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69)

“행수님! 볼때마다 왜국의 은괴들은 품질도좋고 물량도 상당히 많군요.”

“듣기로는 나가사키에있는 데지마(出島)에서도 화란(네델란드)쪽 상인들과 거래할때 지금처럼 은괴를 쓴다고 하더군. 다만 화란 상인들이 가져오는 물품들은 더 신기하고 가격도 비싼것들이 많네. 그래서 왜국에서 생산되는 은들이 그곳을통해 매년마다 엄청나게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하더군.”

“만약에 조선이 화란들처럼 왜국에 데지마같은 개항지나 상시 교역소를 갖게된다면 상당한 양의 은괴를 우리들 해남상회가 챙길수도 있을텐데 말이지요.”

“서총관의 말처럼 그런일이 생겼으면 좋겠네.”

방동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한 데지마는 화란(네델란드)상인들을위해 특별히 개방된 곳이였기에 해남상회가 끼어들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데지마에서 거래되는 무역규모는 상당했다. 방행수로서는 조선이 지금까지 상업을 천시하면서 이런 엄청난 이득과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것이 안타까울 뿐이였다.

서총관이 은괴가든 상자들을 챙기는 사이 나카노는 방행수에게 머리를 굽신대며 시미즈의 시체를 처리하도록 명령했다.

“전원 승선해라!”

물품하역과 거래가 완료되자 해남상회의 인원들이 탑승을 시작했다.

시간은 새벽으로 접어들었다.

날이 밝기전에 떠나는것이 중요했다.

이윽고 뱃길을 잘아는 오자와가 선두쪽 선박에 자리를잡고 안내를 시작했다.

* * *

어둠에쌓인 골목을향해 세명의 사내들이 이동했다.

그들의 옷차림은 북경에서 살고있는 평민들과 비슷했다.

누군가 그들을 발견해도 청나라 사람이거나 중국한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조선인들이다.

철종이 비밀리에 결성한 첩보조직 비호국의 요원들이였고 실력도 뛰어났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면서 유사시에는 각종 무기술에도 능통했다.

또한 목표대상을 미행하는 기술.

비호국 요원들이 사용하는 암호기술도 완벽하게 습득한 상태다.

이들은 북경으로 침투한뒤 자연스럽게 서민들 틈속에 파고들었다.

장사꾼처럼 행세했고 때로는 거지의 옷차림으로 북경내를 떠돌기도 했다.

필요한 첩보들을 수집하기 위한것이다.

한편 이들이 사용하는 은신처는 북경의 시내에서 떨어진 동쪽에 위치한 장소다.

겉으로 보기에 허름한 움막이나 초가집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부에는 미로처럼 지하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면 신속한 탈출도 가능했다.

비호국 요원들은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첩보원이라해도 좋을것이다.

상대를 회유하고 공작하는 방법.

유사시에 신분을 숨기는 방법과 침투와 탈출등등.

모든것이 비호국에 하달된 활동과 지침서대로 움직이는 상황이다.

지침서는 철종의 손을거쳐 검토되고 상세하게 보완되었다.

세명은 혹시라도 있을지모를 미행을 방지하기위해 몇차례 더 골목길을 움직였다.

잠시후 은신처에 도착한 그들의 측면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곰이 동굴에서 먹는것은?”

“쑥과 마늘!”

한명이 대답했다.

어둠속에서 다른 사내들이 나타났다.

북경에있는 비호국의 은신처를 지키는 요원들이다.

암구호를 모르는 적이 나타났을때는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이 주고받은 암구호는 조선인들이라면 금방 기억하고 사용할수 있는 것이다.

그럴것이 조선의 태고적 선조이자 단군신화에 나오는 내용이기에 한번만 들어도 금방 기억한다.

그에반해 중국인들은 뭣때문에 곰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었는지를 이해조차 불가능할 것이니 말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청풍대장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대답한 세명은 은신처 내부로 향하였다.

안에는 도착한 다른 조직원들도 보였다.

북경에서 활동하는 비호국 요원들은 청풍대-라고 불린다.

숫자는 수십명에 이르렀고 지휘관은 청풍대장이다.

한편 북경에있는 은신처에는 지하의 무기고도 있었다.

여기에는 요원들이 사용할수있는 최신형의 뇌홍(퍼커션캡)식 보총과 짧은 총신의 단혈포(전장식 권총)도 보관중이다.

그외에 암살작전에 사용되는 무기들과 신분위장을위한 다양한 서류와 장비들까지, 청풍대의 은신처는 첩보활동을위한 최고의 비밀기지중에 하나였다.

“모두 모였군.”

잠시후 청풍대장인 김노진이 나타났다.

소집된 인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시선을 향했다.

“전하께서는 연경(북경)에서 활동중인 청풍대와 자네들을향해 칭찬을 하셨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청풍대장의 말을듣자 요원들이 감격했다.

그들은 조선에대한 애국심.

임금에대한 충절로 첩보원 생활을 해오는 중이다.

언제 신분이 들킬지 모르는 두려움.

하지만 낯선 이국땅에서의 고난도 그들의 결의를 꺽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임금이 자신들을 대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있는 그대들이 임무를 충실하게 해주었기에 전하께서는 큰일을 도모할수 있게되었다. 하지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앞으로 해야할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

요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에서 활동하면서 그들은 많은것을 보고 느끼고 있었다.

조선에서 볼때 청제국은 거대한 존재였다.

그렇게 강해보이는 청제국도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고 곳곳에 약점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을 지원해주는 임금은 천리안이라도 가진것처럼 손바닥안에서 살펴보고 있었다.

해가 바뀌어 청제국에 새로운 황제가 나올것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들어맞았다.

청풍대 요원들은 철종에게 무한에 가까운 존경과 충성심을 가졌다.

“전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하달하셨다.”

청풍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듣고있던 비호국 요원들은 경악했다.

상부에서 내려온대로 실행하면 어떤상황이 벌어질지 뻔하기 때문이다.

“대장님의 지시대로 작전이 진행되면 연경(북경)에서는 한바탕 혼란이 일어나겠군요.”

“바로 그 부분이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청나라의 대신들이나 새황제도 날뛸거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전하께서 예상하고 계시는 부분이다. 하지만 조선은 강해지고 더이상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전하께서는 이번 기회를통해 새로운 것을 준비하시는거 같다. 우리들이 해야할일은 전하의 소망대로 빈틈도없이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요원들이 대답했다.

그들이 해야할 일은 막중했다.

지금까지는 북경에서 활동하며 기밀정보를 수집하는 역활을 하였다.

그러나 첩보작전은 정보만 수집하는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적에게 역정보를 흘리거나 내분을 일으키고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제부터 비호국의 능력이 발휘될 순간이였다.

심리전을 사용하다

쏴아아. 150명의 국제유학생들이 탑승한 마리너호가 파도를 헤치며 나아갔다.

구형이지만 마리너호는 내부에 증기보일러를 장착한 기선이다.

그렇기에 갑판에 배치된 인도인 선원들은 교대로 움직이며 석탄을 증기기관에 넣었다.

화르륵! 석탄이 쌓여있고 증기보일러가 장착된 엔진실은 후끈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때문에 더위에 익숙한 인도인 선원들도 동료들끼리 돌아가며 삽으로 석탄을 퍼넣는 작업을 한것이다.

텅텅텅! 엄청난 열기와함께 증기보일러의 피스톤이 상하로 움직일 때마다 굉음이 흘러나온다.

갑판 아래쪽에는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톱니축에의해 회전운동으로 바꾸는 장치가 있었다.

이것을통해 마리너호는 선체양쪽에 달려있는 원형수차가 회전하며 육중한 증기선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것이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조선인들은 정말로 친절하군요.”

“같은 배를탄 입장이니 서로 돕는게 당연합니다.”

국제유학생들이 인도인 선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마리너호를타고 영국으로 가는 항해기간동안 정대상과 박상호, 그리고 국제유학생단에 소속된 조선인들의 견문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항해기간에 발생한 여러가지 어려움과 고난도 선원들과 함께했다.

증기기관에 석탄을넣는 작업은 고된 일이였고, 이것도 조선인 유학생들은 삽을들고 석탄을 넣는일도 도왔다.

심지어 유학생단의 대표인 정대상 마저도 주저없이 하였다.

이런 경험을통해 정대상의 옷과 얼굴에 석탄가루가 뭍고 하였지만 정대상은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정대상은 시커먼 석탄에 불이붙고 연소하면서 엄청난 열을 낸다는것.

그것이 증기기관의 내부에있는 물을끓이고, 수증기의 강력한 압력을통해 대형수차를 움직인다는 원리까지도 알게되었다.

‘그러고보니 조선에도 석탄을 캘수있는 탄광들이 군데군데 있다고 들었는데, 특히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와 평안도에도 탄광지대가 있으니 조선도 이후에 증기선들을 도입하면 전세계의 바다를향해 나아갈 기회가 얼마든지 생긴다.’

증기보일러에 석탄을넣는 작업을하며 깨달은 것이다.

지금 조선에서 땔감이나 연료용으로 사용하는건 여전히 목탄이나 나무를 도끼로쪼갠 장작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실용학문에 눈을뜬 정대상은 마리너호같은 증기선이 사용하는 석탄을 캘수있는 탄광들이 조선에도 있다는건 알았다.

“이제는 자네도 보통의 영길리국 젠틀맨처럼 보이는군.”

“그런가? 아직도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전하의 말씀대로 영국에가고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는 것이니, 영길리인들의 복식을하고, 그들의 음식의 먹으며, 그들이 쓰고 다니는 이런 중절모도 착용해야 되겠지.”

박상호가 대답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갑판에있는 정대상이나 박상호는 영국인들의 슈츠(Suits)와 중절모까지 쓴 상태였다.

두사람만 그런것이 아니였다.

나머지 국제유학생단의 인원들도 한달전에 대대적인 단발식을 한뒤에 영국인들의 복장을 입으며 익숙해지는 과정이였다.

조선인들이 착용한 영국식 복장들은 선장인 루퍼트의 도움을받아 항해도중에 들른 영국령 항구들에서 구입한 것이다.

무엇보다 정대상과 박상호는 영국이 전세계의 곳곳에 항구와 거점을 마련해두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전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해양제국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모습이고 부러움마저 들었던 것이다.

* * *

“선장님. 드디어 영국이군요.”

“오랜만에 고향으로 복귀하는 순간이지.”

1등 항해사인 아놀드를향해 대답하던 루퍼트의 음성마저 떨렸다.

그럴것이 선장인 루퍼트를 포함한 영국인 간부선원들.

그들은 몇년만에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오는 상황이다.

이전까지 영국령 동인도회사에 속했던 마리너호는 광저우와 말라카해협의 동남아지역, 그리고 인도의 몇몇 항구를 왕복하는 항해를 주로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중국의 남쪽항구 광저우를 출발해 인도를 거치고 중동지역을 통과하고 항해루트를 아프리카 대륙으로 잡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두고 수많은 선박들이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크게 돌아가야 했다니.”

“어쩔수없는 상황이지! 지도상으로 가깝지만 홍해와 지중해는 육지로 막혀있는 곳이니까.”

선장인 루퍼트가 아놀드와함께 항해용 지도를 보았다.

조금전 아놀드가 가리킨 부분은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육지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에서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는 장소다.

하지만 지금 시기, 중동의 혈맥이라고 불리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홍해와 지중해 사이에있는 육지의 길이만도 만만치 않았고, 그곳을뚫어 인도양과 지중해를 연결한다는건 꿈속에서나 가능할 법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마리너호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거치며 크게 도는 항해를했던 것이다.

항해기간이 길었지만 루퍼트 선장과 선원들은 몇년만에 고향땅을 밟을수있는 기회가 생겼다.

한편 승객으로 탑승한 국제유학생단의 조선인들은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의 모습에 감탄했다.

아프리카의 북부해안에있는 마다가스카르 섬을 통과할 때에는 찌는듯한 열대더위를 경험했다.

그러나 대륙의 남단에있는 희망봉을 통과할 때에는 겨울처럼 추웠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국제유학단의 조선인들은 더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구라파(유럽)에 도착했고 영국의 항구가 눈앞에 보이고 있었다.

“으하하! 드디어 고향땅에 돌아왔다!”

영국인 선원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정대상은 그들의 기쁨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었다.

자신들도 이후에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저런 기분이 들것이니까 말이다.

항구에 도착한걸 좋아하는건 영국인 선원들만이 아니였다.

하급 선원들인 인도인들도 반가워하는 표정이다.

그들에게는 영국에서 여러가지 물건들을 구입해서 나중에 고향인 인도로 돌아가면 상당한 차익을 내면서 팔수있기 때문이다.

선장인 루퍼트는 인도 선원들이 그렇게 부수입을 챙기는걸 허락해 주었다.

기본적으로 인도인 선원들은 임금도 자신들보다 낮았기에 이런식의 부업을 하는것도 필요하니까 말이다.

때문에 하급 선원들은 루퍼트 선장이 영국인이고 백인임에도 그에대한 충성심과 존경은 상당했다.

“화물의 상태는 어떤가?”

“조선인들의 도움으로 레드진생(홍삼)의 상태는 변질되지 않았고 처음에 선적했던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역시 조선인들은 홍삼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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