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명의 인물들이 그늘속에 숨어 저택을 철저하게 감시중이란 사실도 몰랐다.
힘없는 거렁뱅이들은 몽둥이 찜질로 쫓아내는데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둠속 감시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눈치챌수도 없었다.
그깟 몽둥이찜질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비밀스런 방문자
“새로 부임한 현감때문에 죽겠구만.”
“그러게 말이야.”
향리들이 투덜거렸다.
일부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내저었다.
지방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현감을 포함해 사또들이다. 흔히 사극에서 지방의 책임자라고 하면 보통 사또라는 직함이 자주 나온다.
이것은 지방에 파견된 관료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직함이다.
그리고 사또나 고을원님들을 보좌해서 해당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게 향리들이다.
전라북도 부안의 향리들은 그전까지 팔자좋은 세월을 보내었다.
전임 현감이였던 방승진은 능력치도 별로였다.
소문에는 중앙에있는 세도가에게 뇌물을주고 자리를 얻었다는 말도 나돌았다.
그때문인지 재물을 밝히는걸 좋아했다.
향리들의 선임인 이방을 필두로해 적당히 구워삶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현감은 완전히 달랐다.
향리들이 적당히 구워삶을 수준이 아니였다.
물론 처음에는 전임인 방승진처럼 시도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사에 통찰력이 있었고 부임할 전라북도 부안의 지역사정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되자 부안의 향리들이나 지역의 양반들은 좋은 시절이 지나갔다고하며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부안에 살고있던 민초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거 같았다.
새로 부임한 현감 박규수는 매일마다 현장을 순시하며 민초들의 어려움을 살폈다.
박규수가 오면서 민초들이 겪던 억울했던 송사들이 대부분 풀리고 많은것이 변화되었다.
전라북도 부안을 새롭게 바꾸는 박규수였지만 그의 머리에는 점점더 고뇌가 쌓여갔다.
‘학문을 배우고 큰뜻을 결심하고 과거까지 급제했지만 내가 할수있는건 겨우 이정도가 전부라니.’
박규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안의 원님으로 부임해 나름대로 뜻을 펼치고 민초들을 보살피고 있었지만 한계가 많았던 것이다.
자신의 권한으로 할수있는 부분에서 많은것을 개선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박규수는 조정과 중앙정부가 얼마나 무능력에 빠져있는지를 체감했을 정도다.
아쉬움이 생각날 때마다 그의 뇌리에는 한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분이 젊은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지만 않으셨어도...’
박규수가 애도하는 인물.
그는 효명세자다.
실제로 박규수는 약관이라는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중앙정치의 무대에서 활동했다.
이런 박규수를 배후에서 밀어준 인물은 효명세자였다.
일찍부터 효명세자와 친분이 있었던 박규수다.
젊은시절에 효명세자의 개혁에 감복하였고 많은 부분에 참가를 하였다.
그것이 안동김씨를 포함해 효명세자를 적대하던 세력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개혁을 주도하던 효명세자가 젊은나이에 급사를 하면서 박규수의 지위도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개화파의 거두였고 뛰어난 명성을 지녔던 연암 박지원의 후손이라는것.
권력에 눈이먼 성리학 사대부들에게는 그냥 둘수없는 존재였다.
중앙무대에서 밀려난 박규수는 낙향했고 그곳에서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력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헌종말기에 과거에 급제하며 다시 관직에 진출했다. 그렇다해도 지금은 전라북도 부원의 현감이라는 낮은 직책일 뿐이다.
하지만 박규수는 실망하지 않았다.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그것으로 고을의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고 민초들이 박규수를 칭송했다.
“어서오십시요. 나리!”
“농사일은 좀 어떤가?”
“나리께서 힘써주신 덕분에 올해는 풍작이 될거 같습니다.”
“다행이구나.”
박규수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농사가 풍년이되면 그래도 민초들이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전라도는 조선에서도 농작물이 풍성한 곳이다.
그런데 기묘한건 조선시대에서 지방의 탐관오리들이 가장 극성을 부리고 많이나온 지역이 또 전라도다.
역사에서도 동학농민이 먼저 발생한 곳이 전라도였으니 말이다.
이처럼 전라도가 조선의 곡창지대였기에 그만큼 지방의 탐관오리들이 뜯어먹을것도 많았다는 뜻이다.
오전에 현장순시를 마친 박규수는 복귀했다.
얼굴에는 지친기색이 좀 있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이제는 고을내의 정무를 포함해 여러가지 일을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박규수에게 다가오며 알렸다.
“사또 나리.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특별히 올만한 사람은 없을텐데.”
박규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다가온 하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찾아온 사람은 무관으로 보이는데 자신은 한양에서 왔다고 합니다. 급히 사또나리를 뵙고 싶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한양이라. 들어오라해라.”
무슨 영문인지 알수없지만 멀리서온 손님을 내칠수는 없었다.
다만 중앙에서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거의 없다는것.
이때문에 불안한 느낌도 스쳐갔다.
잠시후 앞으로 건장한 체격을지닌 중년사내가 나타났다.
박규수는 한눈에 상대가 범상치 안다는걸 직감했다.
무인의 풍모를 드러내는 인물이였고 눈빛은 매서웠다. 한양에있는 중앙군에 소속된 무관이란걸 짐작할수 있었다.
“뭣때문에 누추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박규수 어르신을 뵙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그럴만한 인물이 아닌데.”
박규수가 대답하며 하인에게 신호했다.
찾아온 무관이 사적인 만남을 원하고 있다는걸 감지했던 것이다.
주변에 다른 시선이 없다는걸 파악하자 무관이 말했다.
“소인은 비호국에서 활동하는 송대경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온것은 박규수 어르신에게 한가지 중요한 밀서를 전달하고 싶어서 입니다.”
“비호국이라. 처음 들어본 이름이군요. 본관이 조정의 일을 모두 아는것은 아니나 당신이말한 비호국은 어떤 부서에도 있는 기관이 아니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애초에 존재부터 비밀에 붙여져 있습니다.”
“비밀스런 조직의 인물이 뭣때문에 나를 찾아 온것이요. 그것보다 내가 그런 조직과 연관을 맺게된다는 사실부터 불쾌할 뿐이요.”
박규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청렴결백을 신조로 삼고있는 그였다.
때문에 이것은 흑막이 있다고 깨달은 것이다.
박규수의 반응에대해 비호국의 무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누구에게도 비호국에 대한것을 언급할수 없었다.
이번에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기에 그런것이다.
“비호국의 존재가 비밀에 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상전하의 엄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해를 불러 일으킨 부분은 사죄하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주상전....”
박규수도 놀라면서 되묻다가 입을 닫았다.
상대가 임금을 직접 명칭하다니?
얼마나 간덩이가 부었기에 그럴까.
하지만 무관의 표정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자신을 놀리는것이 아니다.
주상전하라는 말을 들었을때 박규수는 찰나간에 흥분되었다. 그도 일정부분 소문을 듣고있었다.
한양에서 멀리떨어진 전라북도의 부안이지만 그와 같이 동문했고 친밀한 동료들중에는 한양에서 생활중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가끔씩 전해주는 소식들은 박규수에게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특히 새 임금이 강화도에서 한양에 도착한 첫날.
수많은 민초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였고 그 소식은 전국으로 소문을타고 퍼지는 중이다.
여기에대해 상당수의 기득권 사대부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이것을 관심있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박규수처럼 조선의 개혁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 말이다.
‘허어. 이거야말로 놀라울 정도다.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도 안된 전하께서 벌써 비호국같은 비밀조직까지 만들어서 운용하고 계셨다는 것인가?’
박규수는 등뒤로 전율이 스쳐갔다.
새임금이 즉위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것이다.
특히 비호국같은 비밀조직을 운용하고 있다는것은 박규수를 놀라게 하였다.
새로운 임금이 어떤걸 생각하고 있기에 이정도로 치밀하고 비밀스럽단 말인가?
박규수의 표정은 호기심과 열정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무조건 믿을수는 없었다.
“자네가 비호국에서 활동하는 무관이라 밝혔지만 그것을 어떻게믿고, 또한 그 비호국을 만드신게 그분이란 사실을 어떻게 믿을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박규수 어르신에게 이것을 보여주라고 하셨습니다.”
무관이 품속을 뒤져서 뭔가를 꺼내었다.
이럴때를 대비해 철종인 이원범이 직접 쓰고 연락책인 종걸이(송내관)을 시켜서 비호국에 전달한 것이다.
“이럴수가...”
서찰을 펼쳐본 박규수의 양손이 떨리고 있었다.
임금이 자신에게 직접 밀서를보낸 것이다.
더 충격적인건 그안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과거 박규수가 효명세자와함께 할려고했던 조선의 개혁.
그것을 이룰수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새임금은 자신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었고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등극한지 채 1년도 안된 임금이고 약관의 나이를지닌 인물이였다.
도저히 세간에 떠도는 소문.
강화도에서 농사나 짓다가 온 촌부라는 사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고로 저는 서찰의 내용을 전혀 모릅니다. 애초부터 저에게 맡겨진 임무는 그 서찰을 박규수 어르신에게 전달하는것이 전부이니까요.”
“그렇군.”
박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통해 새임금이 만든 비밀조직인 비호국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비밀을 유지하는지 짐작할수 있었다.
비밀조직이란건 기밀을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위험하고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비호국의 운영방식이니 체계는 박규수가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정교했다.
이런 비밀조직을 단기간에 만든 임금이라면.
박규수는 내부에서 뭔가가 울컥하면서 올라왔다.
진정한 기회가 온것이다.
* * *
화르륵!
엄청난 불길이 솟아오르고 쇳물이 흘러내렸다.
강력한 열기로인해 주변에서 작업하던 일꾼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누구도 힘들다고 불평을 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경우는 없었다.
열심히 일을하고 쇳물을 녹이면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곡식이없어 아내와 자식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여있던 그들에게 지금의 일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정확히는 공조를통해 노임을 받았고 하루가 지날수록 더 많은 인원들이 추가되었다.
“정말로 신기하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먼.”
“왜 그러십니까?”
“내가 반평생을 쇳물을 만들고 철을 캐는 일을 해왔지만 지금 우리들이 하는 방식으로 철과 쇳물을 만들줄은 꿈에도 몰랐지 뭔가.”
“듣고보니 저도 그렇습니다.”
중년사내의 말에 옆에서 거들던 일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사내, 정도영은 어릴때부터 철광산에서 일을하며 잔뼈와 경험이 있었다.
철광산에서 광석을 캐는 일부터 시작해 그것을 녹여서 쇳물을 만들고하는 과정까지 모든것을 경험했다.
단순한 경험만이 아니라 그의 손을 거치면 최고로 품질좋은 철강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정도영과 일행들이 처음에 공조의 관헌들에의해 고용되고 작업에 투입되었을때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틀린말이 아니다.
실제로 공조의 관헌들은 정도영과 작업원들이 진행하는 현장일들을 상당부분 맡겨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