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69)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전 병조판서가 읽은 장계를 확인해 볼수 있는가?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싶은데.”

“알겠습니다.”

몇차례 우물쭈물하던 병조판서가 장계를 전달했다.

본래라면 저놈이 나한테 이처럼 고분고분할 이유가 없다.

지금은 저놈도 꽤 충격을받은 상태긴 했다.

여기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도 있다.

그녀의 표정을보니 병조판서가 읽은 장계의 내용에 상당히 분노하고 계셨다.

간신배에 매국노인 이조판서 김좌근과는 대비되는 분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의 기간에도 조선의 민초들을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시도했다.

다만 궁궐내 큰어른이고 수렴청정을 한다해도 그녀가 여자의 몸이고 노쇠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김좌근이나 안동김씨 세력들이 그녀를 우습게보고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때문에 그녀를 대신해 내가 본격적으로 나서야할 때였다.

그녀도 이부분을 인정하고 있었다.

“대비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요. 일단 장계를 살펴보고 결정을 하겠습니다.”

“주상께서 이렇게 나서주시니 고맙군요.”

순원왕후가 나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나의 양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임금의 실권을쥐고 그녀가 궁궐에서 편안하게 쉬도록 해드리고 싶었다.

순원왕후를 위로한뒤에 장계를 천천히 확인했다.

내용은 조금전 병조판서가 읽은 부분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조판서는 장계를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들을 빼먹은 상태였다.

저놈봐라 꼼수를 부리네.

병조에 전달된 장계는 함경도 병마절도사인 송명창이 보내온 것이다.

동간도에서 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조선인들의 마을과 촌락들이 불시에 습격을 받았다는 것.

습격한 놈들이 청나라의 기마부대라는 사실이다.

청나라 기마부대는 조선인들이 힘들게 수확한 농작물들을 털어갔고 마을에 불까지 질렀다.

군대가 도적이나 강도떼와같은 짓거리를 벌인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반항하던 조선인들에게 무기를 휘둘렀고 그 과정에서 벌써 백여명이 넘게죽었다.

조선마을과 촌락에서 끌려간 여자들과 주민들의 숫자는 못해도 4~500명이 넘는다.

조선자체를 호구로보고 이따위짓을 해버린 것이다.

“장계에보니 살해당한 조선인들의 숫자가 최소 100명이상, 잡혀간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주민들의 숫자만도 500명을 넘어가고 있구나.”

“상국인 청에서 이런짓을 할줄이야.”

순원왕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본성이 나쁘지 않다는걸 느낄수있는 부분이다.

본래 역사에서도 삼정의 문란으로 조선민초들이 굶주림에 시달릴때 그녀는 신하들을향해 호통을 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전하. 이사건은 그냥 넘어갈수없는 부분입니다.”

“맞습니다. 청이 아무리 조선의 상국이라고 하나 조선백성들을 백명이나 죽이고 수백명을 납치하다니! 어떻게 이런짓이 용서될수 있겠습니까?”

박규수와 이하응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하응은 의정랑이라는 임시직으로 의정부에 속하지만 영의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직책이다.

때문에 신하들이 소집되는 조회에는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박규수는 병조에 등용시켜서 지금은 병조참지의 자리를 맡고있었다.

병조에서의 서열은 4위에 불과하지만 박규수는 나의 기대대로 확실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이런 역활을 하라고 내가 안배한 것이지.

박규수가 강경발언으로 나오자 병조판서인 이규동이 고개를 돌리며 받아친다.

“박참지. 이 문제에서는 경이 나설자리가 아니네.”

“무슨 소리요? 병판대감. 국사를 논하는데 있어 신하의 자격이란 것이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까? 그리고 이번사건은 병조와도 관련이 있는데 어찌 입다물고 있다는 것입니까?”

박규수가 지지않고 받아친다.

병조판서 이규동이 김좌근쪽을 보더니 한발 물러섰다.

한참 아래이고 새파란 박규수가 기어오르니 자존심이 뭉개지고 있었지만 여기서 말싸움을 해봐야 좋을게없다.

주변을 지켜보던 김좌근이 나섰다.

“진정들 하시요. 이번에 벌어진 사건. 특히 청의 기병부대가 갑자기 조선인들의 마을과 촌락을 습격하고 무도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원래 잘못은 상국인 청제국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촌락과 마을에 있는것이 아니요?”

“이판대감. 갑자기 그건 무슨 뜻입니까?”

예조판서인 장우영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좌근의 헛소리에는 나조차도 기가막힐 지경이다.

저놈이 자기 패거리를 조정관료에 집어넣는것.

권력을쥐고 안동김씨 세도가로 잘난척 하는건 둘째치고 저 발언 자체는 용서가안될 수준이다.

조선인들이 잘못이라고?

뭔 개소리야.

“예판대감은 몰라서 하는 소리요? 이번에 조선인들의 마을과 촌락이 습격받은 지역은 상국인 청의 봉금지역이요. 오히려 두만강을 넘어간 조선인들. 그리고 거기서 마을을 만들고 살아간 조선의 어리숙한 민초들이 이번일을 자초한 것이잖소?”

“맞아. 이판대감의 말이 정답이지.”

“도대체 함경도의 상것들이 왜 두만강을 넘어가 상국인 청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야.”

“잘못하면 이 사건으로 조선이 청에게 큰 문책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인데.”

김좌근 패거리들이 목소리를 내었다.

가해지는 청나라 놈들인데 피해를당한 민초들을 욕하는 저 꼬라지라니?

김좌근과 안동김씨 놈들이 얼마나 썩어빠진 놈들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판대감. 그곳은 동간도 지역이고 엄밀히말해 조선영토의 내부이고 봉금지역이 아니요.”

예조판서가 반박했다.

지금 예조판서의 주장은 타당했다.

만주에대해 청이 봉금지역을 설정해 놓은건 있었다.

그곳은 만주를 중심으로 한다.

봉천을 포함해 과거 여진족이 주로 지냈던 곳이다.

그에반해 습격사건이 벌어졌던 동간도는 두만강 지역이고 봉금지역과는 거리가 떨어진 장소다.

심지어 숙종때에 청과 맺어진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에서 동간도는 청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규정도 있었다.

그런데 청의 기병부대는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넘어와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런짓을 벌인 것이다.

“경이 무슨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있소. 그러나 청이 만주에 파견한 지휘관들과 청군에게 그런것은 소용없는 짓일 뿐이요. 이번일로 조선은 상국인 청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자초했다는 사실입니다.”

“.....”

김좌근의 말에 예조판서, 공조판서등도 미간을 꿈틀거렸다.

지금은 김좌근의 지시를받은 관료들이 더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상국인 청의 심기를 건드렸다니!

이것이 김좌근과 패거리가 주장하는 부분이다.

노예근성이 뼈속까지 스며있는 놈들.

기세에서 밀리는 상황에서도 예조판서와 공조판서는 반격했다.

“이번 사건은 절대로 넘어갈수 없습니다. 청에 사신을보내 항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청의 기마부대에대해 응당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정신이 나갔소? 경은 지금 조선이 청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요?”

“.....”

전쟁 하겠다는 거냐... 어쩌구 반격이 들어오자 예조판서와 공조판서도 일순 당황했다.

청의 군사력과 위력에 대해서는 조선인들이 뼈저리게 경험했으니 말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악몽은 지금도 조선을 잠식하고 있었다.

특히 병자호란은 조선이 청에대해 얼마나 무력하고 약한지를 제대로 드러낸 사건이였다.

“그만들 하시요. 서로간에 자신들의 주장만 할뿐. 어느쪽도 타협과 양보를 생각하지 않다니! 이래서야 탁상공론만 무성할뿐 어떤 결론도 도출할수 없을 것이요.”

“황송하옵니다. 대비마마.”

논쟁을 벌였던 예조판서와 공조판서가 고개를 숙였다.

김좌근과 패거리들도 마지못해 순원왕후에게 사죄했다.

그들의 본심은 순원왕후 마저도 허수아비로 생각하는 중이다.

원역사에서 철종이 이런 등신같은 상황을 3년가까이 지켜봤으니 홧병으로 죽을수밖에 없는것이다.

왕으로서의 무력감과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된다.

고개를돌려 순원왕후쪽을 보았다.

이번에 벌어진 사건은 상당히 컸고 그녀에게도 충격인듯 보였다.

이번일은 그녀가 어떻게 할수있는 수준을 넘었다.

강경대응을 하기에는 청의 힘이 두렵다.

반대로 참으면 조선과 왕실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금상께서 등극하신지 얼마되지도 않는데 어찌하여 이런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순원왕후가 수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압박감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이럴때에는 국왕이 나서서 정리를 해야한다.

“대비마마의 안색이 좋지않으니 이쯤에서 조회를 끝내겠소. 상궁들은 대비마마를 처소로 모시고 어의를 불러서 살펴보게 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지시를받자 상궁들이 움직였다.

김좌근이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러나 나에게 주도권을 뺏긴 상태다.

더이상 고집부리면 김좌근도 체면이 구겨질 테니까 말이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어서오시요. 이판대감.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당연한거 아니겠소.”

김좌근이 회의실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냉소적인 대응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중앙기구는 의정부와 6조의 체계다.

그런데 조선초기에 설립된 의정부와 6조의 체계가 임진왜란을 전후로해서 빠르게 무너졌다.

그것은 비변사라는 새로운 기관의 등장이 원인이다.

비변사는 국가의 중대한 시기에 안보와 국방에대한 결정을 신속하고 내리고 통합하기 위해서 임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비변사 조직은 임진왜란 시기에 나름 큰 역활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 비변사는 상설기구처럼 변하였다.

나중에는 본래있던 중앙기구인 의정부와 6조를 능가하는 조직으로 커버린 것이다.

뜻있는 신하들이 조선후기부터 비변사의 문제점에대해 비판과 개선을 요청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이제 안동김씨를 중심으로한 세도정치의 시기에 들어와서는 비변사의 폐악은 극악으로 치달았다.

그렇게만든 장본인이 김좌근이다.

실세를 손에쥔 김좌근은 본인이 비변사의 최고인 도제조의 직책을 차지하며 안동김씨와 협력세력을 비변사의 상부요직에 채워넣었다.

비변사는 초기에 임시기구로 출발하면서 의정부와 6조에있는 관료들이 비변사의 직책들을 겸임하는 구조로 편성되었다.

때문에 비변사로인해 의정부와 6조가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폐단을 가져왔던 것이다.

지금 비변사는 김좌근을 필두로 안동김씨 패거리의 친목단체로 변해버린지 오래다.

안동김씨 패거리는 오전에있는 조회에 참석한 뒤에는 나머지 업무들은 아래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비변사로 모였다.

여기에서 권력유지를위한 비밀회의와 밀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오전에 있었던 상참(약식조회)때의 일때문에 그런것이요?”

호조판서가 눈치를보며 질문했다.

여기에는 이조판서인 김좌근을 포함해 호조, 병조, 형조의 판서들, 그리고 안동김씨에 줄을대서 요직에 올라간 관료들이 모여있었다.

겉으로 비변사 소속의 인원들로 여기에 모였지만 실제로는 김좌근의 소집명령에따라 온것이다.

시종이 차를내오자 김좌근이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우리들이 아무래도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거 같소.”

“원범이 그놈에대한 것이요?”

“이판대감께서 농담을 하시는구려.”

“기껏해야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무지렁이가 뭘 알겠소?”

김좌근의 말에 나머지 관료들이 대답했다.

그들이 말하는 원범.

국왕인 철종 이원범이다.

그런데 부패한 세력가들답게 그들은 국왕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놀리며 거들먹 거리는 중이다.

참석자들의 말에대해 김좌근의 표정은 여전했다.

“처음에도 그렇게 생각했소. 이하응 놈을 임금으로 등극시키는 것보다는 수천배 낫다고 말이요. 그런데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소? 우리들이 경계했던 이하응은 영의정을 보좌하는 의정랑이란 자리를 꿰차지 않았소?”

“의정랑이라고 해봐야 임시직일 뿐이잖소?”

“그것도 있지만 이하응이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무지렁이 놈에게 고개를 바짝 숙이는건 물론이고 지금은 수족처럼 행동하고 있소. 아무리 원범이 놈에게 등용되어 갑자기 관직을 받았다고 하지만 통상적인 군신관계를 넘어선 수준이요.”

“하지만 흥선군이 의정랑의 직책을 맡는것에 허락한것은 이판대감이지 않소? 그리고 박규수 놈이 병조참지에 오르도록 한것도 이판대감의 결정이기에 따랐던 것이요.”

병조판서인 이규동이 불만을 드러냈다.

김좌근이 쏘아보았다.

병조판서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불만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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