니다.”

“경들은 사신단이 가져온 황제의 문서와 내용을 본다면 그들을 영은각에서 지내게 해준걸 후회할지도 모를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희정당에 모인 신하들이 쳐다보았다.

이미 병조에서 활동하던 박규수는 예상한 표정이다.

청의 사신들을 인솔해 창덕궁으로 데려오는 예조판서 장우영에게도 언질을 주어놓은 상태다.

이번에 온 사신단 놈들은 조선을 털어먹고 빨대까지 꽃을 생각이다.

“이제 경들은 청의 사신들을통해 그들이 어떤 족속들인지를 알게될 것입니다.”

“.....”

신하들이 숨을 죽였다.

가장 큰 기대감을 느끼는건 내쪽이다.

놈들을 어떻게 박살내면 좋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미 머리속에는 대략적인 계획이 들어가있다.

얼마후 예조관원과 무관이 들어오더니 보고하였다.

“전하. 사신단이 궁궐에 도착했다는 전갈입니다.”

“수고했네. 이제부터 그들을 맞이하러 가야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났고 출발준비를 하였다.

송내관이 호위 무관들을 대동시켰다.

그들과함께 선정전으로 향하였다.

과거에 청의 사신들이오면 조선왕은 창덕궁의 대전인 인정전에서 사신들을 맞이했다.

그뿐인가? 왕이 용상에서 직접 내려왔다.

그뒤에는 사신이 전해주는 청황제의 교지를 무릅을 꿇으면서 양손으로 받아야했다.

중국에대한 사대주의가 뼈속까지 새겨진 조선이 보여줬던 비굴한 짓거리다.

이번에는 다르다.

때문에 일부러 사신들을 만나는 장소로 선정전을 선택했다.

인정전에 비하면 작은곳이고 약식조회를 하는 장소다.

그래도 규모는 적당하기 때문에 중요한 신하들은 대부분 참석할수 있었다.

나의 측근들인 영의정과 흥선군 이하응.

박규수를 포함한 공조판서와 몇몇 관료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잠시후 허겁지겁 들어오는것이 김좌근을 선두로하는 패거리들이다.

김좌근이 나에게 시선을 향하며 노려본다.

오늘의 시선은 과거와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나를 허수아비 임금으로 생각하며 깔보며 무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듯 분노로 가득했다.

일부러 그 시선을 무시하며 말했다.

“어서오시요. 이판대감. 오늘 창덕궁에 청의 사신들이 도착하는 문제로 경의 조언을 듣고 싶었는데, 자리에 안계신거같아 아쉬웠습니다.”

“그것이... 사실은 소신이 업무가 바빠서 급한 소식을 접하지 못했던거 같습니다.”

김좌근이 대답하며 표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뒤를따라 들어온 측근들도 상황파악을위해 두리번 거렸다.

잠시 숨을고르던 김좌근이 질문했다.

“소신이 듣기로, 보름전 청의 사신단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벌써 한양까지 온것입니까?”

“글쎄요. 아마도 사신단에게 피치못할 사정이라도 있는거 같군요.”

일부러 모른척하며 둘러대었고 김좌근이 당황했다.

이것이 심리전이지.

진실과 가짜를 교모하게 섞어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는것.

나의 대답에 뭔가를 생각하던 김좌근이 다른부분을 꺼내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청의 사신단이 영은각에 도착했는데도 그들을 마중하러 영은문으로 가지 않으신 것입니까?”

“예조판서가 과인대신 영은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청의 사신들을 마중하고 창덕궁까지 안내하기로 하였소.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청제국은 조선의 상국입니다. 황제폐하를 대신해 온 사신들인데 그들을 조선국왕이 마중하지 않는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법도라... 만약에 청의 황제가 한양까지 온다면 과인이 마중을 나가는것이 법도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황제도 아닌데 뭣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이판께서는 궁궐내 큰어르신인 대비마마(순원왕후)께서 사신들을 마중하는 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

나의 반격에 김좌근의 표정이 굳어졌다.

과거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조선내 최고 권력자가 영은문에가서 사신들을 마중했다.

대개의 경우에는 조선국왕이기 때문에 임금이 가는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의 경우는 어떤가?

내가 임금으로 등극했지만 실제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다.

김좌근의 주장대로 한다면 순원왕후가 사신들을 마중하기위해 영은문까지 가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때문에 김좌근도 말을 잘못 꺼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내가 던진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상대가 미끼를물고 당활할때, 내쪽에서는 전투적인 사냥개를 보내면 된다.

그 인물이 누구일까?

이런 때를위해 준비한 흥선군 이하응이지.

“이보시요. 이판대감! 말이 심하지 않습니까? 조금전 이판대감의 말에따르면 궁궐의 큰어르신이신 대비마마를 영은문으로 보내자는 소리인데.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발언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대왕대비께서는 병환과함께 거동이 불편하시어 궁궐밖 출입도 제대로 못하시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망언을 하시는 것입니까?”

역시 흥선군 이하응이다.

상대가 헛점을 드러내면 파고들줄 안단 말이지.

이하응이 스타트를 끊자 다른 신하들도 합세를 시작했다.

그러자 트집을 잡았던 김좌근과 패거리들이 반박을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 나의목표는 김좌근 너가 아니다.

여기에 도착하는 청의 사신들을 요리하는 것이니까 말이지.

이렇게 논쟁이 격화될때는 영의정이 나서는게 최고의 타이밍이다.

“지금 사신들이 궁궐로 오고있는데 경들은 그런걸 따질때 입니까?”

영의정이 나서자 장내는 침묵으로 변했다.

그가 내편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든든했다.

김좌근도 골치아픈데 의정부 핵심인 3명의 정승들까지 임금의 발목을 잡는다면 해결방법이 없을 정도다.

영의정이 중재자로 나서며 논쟁에 참가한 양쪽편을 꾸짓었지만 김좌근 세력에게 핀잔을 주는것이다.

그때문에 김좌근이 영의정을 쏘아보았다.

임금이고 뭐고 눈에뵈는게 없는 놈이다.

처음에는 김좌근을 포함해 안동김씨 세력에대해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해 물러나게 할 생각이였다.

왜냐하면 김좌근이 나의 양어머니이자 궁궐의 큰 어른인 대왕대비(순원왕후)의 남동생이란 사실때문이다.

거기다 나에게는 촌수로 작은 삼촌이되는 것이고, 김좌근에게 임금인 나는 조카뻘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었다.

때문에 나의 친위대인 호위청이나 금군이 강력한 백두철포나 현무철포로 무장하고 조선내 최강의 전투력을 가졌어도, 김좌근을 한방에 처리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 사이에 몇번정도 신경전은 있었지만, 어느날 내가 수렴청정을 진행중인 순원왕후를 건너뛰어 김좌근을 포박하고 목을 친다면?

그뒤부터 순원왕후와 나의 사이는 하루아침에 개판되는 것이다.

순원왕후가 나에게 친밀감이 있다해도 김좌근이 나랏돈을 착복하고 부패관료 죄목으로 목을 칠수는 없고, 순원왕후도 그걸 허락할 가능성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후부터 전개되는 상황을통해 김좌근은 스스로 무덤을향해 뛰어들게 된다.

지금까지는 순원왕후 뒷배로 나의 칼춤에서 무사할수 있었지만, 더이상은 그것도 힘들거다.

‘어차피 네놈의 명줄도 얼마남지 않았다. 그동안 몇번이고 죽일수 있었지만 그래도 좀 봐줬는데. 이제는 마지막이다.’

김좌근을향해 냉소를 보내었다.

얼마후, 수렴청정을 맡고있는 대왕대비(순원왕후)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왔다.

그녀의 안색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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