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동진이 서총관을향해 대답했다.
그가 오가와를 만나게 된것은 몇년전이다.
수백년전 벌어졌던 임진왜란-
이때 조선에서는 침략해온 왜군에 대항해 조선과함께 싸우던 일본인들이 있었고, 이들을 항왜-라고 불렀다.
이들 항왜들중에 상당수는 북방지역으로 옮겨갔지만 일부는 계속해 삼남지역에 남아서 정착했다.
오가와는 항왜의 후손들중에 한명이였고 일본이름은 오가와, 그리고 조선이름은 박소천이다.
이때문에 오가와라는 일본이름은 그의 조선이름인 소천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어째든 오가와는 과거 일본에서 지내는 생활을했다.
이때문에 조선과 일본 양쪽에 익숙한 상태다.
그러던중 경상도 동래지역에서 서총관을 만나면서, 이후에는 해남상회에 소속되어 일하는 중이였다.
특히 오가와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뱃길을 잘 알았다.
그것도 왜국해안의 순찰선들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나, 야간에 순찰선들의 감시망을 우회해가는 통로도 꿰뚫고 있었다.
뱃길을 안내하던 오가와가 정면을 가리켰다.
“방행수님! 조금후면 시라키 해안에 도착입니다.”
“정말로 수고했네.”
“언제나 말씀드리는 부분이지만 왜국상인들과 거래를 할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 수틀리면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니까 말이지요.”
“그말을 명심하겠네.”
방동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후 6척의 배들은 시라키 해안을향해 나아갔다.
백사장이 넓게펼쳐진 곳이아니라 군데군데 암반들이 솟아나온 곳이다.
그곳의 한켠에 공터가 있었고 배를 댈수있는 간이용 선착장도 만들어진 상태였다.
방동진의 해남상회도 동래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내상(箂商)에 속했지만 좀 달랐다.
통상적인 경상도의 내상들은 동래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에서 대마도를 통해건너온 소수의 일본 상인들에게 물건을 판매했다.
다만 일본의 상인들이 대마도를통해 조선으로 오는것도 쉽지않았고 제한적인 부분도 많았다.
그에반해 방동진이 지휘하는 해남상회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상인들과 거래를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쉬운건 아니다.
오가와처럼 뱃길을 잘아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했고, 또한 일본막부에서도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기에 조선상인이 대놓고 일본으로 들어갈수도 없다.
때문에 대부분의 거래는 밀무역으로 진행되는데 수익면에서는 오히려 짭짤했던 것이다.
시라키의 해안절벽과 선착장에 배를대면서 방동진이 일행들과 내렸다.
반대쪽에서는 횃불을든 일본상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동진과 몇차례 거래한 나카노(中野)였다.
그런데 나카노의 옆에는 처음본 낯선사내가 있었다.
그가 나카노를향해 뭔가 속삭였고 방동진은 그것을보며 불길함을 느꼈다.
잠시후 나카노가 표정을 바꾸고 환영인사를 해댔다.
“이번에도 엄청난 물품들을 싣고 왔군요.”
“나카노 당신이 주문한 양이 많아서, 그걸 맞춘다고 고생을 좀 했습니다.”
“여기 일본에서 조선의 상품들은 언제나 인기가 많아서 말이지요.”
나카노가 히죽거렸다.
그도 해남상회가 가져온 조선의 상품들을 받아서 상당한 돈을 챙겼던 것이다.
조선에서 생산된 비단, 홍삼, 그외에 녹용같은 약재들도 일본에서는 엄청난 인기였다.
서로간에 장부를 보면서 물품을 확인하던중 나카노가 넌지시 말했다.
“방행수! 이번에는 물건가격을 이전보다 깍아주셔야 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요즘 중앙에서 지시가 내려왔는지 모르지만 각 관청마다 단속이 심해서 말이지요. 이걸 무마해 볼려면 뇌물을 먹여야 하는데, 이전보다 뇌물로 들어가는 돈도 많아지고 해서...”
“그렇다면 얼마정도를 원하시는 거요?”
“이전에 거래한 가격에서 반값이면 충분할거 같소만.”
“반값? 지금 제정신인가?”
방동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반값이면 고생하며 일본까지온 댓가는 물론이고, 본전에서도 한참이나 손해보는 것이다.
잠시 발끈했던 방동진이 분노를 삭이며 말했다.
“반값은 택도 없소. 대신 이전가격에서 1할까지는 가능하오. 하지만 더이상은 깍을생각을 마시요. 이것도 당신과의 옛정을 생각해서 후하게 주는것이요. 만약에 거래를 포기하고 싶다면, 이대로 돌아가겠소. 일본에 상인이 나카노 당신만 있는것도 아니고.”
방동진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나카노가 움찔했다.
나카오의 옆에있던 중년사내가 뭔가를 귓속말로 하였다.
순간 나카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소리쳤다.
“흥! 네놈들은 어차피 일본으로 밀입국한 조선인이다. 여기 관청에 신고하면 네놈들은 모두 잡혀갈걸. 차라리 그전에 반값에 물건을 넘기는게 어때?”
“신고라고? 그럼 너는 무사할거 같아? 아니, 그전에 우리는 여기서 떠나면 그만이지. 이제 네놈과는 거래 끝이다.”
방동진이 소리치고 떠날려는 찰나 나카노가 신호를 보내었다.
그러자 같이왔던 부하들중 몇명이 무기를 뽑았다.
그 모습에 방동진이 피식- 냉소를 지었다.
“역시나 뒤통수 칠려고 준비했구만, 나카노 네놈이 그럴 배짱은 없어보이고 저기있는 신출내기 놈이 꼬드긴 것인가?”
“씨끄럽다. 시미즈(淸水)는 나의 동업자다.”
“동업자를 고르는 안목이 부족하군. 저런 놈의 꼬임에 넘어가다니.”
“조선놈이 뭐라고 떠들어? 쳐라!”
시미즈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해치워라! 와아! 함성을 지르며 시미즈가 데려온 부하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방동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신속하게 보법을 펼치며 정면에서 달려들던 놈의 급소를 발차기로 타격했다.
크억! 한명이 피를토하며 뒹굴었다.
방동진이 선보인 체술과 근접전투는 탁월했다.
상체를 앞뒤로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크- 라는 기합과함께 발이 쭈욱 올라가며 검을세우며 달려들던 상대의 턱을 날려버린 것이다.
택견의 고수
“저럴수가?”
동료가 박살나는 모습에 시미즈 패거리가 당황했다.
서총관이 움찔하는 적들을향해 웃으며 말했다.
“행수님! 저놈들은 탁견(托肩:택견)-을 본적이 없는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놈들에게 조선의 탁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필요가 있겠군.”
“저놈이 이상한 수작으로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이다. 겁먹지말고 해치워라.”
시미즈가 부하들을 압박했다.
처음에는 방동진의 날카로운 발차기와 택견에 당황했던 그들이지만 기세를 높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시미즈가 착각한건 여기에는 방행수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방행수와 동행한 해남상회의 식솔들은 밑바닥부터 구르면서 배짱도 두둑했고 거친일도 여러번겪은 백전노장들이다.
때문에 조선을떠나 일본의, 그것도 마이즈루 근처의 시라키 해안까지 밤바다를 통과해왔을 정도니까 말이다.
“모두들 행수님을 지원해라.”
“와아아!”
상회의 식솔들이 만약을위해 준비해둔 무기를들고 뛰쳐나갔다.
이시대 조선의 상인들과 보부상들은 단순히 주판만 튕구면서, 장부만 끄적이는 샌님같은 상인들이 아니다.
언제 어느때 도적들에게 습격당할지 모르고, 바다에서는 언제 해적들과 사투를 벌여야할지 모르는 위기속에서 살아갔다.
때문에 해남상회의 행수인 방동진부터 택견의 고수였다.
그외에 상회의 식솔들도 저마다 한주먹하는 솜씨들이 있었다.
이들중 항왜의 후손인 오자와(小川)의 민첩함은 탁월했다.
“내앞을막는 놈들은 베어버린다! 비켜라!”
상대를향해 묵직한 일본어로 외치며 시미즈를향해 돌진했다.
겁에질린 시미즈가 부하들에게 막아라고 소리쳤다.
두명이 오자와의 정면을 막으며 칼을뽑았다.
챙! 칼날이 달빛에 반사되었고 오자와를향해 파고들었다.
하지만 오자와는 두명이 막아서는 순간, 허리에찬 카타나를향해 손을뻗었고 발도를 개시했다.
그 동작이 쾌속했고 양쪽에서 파고드는 상대의 어깨를베고 다른 한명의 오른팔을 잘라버렸다.
“끄아악! 내팔이...”
“너희들은 운이 좋은줄 알아라! 행수님께서 가급적 살생은 금하라고 하였기에 너희들의 목숨은 살려둔다. 하지만 시미즈! 네놈이 이번일을 꾸몄으니 댓가는 죽음이다.”
오자와의 두눈에서 살기가 터져나왔다.
특히 오자와가 사용하는 카타나 검술은 과거 항왜들이 사용했던 실전적인 검술을 계승한 것이다.
이시대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이전 전국시대때의 실전형 검투나, 칼쓰법과는 동떨어진 형식적인 부분만 강조했다.
그러면서 서로간에 일도류니, 이도류니, 반도류니, 거합류니 하면서 논쟁과 주장을했고 자신들이 최고라고 떠들어댄 것이다.
그러나 항왜들의 실전검투를 계승한 오자와에게 그런것은 웃기는 짓이다.
적을상대로 이기고 베는데에 이도류나 일도류가 무슨 소용인가?
중요한건 실전에서 어떻게 쓰냐가 핵심인데 말이다.
이때문에 오자와를 막겠다고 나섰던 두명은 단번에 제압당하고 한명은 팔까지 잘려나갔다.
당황한 시미즈가 뒷걸음치며 칼을뽑아 방어려는 찰나-
촤악! 선혈이 튀면서 시미즈의 머리가 상체에서 분리되었다.
툭! 바닥에 떨어진 시미즈의 머리를본 오자와가 발로 찼고, 굴러간 머리가 나카노(中野)의 앞에 멈추었다.
“흐억! 시미즈가 단칼에 죽다니?”
경악한 나카노가 뒤로 넘어졌다.
공포에 빠져버린 나카노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흉측하게 오줌을 싸갈긴것도 인식못했고 나카노가 애걸하듯이 소리쳤다.
“항복이다! 제발 살려줘!”
나카노의 외침이 터지자 싸움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뻔했다.
택견고수인 방대수의 앞에는 처음박살난 한명외에, 세명이 더 추가되서 4명이 뒹굴고 있었다.
그외에 해남상회의 식솔들에게 두들겨맞고 시뻘겋게 피멍이든 놈들이 살려달라고 빌고있는 상황이였다.
나카노는 시미즈의 꼬임에속아 해남상회와 방행수를 뒤통수 칠려했던게 얼마나 바보짓인지 깨달았다.
이윽고 방행수가 바닥에 신음하던 놈을 밀어내며 나카노에게 다가갔다.
한쪽에는 목이잘린 시미즈의 시체가 보였다.
“행수님! 가급적 살생은 피할려 했지만, 저놈은 어쩔수 없기에...”
“충분히 이해하네.”
방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상대가 더이상 허튼짓을 못하고, 동시에 다른 일본쪽 상인들과의 원만한 거래를 위해서도 본보기는 필요했으니 말이다.
“나카노! 저기있는 쓰레기의 시체는 네놈이 적당히 처리하면 되겠군.”
“물론입니다. 방행수. 걱정마시요.”
“그리고 방해꾼이 없으니 거래는 계속해야겠지. 어때? 이래도 내물건에대해 반값으로 퉁수를 치고 싶은가?”
“아닙니다. 처음에 약속했던 가격으로 모두 사겠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또다른 것이라도 있습니까?”
“당연하지. 네놈이 시미즈 저놈과 결탁해 퉁수를 칠려고 했는데 처음 가격으로 거래한다고?”
“그렇다면 뭘 원하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특별히 너의 목숨값까지 추가해서 5할을 더보탠 가격으로 넘겨주지. 처음에는 두배의 가격으로 넘길까 하다가, 그동안 거래했던 상거래의 친분도 있고해서 이정도로 넘어가주지. 어때? 이렇게 넘긴다해도 어차피 나카노, 네가 일본에서는 우리에게 산 가격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가격으로 팔아먹고 있는건 알고있어. 따라서 네놈이 무조건 손해보는건 아니야. 설마 거절하고 싶은가?”
“.....”
나카노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처음에 반값으로 퉁수치거나 강탈하려고 시도하다가 이제는 더 비싼 가격에 사게된 것이다.
하지만 바닥에 굴러댕기는 시미즈의 머리를보자 나카노는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방행수가 봐주지 않았다면 시미즈 다음에는 자신이 저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카노는 해남상회와 방행수를 보통의 상인들로 생각했는데 착각일 뿐이였다.
애초부터 조선에서 일본까지 밀입국해 들어온 상인들이 평범할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방행수가 원하는대로 하겠소! 그러니 이번일은 잊어주시요. 앞으로 다시는 해남상회를 속이거나 하는짓은 없을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믿어보지.”
방행수가 나카노를향해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나카노에게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의 모습처럼 보였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작업을 시작한다! 싣고온 물건들을 내려라. 이번에는 거래대금도 두둑하게 나왔으니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가면 후하게 대접하겠다.”
“간만에 고기도 뜯고 술도 진탕 마셔볼수 있겠군요.”
“당연하지.”
방행수의 말에 해남상회의 식솔들이 활기를 띠었다.
조금전까지 신출귀몰한 칼솜씨를 보였던 오자와도 카나타를 검집에 넣었고 식구들과함께 물건을 옮기는 중이였다.
나카노의 신호를받은 부하들이 뒤쪽에서 상자를 가져왔다.
상당히 묵직했고 방행수가 서총관하고 함께 뚜껑을 열었다.
내부에는 차곡하게 쌓여진 은괴들이 들어있었다.
거래금액이 반이나 올라가 버렸고, 그때문에 나카노는 처음에 준비했던 은괴외에 갖고있던 다른 은괴상자도 탈탈 털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