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69)

그것은 지금의 임금께서 강화도에서 한양으로 입성할때에 도성내의 민초들을향해 희망과 기대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10대후반의 청년이 그런것을 했다는 사실에 강기석도 내심 놀랐던 상황이다.

때문에 강기석은 새임금에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던중 자신에게 임금의 밀서가 도착한 것이다.

놓칠수없는 기회.

아니 놓쳐서는 절대 안된다.

‘어차피 입궐해서 주상전하를 알현하면 밝혀질 일이다.’

마음을굳힌 강기석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가 창덕궁으로 입궐하는 시간은 중신들이 퇴궐을마친 밤이였다.

들어가는 장소도 창덕궁의 정문이 아니라 외진곳에있는 후문이다.

무관으로 오랜생활을 해왔던 강기석은 그 후문의 위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것이 지금은 훈련도감에서 교관의 역활을 하지만 강기석은 여러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잠시후 후문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낮에 보았던 송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이정도로 변했을 줄이야.’

강기석이 새삼 놀라고 있었다.

이전에 창덕궁의 경비를 담당하던 호위청에서도 직무를 수행했다.

그때에 궁궐의 곳곳에 배치되었던 병졸들과 무사들의 군기는 지금같은 상태가 아니였다.

목표도 없이 그저 시간만 때우는 모습들이 대부분 이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후문에서 경비를서던 병졸들의 눈동자는 매서웠고 그들은 과거에 같이지냈던 강기석이 오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강기석은 그들과 인사를 한뒤에 송내관을따라 들어갔다.

오랜만에 찾아온 궁궐의 모습-

공기도 달랐고 과거에비해 더 차분해진 상태다.

그가 궁궐에서 무관으로 활약하다가 훈련도감의 교관으로 밀려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상관의 명령에대해 반항기가 있고 품행이 좋지 못하다는 것.

그에게 이런 악평을 내린것은 문신들이다.

붓이나 놀리는 문신들중에 그를 고깝게본 이들이 있었고 이후에는 이조에있는 김좌근과 그 세력들이 전출명령을내려 그를 쫓아낸 것이다.

“선배님도 주상전하의 밀지를 받으신 것입니까?”

“그렇네.”

강기석의 말에 최원상이 대답했다.

송내관의 안내를따라 창덕궁내의 깊숙한 희정당에 도착했던 강기석은 놀라고 말았다.

희정당의 앞에는 강기석이 과거 호위청에 있을때 그의 상관이였던 최원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강기석은 무관으로서 선배인 최원상을 무척이나 존경했다.

이후 강기석이 훈련도감으로 쫓겨난 뒤에는 서로 연락조차 못하고 지냈는데 이렇게 상봉하는 기회가 생겼다.

둘다 임금에게 밀지를 받았다는 사실.

묘한 동질감이 둘사이에 흘렀다.

이윽고 기다리던 강기석이 호기심을 발동하며 질문했다.

“선배님. 새로운 주상전하는 어떤 분이십니까?”

“자네는 한번도 주상전하를 직접 알현해 본적이 없었군.”

“그렇습니다.”

강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대해 최원상이 미소를띠며 말했다.

“정확히 어떤 분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드네. 다만 우리같은 무인들에게는 천상의 군신이 지상으로 재림한듯한 느낌일세.”

“그렇게 뛰어난 분이십니까?”

“지금 훈련도감에서 병졸들이 교육받는 신형보총이나 신형기병총들이 누구의 덕분인줄 아는가?”

“듣기로는 군기시에서 새로 개발했다고 하더군요.”

“외부에는 그렇게 알려져있지. 그러나 말일세. 군기시의 장인들을 불러서 신형보총의 설계와 여러가지 것들을 직접 알려주신 분이 바로 주상전하일세. 나로서도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군기시의 장인들도 생각지 못했던 그런 엄청난 기술들을 알고 계시다니 말이야. 다만 주상전하께서는 강화도에 있으면서 양이(서양인)들의 잡학을 어깨너머로 들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게 단순히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들이 아닐세.”

“그럴수가...”

선배인 최원상의 말에 강기석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로 군신의 재림인가?

자신이 신뢰하는 선배가 이정도까지 말한다면 허풍은 아닐것이다.

거기다 밀지를 보내서 자신들을 여기로 은밀하게 부른것까지.

범인이 생각지 못하는 권모술수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던중 강기석의 뇌리로 한가지가 더 스쳐갔다.

설마 나와 선배님의 과거 인연까지 알고서 이렇게 안배를 한것인가.

지금 생각해보니 우연이 아니다.

자신과 선배인 최원상을 미리부터 파악하고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다.

이제는 태산같은 무게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저 희정당안에 자신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있는것이다.

강기석이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 * *

“전하.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하라니.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 만약에 소신들이 불충을 했다면 처벌을 내려주십시요.”

“어명일세. 경들은 과인의 어명을 거부하겠다는 뜻인가?”

“그것은...”

두명이 엎드린채 말을 더듬었다.

조금전 내 명령이 청천벽력 같을거다.

송내관에게 밀지를받고 희정당에 들어온뒤에 곧바로 이런 말을 들었으니 말이다.

두명이 고개를 숙이며 경련을 일으켰다.

잠시 정신을 수습하던 차에 선임인 최원상이 대답했다.

“그것이 전하의 어명이시라면 소신들은 따르겠나이다.”

목소리에 흐느낌이 있었다.

이것으로 증명은 되었다.

지금 두사람은 내가 기름을지고 불길로 뛰어들라해도 그것을 기꺼이 할 각오가된 인물들이다.

내가 구상중인 첩보조직을 맡길려면 최소 이정도의 각오와 충성심이 있어야했다.

능력만 좋다고 될것이 아니다.

원래 첩보조직이란것은 능력만으로 되는게 아니다.

유연성도 없이 앞뒤 꽉막힌 부하를 책임자로 맡길수도 없었다.

왕에대한 깊은 충성심과함께 능력도 있어야 하는것.

그만큼 제대로된 인재를 고르고 적임자를 선발하는게 어려웠다.

첩보조직인 비호국을 감독하고 운영할 후보자를 선발하기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다.

처음에는 한명만을 선발해 맡겨볼까 생각했다는 바꾸었다.

어차피 비호국의 총책임자인 국장은 한명이지만 그런 국장을 보좌해야할 또다른 인물이 필요했다.

동시에 두명은 눈빛만 스쳐도 서로간의 생각을 알수있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우면 더 좋다.

재능도 있고 충성심도 강하면서 서로 친분이있는 두명을 한꺼번에 선발하는 과정.

한동안 다양한 무관들의 자료를 검토했고 그중에 두명을 선발했고 그들이 내앞에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명은 임금인 나의 첫마디에 꽤 충격을 받았다.

일단 테스트는 합격인 상태니 이쯤에서 장난을 끝내야지.

더이상하면 두명다 멘탈이 바사삭-해버릴거다.

“조금전 과인이 경들에게내린 어명은 변함이없소. 하지만...”

“.....”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것이지.

“그대들이 관직을 내놓고 낙향하는것은 단지 공식적인 행정절차로서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요. 중요한것은 그대들은 여전히 과인의 충성스런 신하들이고 관료들이라는 사실이요. 지금부터 과인은 두사람에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책임을 맡길 예정이요.”

“......”

둘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명은 내가 왜 밀지까지 써가면서 두명을 은밀하게 불렀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비밀조직의 원칙은 무얼까?

바로 비밀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다.

외부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숨어서 활동하는 조직.

그렇다면 해당 조직원들부터 최고 수장까지 그 모습이 공개되면 안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지내온 21세기의 경우에는 미국부터 시작해서 각국의 첩보기관들이 편성되어있다.

그 조직의 책임자들도 외부로 드러나있다.

CIA 국장, 그리고 국가정보원장등을 포함해서 공식적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때의 상황이고 지금은 19세기 중반.

거기에맞게 변형을 시켜야한다.

따라서 관직을 갖고있는 두명에게 따로 첩보조직의 운영을 맡길수는 없었다.

대신이 두명이 관직을 내놓고 물러난 상태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도록 하는게 더 효과적이다.

“경들이 담당하게될 비호국은 과인의 직속기관으로 오로지 임금의 명령만을 수행할 것입니다. 비호국에 참가할 인원들의 선발 및 여러가지를 두사람에게 일임하겠소. 그대들이 평소에 눈여겨본 인재들이 있다면 참가시키도록 하시요. 그리고 비호국의 활동에대한 자금과 여러가지는 모두 왕실의 자금을통해 지원될 것입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두명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이 어떤 선택을 받았고 앞으로 어떤일들을 하게될 것인지를 확신한 것이다.

거기에 따르는 위험도 각오하고 있을것이다.

두명이 앞으로 첩보조직인 비호국을 어떻게 운영하고 얼마나 큰 활약을 해낼것인지 기대된다.

신흥강국의 길을위해

“역시 나에게는 평상복이 더 편하다니까.”

늘상 입고다니던 용포를 벗어던지고 누런색이 감도는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어떤가? 임금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촌부로 보이지 않는가?”

“그보다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같은 느낌입니다. 전하.”

“하긴 갓을쓰고 도포을 입었으니 그럴만도 하겠군.”

송내관을향해 대답했다.

잠시 미복한 모습을 은경(거울)으로 확인했다.

이제 갓 19살의 얼굴.

그때문인가.

용포를 입고 있을때와는 다르게 어린티가 팍팍 난다.

그나마 용포를 착용하고 있을때에는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뭔가 엄근진한 모습이였는데.

하지만 오늘은 그런거보다.

“전하. 야간에 잠행을 나가시는건 너무나도 위험하옵니다. 혹시라도 옥체에 큰일이 생기시면 그것은 곧 조정과 종묘사직의 안위가 흔들리는 비극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미 결정된 부분이다.”

종걸이를향해 단호하게 대답했다.

왕이 된후에 지금까지 창덕궁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한양 외곽에있는 군기시를 방문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낮에 100명에 이르는 호위청 무사들을 대동하고 움직인 것이다.

또한 창덕궁의 정문을 벗어나서 군기시까지 갈때에도 주로 가마안에 있었다.

답답한 가마안에서 군기시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란.

물론 가마에있는 자그마한 창을통해 외부의 모습을 볼수도 있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명백했다.

주변에 다수의 호위청 무사들이 있다보니 행동에도 제약이 따르고 말이다.

따라서 오늘같이 편안한 복장으로 잠행을 하는날은 더없이 귀중한 시간이다.

다만 낮에는 불가능했고 지금처럼 야간이 되어서야 겨우 나갈수 있다는게 불만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밤의 잠행에대해 종걸이(송내관)은 며칠전부터 반대를했다.

일정부분 이해한다.

만약에 임금이 야간에 잠행을 나갔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송내관의 목숨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테니까.

그리고 야간 잠행에서 중요한것은 바로 비밀유지다.

야간에는 이조판서인 김좌근을 포함해 그 측근들이 대부분 퇴궐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김좌근이 심어놓은 첩자나 심복들이 창덕궁내에 없다고는 못할것이다.

만약에 야간잠행을 김좌근이나 세력들이 알게되면 나도 여러가지로 귀찮아진다.

때문에 종걸이에게 이 부분에대해 각별하게 주의를 주었다.

송내관도 이제는 내가 김좌근을 포함해 안동김씨와 세도가들을 엎어버릴거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처음에 종걸이는 이것에대해 꽤 걱정했다.

기본적으로 내관은 왕의 심복이고 특히 종걸이의 경우에는 임금을 직접 모시는 내관이 된것이 처음이다.

따라서 종걸이에게는 나의 생사와 지위가 곧 자신의 모든것과 연결된다.

때문에 처음에는 김좌근과 안동김씨 세력에 대항하는것에 두려움을 표시했고 걱정했다.

내가 종걸이의 입장이였다해도 강화도에서 막 임금이된 왕이미쳤나... 생각할테니까.

하지만 이후에 내가 펼치는 여러가지들을 보더니 이제는 결심을 굳힌 상태다.

실제로 종걸이의 경우에는 안동김씨의 허접한 놈들에게 과거에 수모를 당했던 경험도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종걸이가 문득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를해서 알게되었다.

어릴때부터 고환이 제거되어 안그래도 힘들게 살아가는 종걸이를향해 안동김씨중에 새파랗게 어린놈이 모욕을 퍼부었던 것.

물론 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내시 즉 환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황제들이 정치를 개판으로 말아먹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에서 내시(내관)들은 대체로 임금의 측근에서 은밀하게 행동하며 수족의 역활을 해왔다.

그리고 송내관은 나의 손발로서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당한 후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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