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석과 실무관료들이 엎드렸다.
그들은 철종 이원범이 기거하는 희정당을향해 몇차례나 절을 올리며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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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전하를 뵈옵니다.”
“그대들이 대비마마를 잘 보필하고 있어서 과인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두명의 상궁들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창덕궁에서 진행되는 일과는 전날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럴것이 어젯밤에 침소에서 뒤척거리며 여러가지 생각을 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박규수와 흥선군 이하응을 조정의 관료로서 발탁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처음에 예조판서, 공조판서, 심지어는 영의정인 정원용 마저도 반대를 하였다.
하지만 이들에대한 설득을 진행했고 3명도 결국은 나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반대가 예상되는 김좌근이나 안동김씨들에 대해서는 영의정이 협상과 교섭을 벌어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걸 주고 내쪽에서 원하는걸 받는것.
기브엔 테이크(Give & Take) 방식이지.
그것이 전부는 아니였다.
표면상으로 수렴청정을 실시하고 있는건 순원왕후였고 그녀의 생각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순원왕후에대한 설득작업도 동시에 해야한다는것.
그리고 정원용이 김좌근과의 협상에서 우세를 잡을수 있도록 하는것도 필요했다.
그때문에 아침에 진행되는 순원왕후에대한 문안인사는 각별히 중요한 부분이였다.
상궁의 안내를받아 들어갔다.
순원왕후가 지내는 침소는 검소하게 지어진 곳이다.
임금인 내가 생활하는 희정당에 비해서는 규모도 작았다.
대신 주변에있는 화단이나 나무들과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장소이다.
“어서오십시요. 주상! 밤새 별고가 없으셨는지요?”
“대비마마. 아니 어머님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주상께서 저를 어머니라고 불러주시니 정말로 고맙군요.”
대답하던 그녀의 표정이 약간 붉어졌다.
역사에서 그녀 순원왕후의 인생은 여러가지 불행한 사건들이 많았다.
그녀의 남편이였던 순조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였던 효명세자도 단명을 하였다.
그뿐인가?
하나밖에 없었던 손자 헌종마저도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그녀의 인생은 정말로 처랑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실역사에서 철종이 새임금이되고 명목상으로 순원왕후의 양자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철종과 순원왕후의 사이가 친근한것은 아니였다.
그것도 당연했다.
철종이 볼때 순원왕후는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안동김씨의 수괴, 김좌근의 누나였으니 말이다.
그때문에 서먹한 관계였다.
철종의 경우에는 안동김씨와 거리가 좀 있었던 신정왕후(조대비)쪽과 더 가까웠던것도 사실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이 내가 철종으로 환생한 지금에도 크게 변한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성격이나 행동이 실역사에서의 철종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에 창덕궁으로 입궐하고 순원왕후를 만났을 때에도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것이 지금도 나와 순원왕후와의 관계가 꽤 친밀함을 유지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그녀를향해 아들로서 어리광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안인사때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같이 시간을 보낸것도 친근함이 깊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오늘은 주상께서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실지 기대가 되는군요.”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다과상을 내밀었다.
순원왕후와 친근함을 유지하고 가까워지는 부분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조선의 부국강병과 생존을 위해서는 어차피 외국과의 교류는 필요했다.
그것은 임금인 내가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하는 상황에서 진행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인 나를 지지해줄 세력을 만드는게 중요했고 그중에서 핵심이 순원왕후다.
그녀가 조선의 쇄국을 고집하거나 개방을 반대하면 임금인 나로서도 그걸 무시하고 진행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기회가 있을때마다 외국에대한 여러가지를 말해주며 흥미를갖게 하였다.
김좌근이나 안동김씨들.
그리고 성리학에 매몰되어 사고가 꽉 막혀있는 성리학 꼰대들을 설득하는건 쉽지않았다.
그에반해 생각이 유연하고 막혀있지 않은 조선의 여성들은 이후의 근대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인재들이 될것이니까 말이다.
“오늘은 영길리국에대한 것입니다.”
“주상이 말씀하신 영길리국은 전세계의 바다를 항해하는 국가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과거 수년전 벌어졌던 청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양이들의 국가중에 그처럼 강대한 나라가 있다니, 이런것을 볼때 조선의 상황은 풍전등화처럼 아슬아슬하군요.”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처음에 순원왕후는 내가 서양의 문물이나 여러가지를 알고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가 생각해도 나는 강화도에서 농사나하던 촌부였으니 말이다.
이런 그녀의 의문에대해 적당히 둘러대었다.
몇년전 강화도에 표류해 들어온 양인들을 도와준적이 있었고 그들을통해 여러가지를 들었다고 말이다.
보통의 조선인이 표류해온 양인들을 몰래 도와주었다는건 국법을 어기는 행위였지만 임금이된 나를향해 그것을 문책할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식으로 적당히 이유를 붙여 설득했기에 이제는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어머님. 저는 조선의 임금으로서 그 역활을 다하고자 합니다.”
“정말로 좋은 각오와 결심이십니다. 주상.”
그녀가 흐믓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임금의 각오와 결의를 보여준뒤에 다음 단계다.
“듣자하니 조선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있다고 합니다.”
“조정에있는 수많은 대소신료들은 주상전하를위해 충심으로 보필을 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김좌근을 따르는 간신배 세력들을빼고 말이지.
“어머님 말씀대로 조정에 많은 인재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는 여전히 임금과 종묘사직을위해 봉사할 인재들이 많고 그들중에는 기회를 가지지못한 인재들도 있습니다.”
“주상의 그말을 들으니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고 싶다는 뜻이군요. 염두에두고 있는 인물이라도 있습니까?”
그녀가 기대감을 표시했다.
한번 수렴청정을했던 순원왕후였기에 그녀로서도 수렴청정이 얼마나 골치아프고 힘든것인지 잘알고 있었다.
그때문에 실역사에서도 철종대에 진행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은 원래보다 빨리 끝내면서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내가 임금으로서, 그리고 조선의 군주로서의 역활을 제대로 할수있다는 믿음을 주는것도 필요했다. 순원왕후를향해 박규수와 흥선군 이하응에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예상대로 박규수에 대해서는 큰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하응에대한 부분이 나오자 그녀도 표정이 굳어졌다.
“주상께서 굳이 흥선군을 조정에 들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일전에 흥선군을 만나본결과 그가 조정과 임금에대한 충심이 깊다는걸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우고 준비한 학식과 능력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주는것이 어떨까 생각됩니다.”
“흥선군을 만나서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군요.”
“지금 조정에는 흥선군을 좋게보지 않는 신료들이 있다는것도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흥선군을 조정의 내부로 등용하되, 그에게는 의정부 정랑이라는 임시직을 줄 계획입니다.”
“어떤 관직입니까?”
“현재 영상대감(영의정)이 나이도있고 신료로서 직무를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흥선군을 의정부 정랑으로 임명해 영상을 보좌하는 역활을 줄려고 합니다.”
설명을듣자 그녀의 표정이 좀 변하였다.
순왕왕후로서는 일부 신료들중에 이하응을 차기 임금으로 추천했던 부분도 있기에 그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흥선군 이하응을 직접 만나고 그를통해 임금에대한 충성의 맹세를 받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도한 것이다.
조금전에 내가 말한 의정부 정랑이라는 임시직-
이것이 흥선군을 등용하고 관리하기위한 방법중에 하나였다.
내가 흥선군에게 시킬일은 일종의 행동대장이다.
그때문에 한분야에 특화된 관직을 줄수는 없었다.
흥선군에게는 6조의 한부분에 해당되는 관직을 줄수가 없었고 동시에 언제든지 회수가 가능한 임시직을 준것이다.
그리고 김좌근과 안동김씨 세력의 경계심을 없앨수 있었다.
흥선군 이하응과는 달리 박규수에 대해서는 병조참의-라는 관직을 생각해두고 있었다.
지금 병조참의 문주광이 지병으로 더이상 관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인것도 있고 박규수를통해 병조에서 나의 세력을 키우기 위한것도 있다.
박규수의 재능은 어떤분야를 맡겨도 훌륭하지만 지금은 병조참의라는 자리에 잘 어울렸다.
그렇다해도 병조에서의 서열은 병조판서, 2명의 병조참판 다음으로 4위에 불과하지만 일단은 이정도로 만족해야 할거 같다.
“흥선군을 의정부 정랑으로 임명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흥선군의 상관이될 영상대감(영의정)이 직접 나서서 조정내의 다른 신료들을 설득하기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머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것입니다.”
“그렇군요. 주상전하께서 그렇게 일처리를 하시다니! 이제 즉위하신지 얼마되지도 않는데 임금으로서 신하들과 어떻게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지를 배우신거 같군요.”
“이것도 어머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상의 칭찬이 과분할 따름입니다.”
순원왕후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로서는 이하응을 등용하는 문제때문에 조정내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정신료들중에 큰어른에 해당되는 영의정 정원용이 직접 나선다면 큰 문제도 안생길 것이니까 말이다.
나로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순원왕후와의 친밀함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새엄마가 생겼다는 기분도 들었다.
어떤 이들은 순원왕후를 안동김씨 권력의 배후인물.
또는 권력을 탐했던 인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내가 접해온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지극히 평범하고 어떤 면에서는 조선과 민초들에대한 애정이 깊은 인물이였다.
* * *
‘얼마나 부정축재를 했으면...’
한숨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인가?
엄청난 비극이고 불행이다.
김좌근과 안동김씨, 그리고 세도가들이 나라의 곳간에서 이득을 취할때마다 수많은 민초들이 굶어죽어간 것이다.
아직도 조선은 얼마전에 벌어졌던 참극.
경신대기근의 참상을 제대로 극복조차 못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보면, 철종의 즉위기간에도 조선에는 크고작은 기근들이 발생한다.
그나마 올해는 작황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지만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어떻게될지 모르는 것이다.
미리 준비안된 상태라면 내가 임금으로 있는 기간에 또 수만명의 조선백성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봐야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반푼이 사학과였고 조선역사를통해 세도정치 기간에 김좌근과 안동김씨들이 엄청난 부정축재와 패악질을 했다는건 배웠다.
그것이 어느정도이고, 조선에 얼마나 큰 피해를 줬는지에 대해서는 피부로 와닿지가 않았다.
이제 그것이 눈앞에서 느껴진다.
“소신들이 부족하여 전하의 성은에 보답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옵니다.”
“아니요. 이정도면 정말로 훌륭한 것이요. 오히려 경들에게 상을 내리고싶은 기분이요. 하지만 과인이 경들에게 공개적인 포상을 못하는걸 이해해 주시요.”
“아닙니다. 황송하옵니다.”
선임인 유연석이 머리를 숙였다.
유연석을 필두로한 호조의 실무관료들이 한달가까이 밤샘 작업을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양은 방대했고 탁자에는 그 자료들을 적은 책들이 10권 이상이나 쌓여있었다.
‘이조판서놈. 국고를 거덜낼 작정이였구나.’
김좌근이 호조를통해 착복한 자금과 재물이 엄청날 정도였다.
때문에 관료들에게 지급할 녹봉조차 부족해 지방관들은 풀뜯어 먹으며 생활해야할 정도다.
그런데 웃긴것은 또 있었다.
원래라면 중앙정부에서 녹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기에, 지방관료들이 배를 쫄쫄골면서 생활해야 하지만 지금은 더 배부르게 탱자탱자 거린다.
상당수의 지방관들이 이조판서인 김좌근에게 뒷돈과 뇌물을주고 지방관의 벼슬을 얻은것이다.
때문에 중앙에서 녹봉지급이 제대로 안되자 김좌근과 안동김씨들의 묵인하에 엄청난 재물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나마 청렴결백한 지방관들은 지급받은 녹봉조차도 민초들을위해 사용하다보니 정말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김좌근과 안동김씨 놈들때문에 조선이 붕괴직전까지 몰리는 중이였다.
“종걸아!”
“하명하십시요. 전하!”
“한달동안 수고한 호조의 관원들에게 귀한술과 고기를 대접해라.”
“알겠습니다.”
송내관이 밖으로 나갔고 얼마후 상을차려서 들어왔다.
이들에게 공개적인 포상은 줄수없어도 임금이 그들을 아낀다는 성의는 보여줘야지.
호조의 관원들이 감복하며 몇차례나 감사를 표시했다.
그들과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어차피 자료들이란것이 숫자의 나열이다.
선임인 유연석이 몇가지 질문에대해 설명을 하였다.
김좌근과 안동김씨들이 빼먹은 자금과 재물들은 조선이 1년에 거두어 들이는 조세에서 2할을 넘어서는 정도였다.
가난한 조선정부의 재정과 경제에 이놈들이 치명타를 날린것이다.
당장에라도 군사들을 풀어서 김좌근과 안동김씨들을 박살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