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준비가 되었습니다.”
호위청 무관이 대답했다.
희정당에서 나오자 10명정도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호위청에서도 날래고 실력이 출중한 인재들이다.
그들중에 몇명은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10명도 많은거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합니다.”
무관인 김일종이 대답했다.
호위청 내부에서도 실무에 뛰어나고 부하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다.
이후에는 호위청에서 중책을 맡기에 충분한 인재다.
나를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호위청 무사들.
그들의 눈빛에는 결의가 대단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내가 창덕궁과 여러 장소에서 해왔던 것들을 지켜봤던 그들이다.
처음에는 그들도 나를 강화도에서 온 촌놈이라는 생각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특히나 내가 군기시를 직접 방문해 여러가지 화약들을 직접 검토하고 화승총까지 사격하는 모습에 그들은 탄복했다.
국왕이 국방과 병기에 관심을 기울인다는건 곧 무인들에대한 처우와 대접에도 신경을 쓸것이란 부분이다.
단순히 관심만있는 왕이아니라 자신들보다 더 병기와 군사부분에대해 잘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염원하던 국왕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인들을 무작정 오냐오냐 해주고 그들이 막나가도록 해줄 생각은없다.
제대로 충성을 바치고 할일하는 무인은 키워주고 실력없는 관료는 철저하게 잘라버릴 테니까 말이다.
실력에 바탕을둔 탕평책-
이것이 조선을 진흙에서 구해낼 방법중에 하나다.
“훌륭하군. 그럼 앞장을 서게.”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밖에 나가서는 전하라는 말은 절대로 입에 담지말게. 그것은 스스로 여기 왕이있다는 광고를 하는것이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호위청 무사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 * *
“느긋하게 한양 시내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기회도 없군.”
“다음에 또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정도로 만족해야지.”
종걸이를향해 대답했다.
오늘의 야간잠행은 첫번째 목적이 공조판서의 자택을 방문하는 것이다.
거기까지 가는 방법은 야간잠행을통해 이동한다.
나로서는 그사이에 한양의 시내와 밤거리를 감상한다는 기회도 있었다.
어차피 첫술에 배부를수는 없지않나.
이후에도 야간잠행을 나설기회는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오늘의 야간잠행을통해 얻은 성과는 많았다.
낮시간에 가마를타고 군기시로 행차할 때와는 다르게 많은 것들을 목격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양에있는 민초들의 생활이 이정도로 열악했다니.’
야간잠행을통해 절실하게 느낀 부분이다.
대로변을 포함해 골목의 여러 장소들에는 구걸하는 거지들이 많았다.
생각 같아서는 저들에게 적선을 해주고 배고픔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만약 임금이 야간잠행을나서 거렁뱅이들에게 적선을 베풀었다는게 알려지면 그것은 김좌근 세력의 귀에도 들어갈테니 말이다.
현재로서는 김좌근 세력들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는게 중요했다.
일부러 그놈들이 긴장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오히려 적들을 방심하게 만들고 헛점을 드러나도록 한뒤에 쳐버리는게 전술의 기본이다.
“도착했습니다.”
“여기인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명색히 공조판서인데 집이 작은 편이군.”
“사실 공조판서의 녹봉만으로 한양에서 대궐같은 집을 얻을수는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구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녹봉이 대단히 많은것은 아니다.
특히나 공조판서처럼 서민으로 생활하다가 과거에 급제해 판서까지 올라간 상황이면 집안에 재산이 많은것도 아니였다.
공조판서의 경우에는 고향이 강원도의 두메산골이다.
물론 공조판서가 과거에 급제하자 마을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고 큰 잔치가 벌어졌지만 말이다.
그래서 공조판서의 자택은 의외로 아담한 크기였다.
하지만 한양에는 공조판서의 자택쯤은 초가집이나 움막처럼 보일정도로 의리의리한 저택을가진 자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안동김씨 세력의 실권자인 이조판서 김좌근의 저택은 99칸 대궐의 수준이다.
어쩌면 99칸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안동김씨는 조선후기 때부터 집안에 돈이 모이고 권세를 누리면서 지내왔다.
따라서 안동김씨가 지금까지 부정으로 축적한 재산들은 엄청날 것이다.
‘생각해보니 안동김씨 놈들을 치기전에 그놈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보유했고 국고를 빼돌렸는지 파악해놓을 필요도 있겠군.’
머리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안동김씨를 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놈들이 숨겨놓은 재산을 한푼도 남김없이 거두어 들이는것은 더 중요했다.
안동김씨만이 아니다.
지금 조선에서는 부정축재로 재산을모은 권세가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외에 지방에도 존재했다.
물론 지방에서 기반을 잡고있는 세도가들의 경우에는 한양에있는 중앙의 세도가들에비해 규모와 크기는 적겠지만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조선에는 개혁을 하기위한 돈이 부족한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족한 재정과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배를 불리는 놈들도 꽤 많았다.
따라서 재정을 건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놈들을 족치고 가진것을 토해놓도록 해야한다.
말로해서 들으면 그것으로 좋지만 안그럴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나로서도 오히려 상대가 반항할수록 더 좋다.
두들겨팰 명분이 생기니까 말이다.
“이리 오너라!”
안내하던 무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잠시후 중년여인이 나왔다.
그녀는 무관과 종걸이를 확인하더니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왕림해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전...”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여기에 임금이 야간잠행을 나왔다는걸 깨닫고 신속하게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는 대문을 열더니 안내를 시작했다.
* * *
“전하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시다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정말로 주상전하께서 오시다니.”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방안에는 공조판서의 소집명령을받은 조선팔도의 거상들이 있었다.
저마다 상당한 재물을 보유했고 그들이 부리는 객잔도 꽤 규모가 있었다.
때문에 거상들이 먹여살리는 식속들만도 개인당 수십명을넘어, 수백명이 될수도 있을것이다.
그들 개개인이 한조직의 수장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신분은 농민보다 낮은 상인들이다.
조선시대의 신분질서인 사농공상에서 가장 하위에 위치하는 이들.
때문에 그들은 돈과 재물이 많아도 감히 양반앞에서 고개를 들고다닐수 없었다.
이런 그들에게 임금인 내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느꼈을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저마다 엎드려서 고개조차 들지못하는 그들의 모습-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도 부담스럽다.
공조판서도 어쩔수없는 상황이라며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뭔가 말을 해야겠지?
“과인이 여기에 온것은 조선팔도의 거상들인 자네들을 만나기 위한것이네. 그리고 지금은 야간잠행으로 나온것이니 이쯤에서 고개를들고 편안이 있도록 하게.”
그제서야 몇명이 고개를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계산이 빠르고 상인으로 살아온 그들이다.
몇명은 머리속으로 공조판서와 임금이 왜 자신들을 여기로 불렀을까를 생각하는 중이다.
공조판서도 그들에게 몇마디하자 분위기는 점차로 부드럽게 변하였다.
얼마후 그들중에서 선두에있는 중년사내가 말했다.
한양을 대표하는 2대 거상중에 한명이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비천한 소인들을 여기까지 부르셨는지 그 연유를 모르겠사옵니다.”
여기에는 대략 20명정도의 상인들이 모여있었다.
조선팔도를 대표하는 상인들이다.
이들을통해 조선과 외국과의 무역 그리고 조선내의 물류와 유통이 진행되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대표적인 지방상인이라고 한다면 보부상들이다. 하지만 보부상들도 상당수는 각지역을 대표하는 거상들과 연계되어 활동하였다.
때문에 여기에모인 20명의 거상들이 앞으로 조선의 무역과 경제활동에 있어서 핵심을 담당할 인원들인건 분명했다.
조선은 건국때부터 농본주의를통해 농업을 육성했다.
조선이 건국될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것이 적절했고 최선의 정책인것은 사실이다.
그때에는 유럽도 기껏해야 중세시대에 머물렀고 상업과 대외무역들은 일부도시에서나 진행되던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유럽에는 해가지지않은 제국이라 불리는 영국이 전세계의 바다를 누비면서 무역과 상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비단 영국만이 아니다.
네델란드와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포르투갈을 포함해서 유럽에있는 크고작은 국가들이 전세계의 무역과 상공업에 뛰어든 상황이다.
그리고 신대륙에서는 상공업을 발전시키며 거대한 몸체를 불리고있는 미국이 존재했다.
아직은 미국의 잠재력이 본격적으로 나오는건 아니지만 좀더 시간이 지나면 세계최대의 강국으로 우뚝설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 신흥강국으로 준비중인 프로이센도 빼놓을수 없었다.
그에반해 아시아의 중심이자 조선인들에게 대국이라 불리는 청나라는 종이호랑이 신세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만 썩어도 준치라고.
종이 호랑이 신세라해도 지금 조선의 국력으로는 청을 제대로 상대할수 없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지만 말이다.
밀덕의 투자설명회
“그대들이 조선팔도를 대표하는 거상들이고 상업과 공업에있어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고 있기에 과인이 한번쯤 만나고 싶었던 것이요.”
“......”
내말에 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것때문에?
하지만 대부분 눈치빠른 상인들이기에 그것말고 다른것이 있음을 눈치챈 상태다.
무엇보다 야간에 잠행까지 해가면서 비밀리에 만나는 것이다.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조판서.”
“하명하십시요. 전하.”
“기왕에 조선팔도의 거상들이 모였으니 저마다 각자 자신들이 어디에서 활동하고 누구인지를 말해 보았으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공조판서의 지시에따라 소집된 거상들이 고개를들며 소개를 하였다.
예상대로 선두에있던 2명은 한양을 대표하는 거상들이다.
그리고 개성에서 활동하는 상인들.
평양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상인들.
그외에 삼남지방에서도 부산과 동래에서 활동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이들 거상들은 조선내에서의 활동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오키나와, 그리고 일본등지와의 국제무역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그 무역의 규모란것은 아직 소규모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들이 일단은 중국남부와 오키나와, 일본등지에 자신의 인원들을 파견해두고 있다는 사실은 꽤 놀라운 부분이다.
조선의 공무역은 여러가지 제약으로 제역활을 못했지만 팔도의 거상들이 진행하는 사무역의 경우에는 그 범위가 상당했던 것이다.
내가 여기와서 팔도의 거상들을 직접 만나는것도 이런 팔도의 거상들이 진행하는 사무역의 수준이 어느정도인지를 판단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조선이 본격적인 국제무역을 시작할려면 2가지 방식을 써야한다.
관청이 주도하는 공무역에만 집중하는게 아니라 사무역에 대한 부분도 같이 병행해야 한다.
대신 사무역의 경우에는 관리감독 기관을 두어서 제대로 통제하는게 중요하다.
이런 관리감독은 공조에서 담당하는게 적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