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큰 변화가 생길것이네. 그리고 자네들도 더이상 초야에 뭍혀지내는 신세가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거대한 바람에 동참해야 하지않겠나?”
“.....”
예판의 말을듣자 두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처음에는 선배이자 예판 장우영이 단순히 밥이나 한끼 하자고 부른건줄 알았는데 더 큰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동참이라면 어떤 것입니까?”
“허허. 그건 여기서 말할게 아니라 나와같이 입궁해서 전하께 직접 듣는게 좋을걸세.”
“전하를 뵙는다는 것입니까?”
“물론 자네들을 추천한것은 나일세. 따라서 기왕이면 전하께서 내리는 어명을 성공시켜서 선배의 체면도 좀 세워주게.”
장우영의 말에 두명은 순식간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범상치않은 뭔가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얼마후 두명은 예조판서의 집에서 하인들과함께 출발을 하였다.
궁으로 향하는 길-
두명의 심장은 흥분으로 콩닥거렸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렸다.
지금은 매서운 바람이 쌩쌩부는 겨울인데 말이다.
그만큼 긴장한 상태였고 임금이 뭣때문에 자신들을 만날려고 하는지 예상조차 안되었던 것이다.
복수의 기회
“저걸 보게. 궁궐방어를 담당하는 호위청과 금군의 병사들이 새로운 무장을 하고있네.”
“조선군이 사용하는 화승총에비해 총열이 짧은것이 마치 기병들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진거 같군.”
정대상의 말에 박상호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을 만나러 창덕궁으로 입궐하는 과정.
그곳에서 본 국왕 친위부대의 위용은 전혀 달랐다.
이전에 두명은 한번정도 창덕궁을 방문해 본적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호위청과 금군의 병사들은 무기력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확인한 궁궐의 부대원들은 눈빛이 살아있었다.
불과 1년도 안되어 이런 강군으로 바뀌다니!
두명의 내부에서는 알수없는 감동이 솟아올랐다.
조선이 바뀌고 있다.
선배인 예조판서 장우영의 말대로 자신들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였다.
얼마후 그들은 장우영과함께 임금이 지내는 희정당으로 향했다.
* * *
“정대상과 박상호라...”
두명의 이름을 써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정대상은 과거 실학으로 명성을 날렸던 대학자인 정약용의 후손이다.
조선후기에 정약용이 달성한 업적은 엄청날 정도다.
개인적인 평가로볼때 정약용은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인물이다.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고 정약용이 남긴 저서만도 수십가지가 넘는다.
정조가 조선후기의 개혁군주로서 명성을 쌓을수 있었던것도, 정약용같은 뛰어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인생은 정조의 죽음 이후에 내리막길로 가버린다.
안그래도 정약용을 시기했던 세력들이 많았고, 정조가 죽고나자 그를 압박하며 조정에서 몰아낸 것이다.
그이후 정약용의 후손들은 실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한편 박상호는 박제가의 후손으로 재야에 뭍혀있던 인물이다.
내가 볼때 조선이 근대화를 못한 이유는 인재가 없어서가 아니다.
제대로된 인재를 발굴하지 못한것이다.
그뿐인가?
개혁군주가 운좋게 인재들을 발굴해 써먹을려해도 반대하는 놈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유교와 성리학 탈레반들이 기를 쓰고 박살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니 무슨 근대화가 가능하겠냐?
자기들 밥그릇과 권력을 지킬려고 개싸움을 벌이는 놈들이 대부분인데.
어쨌든 예조판서인 장우영이 추천한 두명 정대상과 박상호에게는 앞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길 생각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전에 조선밖의 세계가 어떤지, 그리고 조선이 제국주의 시대의 승자가 되기위해 필요한것이 뭔지를 그들 스스로 경험해야겠지?
잠시 이후의 계획들을 생각하며 나의 비밀서책에 옮겨적고 있을때 송내관이 희정당으로 들어왔다.
“전하. 예조판서가 찾아왔습니다.”
“혼자인가?”
“아닙니다. 두명의 유생들과 함께입니다.”
“역시 기대하고 있는데 드디어 왔군.”
“두명의 유생들은 누구입니까?”
“송내관도 알다시피 이번에 영길리국(영국)으로 보내는 국제유학생들을 통솔하고 이끌어갈 인재들이지.”
“소신이 관상에 능통한것은 아니지만 두명의 유생들이 비록 나이는 20대로 젊어도 눈빛이 총명하고, 의지가 굳은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유학생들을 보내는데 따로 책임자들까지 임명하시는걸 보면 영길리국에서 조선인들이 비밀스런 활동을 진행할 가능성이 있는거 같군요.”
“제대로 보았네.”
“하오나 소신은 좀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전하께서 염두에 두시는 첫번째 상대는 청국인거 같은데, 벌써부터 이역만리나 떨어진 서역의 국가들에대해 준비를 하시다니 말이지요.”
“송내관이 그렇게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니겠군. 현재로서는 조선이 상대할 가장 큰 적이 청나라인건 사실이지. 하지만 이후에 준비가 완료되면 청나라는 더이상 최우선 사항이 아니지. 그것보다는 오히려 서양에있는 열강들이 더 문제지. 그리고 이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면 조선이 청나라를통해 얻은 이익과 모든것을 전부 토해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
나의 말에 송내관이 숨을 삼켰다.
지금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거다.
내가 진행중인 조선의 군사 및 국방개혁.
그리고 조선군을 강력한 군대로 육성하는게 성공하면 청나라는 더이상 패권경쟁의 상대가 아니다.
나로서는 청나라를통해 뜯어먹을게 넘쳐날 정도다.
즉 맛좋은 먹잇감으로 변할 뿐이란 것이지.
이것도 조선이 서양열강들과 대결을 충분히 할수있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실패하면 조선이 서양세력에게 삼국간섭같은 압박을 당한다.
그것을 막지못하면 이후에 조선이 먹게될 만주나 요동땅, 그리고 거대한 영토까지도 토해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걸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유럽열강과 서양세력의 움직임을 계속해 감시하고 정보를 빼내는것은 중요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했던 송내관도 어느정도 이해한듯 보였다.
하긴 송내관도 내가 기껏해야 청나라 정도에 만족할 군주가 아니란 것쯤은 충분히 알았을 테니까 말이다.
얼마후 송내관이 나가고 예조판서 장우영과함께 두명의 유생들인 정대상, 박상호가 들어왔다.
* * *
“전하. 소신들이 들은것이 정말입니까?”
“과인이 한입으로 두말을 하는거 같은가?”
“하오나, 그, 그것은...”
이제는 버벅거리며 말까지 더듬는다.
동석했던 예조판서 장우영도 놀란 모습이긴 하다.
지금까지 내가 예판과함께 개혁에대한 이런저런 토론을 많이했지만 이 부분을 꺼낸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젊고 개화사상을가진 정대상과 박상호라해도 임금이 이런 제안을 할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당연한거 아닌가?
조선을떠나 그것도 청국이나 왜국도 아닌 서양으로 가는것이다.
단기체류하는 사절단도 아니고 이번에 국제유학생으로 영국에가는 인원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최소 몇년씩은 그곳에서 지내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체류하는 해당국가의 복식과 관습에 일정부분 맞춰야 하는건 당연하지.
그럼에도 이들이 당황한건 역시나 머리카락을 자르는 단발(斷髮)-이 가지는 의미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글귀에 담겨진 본뜻은 생각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성리학 탈레반적인 병신력(?)과 코메디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대들이 영길리국(영국)과 구라파(유럽)에가서 조선인의 마음가짐을 유지하는건 중요하네, 하지만 설사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하고 도포와 갓을 벗어버리고 영길리국의 복장을 한다고해서 조선인의 정체성이 사라지는건 아닐세. 설마 그대들도 조선인의 긍지와 정체성을 나타내는것이 단지 상투나 갓, 도포와같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가?”
“.....”
두명이 제대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일정부분 동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유교에 매몰된 성리학 탈레반이라면 이순간에도 임금이 미쳤다고하며 난리를 치겠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 단발을 하라는건 아닐세. 그대들도 알다시피 조선을떠나 영길리국으로 향하는 뱃길은 멀고, 항해시간도 상당히 걸리네. 따라서 그사이에 자네들 스스로 밖의 세계를보고 판단하면 되는걸세.”
“전하의 말씀을 깊게 명심하겠습니다.”
정대상이 고개를 숙였다.
조선말 역사에서 고종이 개시한 단발령은 준비도없이 강제로 실시하다보니 역효과와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러나 조선이 새로운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상투를 자르는 것이 필요한것도 사실이다.
상투를트는 관습은 공중 및 개인 위생적으로 문제도 많았고, 반드시 개선해야할 부분이다.
그렇다고 임금인 내가 내일 당장 신하들을 모아놓고 상투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한다는것도 문제가 있다.
그것보다는 지금처럼 해외로 보내는 조선의 유학생들이 서구의 환경에맞춰 생활하며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그것에 익숙해지도록 하는게 좋은 방법이다.
이들 유학생들이 조선에 복귀하고 바뀌어진 모습들이 점차 조선인들의 사이로 퍼지면서 대세가 되도록 만들면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 임금인 내가 할일은?
조선인들이 상투를 자르든, 말든 결정할 자유를 주는것이지.
물론 공직에 진출하거나 관원이 되고싶으면 상투를 잘라야 하는것이고.
아무튼 그런 상황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후에는 임금인 나도 상투를 자르고 서구적인 복식을 착용하면 되는것이다.
처음에는 당황했던 정대상과 박상호도 나의 설명을듣자 이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이제는 자신들이 조선의 근대화를위한 선구자인걸 느꼈으니 말이다.
* * *
“권이강의 부대가 잡혀간 조선인들을 무사히 구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이군요.”
홍상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권이강의 상관인 신재식도 안도했다.
작전이 실패했다면 조선군의 전투는 상당히 힘들어질뻔 했으니까 말이다.
지르칼손이 본대를 주둔지에서 이끌고 나오도록 미리 계략을짜고 유인작전을 벌인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르칼손이 주둔지에 남겨둔 병력들은 무시할수 없었다.
보고내용이 적힌 서찰에도 적들의 병력은 2배정도로 많았지만 권이강은 신형보총과 기습전을 활용해서 적들을 모두 섬멸했다고 적혀있었다.
그만큼 권이강의 구출작전에서 신형보총이 큰 활약을 한것이다.
홍상준과 신재식도 강력한 무기의 성능을 실감하고 있었다. 두번의 전투에서 그들은 누데치의 기마부대를 섬멸했다.
그후에 유인해낸 적의 수색부대까지도 전멸시킨 것이다. 조선군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던 기마병의 무기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승리다.
“남은것은 지르칼손의 본대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대의 병력도 무시할 수준이 아닙니다.”
“.....”
신재식의 말에 홍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차례 승리를 맛본 조선군이다.
홍상준이 후방에 도열해있는 부대들에게 소리쳤다.
“조금전 납치된 수백명의 조선인들을 무사히 구출했다는 장계가 도착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안심하고 적을 해치울수가 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이렇게 기쁜날이 올줄이야!”
“개같은 청국놈들. 이제부터 우리 조선군의 실력을 보여줄때다.”
홍상준의 외침에 병사들이 기뻐했다.
회령숙영지에 배속된 병사들 중에는 그들의 친척이나 이웃이 청군에게 살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간 경우도 있었다.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때가 온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은 청에게 당하고만 살아왔다.
멀게는 병자호란의 수치부터 가깝게는 얼마전 수백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고 끌려갔던 것이다.
“정찰조는 어떻게 되었나?”
“현재는 지르칼손 본대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신재식이 부하의 설명을 들었다.
지르칼손의 본대를 끌어내는건 성공했다.
적들은 아군보다 병력이 우세했다.
때문에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야했고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는건 중요한 부분이다.
홍상준과 신재식은 지휘능력이 뛰어났고 수적인 열세에서도 적을상대로 싸우는 방법을 알고있었다.
정찰조들을 파견시켜 지르칼손 본대의 상황을 감시하는 가운데 홍상준과 신재식은 나머지 병사들에게 일단 휴식을 시켰다.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위해서다.
지르칼손이 어느 방향으로 올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만약에 다른곳으로 진격로를 바꾼다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녀석의 목적은 복수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미끼만 던져도 고기냄새를맡은 똥개처럼 달려들 테니까 말이다.
* * *
“멍청한 누데치놈! 팔기군의 명성이 그놈때문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지르칼손이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