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르칼손 때문에 수차례나 모욕을 당하였다.
그럴것이 지르칼손은 만주족, 그것도 연경(베이징)에서 이름이 알려진 만주인 귀족출신이다.
연경에서 출세가도를 달릴 예정이였던 놈이다.
하지만 어떤사건을 계기로 밀려났고 자신의 부하로 들어왔던 것이다.
때문에 지르칼손은 만주족인 그가 한족인 엄세번의 지시를 받는것에 불만이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럼에도 엄세번은 어떻게 할수없었다.
상대는 만주족의 귀족이고 팔기의 기병대장이였으니 말이다.
“서찰에는 조선놈들에게 지르칼손 부대가 전멸을 당한거 같다고 적혀있는데 믿을수있는 내용입니까?”
“나도 의심스럽다. 조선놈들이 대청국을 상대로 그럴만한 배짱도없다. 그리고 조선군이 몇배나 많다해도 지르칼손의 팔기와 기병부대를 이길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엄세번이 고개를 내저었다.
곤란한 상황이였다.
한가지 짐작되는 부분은 있었다.
지르칼손의 팔기와 기병부대는 만주지역에 들어온 조선인들과 마을을 상대로 신나게 약탈을 벌였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살해당했고 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엄세번은 여기에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지르칼손 부대의 약탈을통해 자신도 이득을 챙겼으니 말이다. 지르칼손은 약탈한 재물과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아챙긴 거금들중에 일부는 엄세번에게 주었다.
이것은 적당히 눈감아 달라는 것.
엄세번은 기분이 나쁘지는 했지만 눈앞에놓인 돈에는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지르칼손이 수년동안 챙겨준 돈으로 엄세번도 재산을 모았다.
이것들은 자신이 더높은 자리에 올라갈때 필요한 것들이다. 한족이 출세를 위해서는 높은 자리에있는 만주족에게 잘보여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돈을 챙겨주던 지르칼손과 부대가 전멸했다.
서찰에는 조선군에게 당한거 같다는 내용이다.
믿기는 힘들다.
청나라 팔기군과 기병부대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말이 안된다.
조선에서 청군을 상대로 덤빌 배짱도없다.
“어떻게 하실겁니까? 이것을 상부에 보고하실 계획입니까?”
“아무래도 그래야하지 않겠나? 가벼운 사건도 아니고. 지르칼손이 데리고있던 팔기와 기병부대가 전멸을 당했네. 그 숫자만해도 1500명의 수준이네. 단순히 보병도 아니고 기병들 1500명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일세.”
엄세번이 말했다.
지금까지 태평하게 지내왔는데 이런 상황이라니?
하지만 한탁주가 뭔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 않은 내용을 상부에 보고 했다가는 오히려 사령관님께서 크게 다칠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엄세번이 당혹감으로 질문했다.
“먼저 지르칼손은 만주족이란 위세를떨며 사령관님을 무시해온 녀석입니다. 그놈이 제거된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탁주의 말에 엄세번이 신음을 삼켰다.
지금까지 지르칼손에게 갖은 모욕을 당해왔던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갈아마셔도 시원치않을 수준이다.
그런 놈때문에 자신이 다칠수도 있다니?
“그놈과 팔기의 기병들이 조선인들에게 당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조선놈들에게 당했다면 그것은 더 큰 일이 생길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현재 사령관님은 이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을 하셨습니까? 그런데 연경(북경)에서 이것을 알게되면 당장에 사령관님을향해 문책이 내려질 것입니다. 어쩌면 파직을 당하는건 물론이고 목이 무사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그말을듣자 엄세번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사건을 은폐하는게 최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저한테 계책이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요.”
“알겠네.”
엄세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후 심복인 한탁주가 행동을 개시했다.
“사령관님이 소인을 찾는다니. 무슨 일입니까?”
“그러니까 상황을 자세히 알고싶어서 그런것이네.”
한탁주가 대답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는 이번 사건을 알려온 전령을 다시불렀다.
그리고는 적당히 외진곳으로 유인했다.
전령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푸욱- 크억! 전령의 뒤에서 따라가던 한탁주가 단검으로 등뒤를 찔렀다.
기습당한 전령이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한탁주는 단검을 더 깊숙하게 넣었다.
전령의 숨이 끊어지며 축 늘어졌다.
전령을 해치운뒤에 한탁주는 신호를 보내었다.
잠시후 주변에있던 무사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시체를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두명이 대답했다.
한탁주는 나머지 무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또다른 목표는 요동파견군 사령관인 엄세번에게 서찰을 보내고 전령을 파견한 부대장이다.
그놈도 지르칼손과 친분이있는 만주족이다.
하지만 여기있는 무사들은 암살에 능했다.
상대는 방심하고 있을터.
제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얼마후 지시를받은 무사들이 신속하게 출발을 시작했다.
‘엄세번이 당하면 나도 곤란해지지.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탁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관인 엄세번보다 자신의 안전을위해 이 모든것을 진행한 것이다.
* * *
“선장님. 지금까지 여러차례 동양인들을 보았지만 저들같은 경우는 처음이군요.”
“조선에서 영국으로 가는 유학생들이라고 하더군.”
루퍼트가 대답했다.
옆에는 오랜동안 함께해온 1등 항해사인 아놀드가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루퍼트도 홍차를 좋아하는 편이다.
지금은 갖고다니던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으며 불을붙였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한모금 빨아들였다.
두사람은 얼마전까지 영국령 동인도회사 소속이였다.
마리너호는 동인도회사가 운영하는 다수의 화물선들 중에서도 낡은편에 속하였다.
그 때문에 대접도 못받았고 다른 상선들에비해 보급이나 임금지급등 모든것이 열세였다.
마리너호에있는 대다수 선원들이 루퍼트를 따르면서 함께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에서 그들은 천대받았다.
갈곳없는 신세처럼 변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좋은 기회가 온것이다.
마리너호를 인수하겠다는 새로운 선주가 나타났다.
이스트 프론티어(East Frontier)-라는 신생회사였고, 광저우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장은 20대후반으로 젊었다.
하지만 루퍼트를 흥미롭게 만든것은 따로있었다.
이스트 프론티어의 활동과 무역품이였다.
홍삼을 처음본 루퍼트도 놀랐다.
그는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장으로서 마리너호를 책임지며 여러차례 항해하였다.
영국과 인도, 그리고 인도에서 광저우까지 다양한 화물들을 실어날랐다.
그래서 동방에대한 견식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조선의 홍삼은 처음본 것이고 놀라웠다.
조선이라는 국가마저 신비했다.
하지만 루퍼트와 선원들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이스트 프론티어는 선장인 루퍼트부터 시작해 말단 선원들에게까지 동인도회사보다 더좋은 임금과 대우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번항해는 중요하네. 이스트 프론티어 소속으로서 첫번째로 시작하는 항해이니까 말일세.”
“물론입니다. 선장님이 말씀하신 조선에서 온 귀중한 레드진생(홍삼)들과 저기있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무사히 영국까지 도착시키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인 승객들과 선원들 사이의 분위기는 어떤가?”
“살펴본 결과 원만한 편입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 했지만 저 조선인들이 영어를 배우고 선원들과 말이 소통되면서 서로 도와주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우리쪽 선원들중 상당수가 인디아(인도)에서 모집된 선원들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군. 저번에 미스터 정(Mr. Jung)을통해 들었는데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의 사이가 썩 좋은편은 아니라고 하더군.”
“그렇군요.”
1등 항해사인 아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너호의 선원들은 선장인 루퍼트, 그리고 1등 항해사인 아놀드를 포함해 간부들은 영국인이다.
잡부일부터 하급의 일을하는 말단 선원들은 인도인들 이였다.
선장인 루퍼트는 인도인들로 구성된 말단 선원들에게도 제대로 대우해 주었다.
그 때문에 마리너호 선원들은 루퍼트 선장을 진심으로 따랐던 것이다.
인도인 선원들은 간단한 영어를 사용했고, 처음에는 조선인 승객들과 말이 통하지않아 서먹서먹했지만 지금은 바뀌었다.
얼마전 바다의 풍랑이 심할때는 조선인 승객들이 인도인 선원들과 합심해 거친바다를 이겨내기도 했던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마리너호에 탑승한 150명의 국제 유학생단의 조선인들은 더 큰 세상을보고 시야를 넓혔다.
한편 국제유학생단을 이끄는 정대성과 박상호, 그리고 오경석을 포함해 선구자격인 인재들은 선장인 루퍼트등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가지를 배웠다.
루퍼트에게는 신비한 국가.
조선에대해 알아가는 과정도 재밌는 것중에 하나였다.
그가 조금전말한 미스터 정(Mr. Jung)은 정대상이다.
영국까지 항해중에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정대상이 대표로 협상하였다.
그에따라 선장인 루퍼트를 비롯해 영국인 간부들은 조선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제까지 그들이 본 동방인.
그 중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중국인들은 대부분 우물안 개구리처럼 좁은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인가?
시야가 좁은데도 불구하고 오만함은 강했다.
이것은 중국내 말단 평민들부터 시작해 중국의 관원들.
심지어 경험을쌓은 상인들이나 고위급 관리까지 공통적으로 가지는 오만함이였다.
루퍼트가 느낀 그것은 동방에서 오랜동안 내려온 중국인들의 생각.
바로 중화주의였고 조선의 수많은 민초들이 경멸하는 부분중에 하나였다.
다만 루퍼트는 조선에도 중화주의에 빠져서 허덕이는 기득권 사대부들이 있다는건 몰랐지만 말이다.
그들 앞으로 2명의 조선인들이 다가왔다.
정대상과 오경석이다.
태평천국에대한 비밀작전
“어서 오십시요. 미스터 정(Mr. Jung)!”
“반갑습니다. 루퍼트 선장님. 여러분들 덕분에 우리들이 무사히 여행하고 있습니다.”
“과찮입니다. 승객과 화물의 안전한 항해. 선장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임무입니다.”
루퍼트가 대답하며 미소지었다.
정대상과 루퍼트 선장은 서로간에 친분이 두터워졌다.
이제는 정대상도 영어로 말하는게 좀 익숙해졌다.
까다로운 부분에 대해서는 오경석이나 김도진이 통역을 담당했고 그외에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해졌다.
한편 정대상은 양이의 언어인 영어를 배우면서 임금이 자신에게 한말을 실감했다.
‘전하께서는 선대인 세종께서 창안하신 훈민정음, 즉 정음(한글)이 뛰어난 문자이고 글자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조선의 사대부들과 유생들은 정음을 기피하고 중국의 한자를 쓰는것을 어리석다고 하셨는데. 이제야 그뜻을 이해할수가 있겠구나.’
정대상은 영어라는 양이의 문자와 글자가 한자와 다르면서, 세종이 창제한 정음과 너무도 비슷하다는걸 깨달았다.
그때문에 정대상도 말하는건 서툴러도 영어의 알파벳이나 단어, 그리고 읽는것까지도 빠르게 배웠다.
그것은 정대상만이 아니라 국제 유학생단에 포함된 다른 조선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조선은 단시간에 수많은 백성들이 읽고 쓰는걸 배울수있는 글자와 문자를 가졌다.
그럼에도 중화주의에 빠져서 어려운 한자를 고집하고 있었다.
이토록 어리석다니!
‘전하께서는 영길리국이 강해진 것에는 그들이 본래부터 쉽게 배울수있는 문자와 글자를 갖고 있기때문이라 했는데 이것도 사실이다.’
정대상은 임금과의 대화를통해 들었던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는걸 느꼈다.
임금이 자신에게 일러준 여러가지 것들.
영길리국은 대양에서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움직이는 배를 가지고 있다는것도 진짜였다.
그것이 증기의 힘을이용해 동력을 만들고, 그것을 가능하게하는 기계장치가 있다는것도 사실이였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이 모든것들을 알고계시는 것인가? 정말로 하늘이 조선을위해 내리신 천인(天人)이란 말인가?’
정대상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처음 국제유학생단에 참가를 신청할 때만해도 반신반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