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렇게 귀엽고 총명한 소녀에게는 임금으로서 보상을 주는것도 필요하지.
그럴즈음 눈앞으로 차려놓은 다과상이 보였다.
이것도 송내관이 나름 충정을 발휘해서 임금인 내가 궁녀와 첫날밤을 보내니까 많이 먹고 힘써라는 뜻으로 한거 같은데.
“이런, 송내관은 과인이 다 먹지도 못할 다과상을 이렇게나 많이 차렸구나. 그러고보니 배가 고플테니 마음껏 먹도록해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박소현이 손을뻗어 다과상에있는 과자등을 집어들었다.
창덕궁에서 지내는 궁녀들이 항상 풍족하게 먹는건 아니다. 그나마 끼니를 거르지는 않을지 몰라도 상에있는 달콤한 과자들이나 떡등은 보통의 궁녀들도 쉽게 맛볼수 있는것이 아니다.
“어떠냐? 먹을만 하느냐?”
“정말로 달콤한 것이 꿀맛이옵니다. 전하.”
달달한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표정이 한층더 밝고 좋았다.
이정도의 사소한 것에도 만족하고 기뻐하다니.
기묘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원하는만큼 얼마든지 먹어도 상관없다. 지금은 조선에 없지만 이후에 조선이 타국과 많은 교역을하면 구라파의 양이들이 먹는 케이크와 초콜릿까지도 너에게 맛보여주마.”
“전하께서는 양이들의 음식을 알고 계시옵니까?”
“물론이다.”
“하지만 소문으로 듣기로 전하께서는 강화도에서...”
그렇게 말하다가 박소현이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말하면 임금에대한 불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를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대로 과인은 한때 강화도에서 농사꾼의 일을 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지내는동안 천운의 기회로 양이의 문물을 알고있는 여러 사람들을 알게되었다.”
대답을듣자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조금전 대답에서 양이의 문물을 알고있는 사람들을 만났다는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다.
내가 21세기의 현대문명에서 살다가 온 사람이라고 할수는 없으니 말이다.
갑자기 커피가 팍 땡기네.
솔직히 21세기 한국에 있을때에는 하루에 커피한잔은 꼭 마셨는데 말이야.
육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환생했는데도 그때의 기억과 습관은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 역사에서 커피가 본격적으로 들어온것은 앞으로 수십년뒤의 일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에는 커피를 마시는 문화가 꽤 퍼져있는 상태다.
여전히 귀족들이나 돈많은 자본가 계급이 주로 향유하는 문화이긴 하지만 말이다.
영국의 경우에는 커피보다는 홍차가 대세이긴 하다.
그놈의 홍차때문에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한차례 전쟁을 일으켰고 그것이 제 1 차 아편전쟁이다.
아편전쟁의 원인이 무조건 홍차때문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주된 원인중에 하나인건 분명했다.
하지만 조선에있는 대부분 사람들은 상국으로 생각하는 청제국이 영국에게 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우물안 개구리 신세.
이런걸 생각하니까 갑갑하다.
그래서일까?
나도모르게 저애를 상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늘어놓고 있었다.
“전하.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말이 끄는것도 아닌데 철로만든 거대한 수레가 스스로 움직일수 있다니요?”
“증기기관차라는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굉음을 내는것이 만약에 너도본다면 놀라고 말것이다.”
“양이들은 정말로 신기합니다. 어떻게 그런것을 만들 재주를 가졌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일찍부터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연구해서 기술을 연마했기에 가능했던 부분이다.”
서양의 과학기술 이란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것이 아니다.
중세시대의 암흑기에서는 동양보다 과학기술이 뒤쳐져 있었다. 하지만 계몽주의와 르네상스의 시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지금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전유럽을 거쳐서 퍼져나간 상태고 미국에서도 수많은 장소에서 산업과 공업발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사이에 중국을 포함한 청제국과 조선, 그리고 동양의 수많은 국가들은 발전이 정체되었고 낡은 구습에 얽매여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것에대한 호기심과 탐구심, 그리고 의욕을가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있는 궁녀, 박소현만해도 내가 말하는 수많은 것들에 눈을 반짝이며 듣고있지 않은가?
* * *
“지금 받은 물건들은 저쪽으로 옮겨놓게.”
“알겠습니다.”
마차에실린 물품들을 운반하는 인부들의 모습-
평양을 대표하는 거상, 유상의 행수인 박재천은 능숙하게 지시를 하달했다.
조선상업은 타국과 비교해 많이 부족했다.
이것은 조선이 건국초부터 농업을 중시하면서 상업과 산업을 천시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과 신분질서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장사치들은 사농공상에서 가장 낮은단계에 속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에서 상인들의 숫자는 점차적으로 늘어갔고 물류의 유통량은 증가했다.
각 지역마다 다양한 상인들이 경쟁과 이합집산을 하는 가운데, 큰 규모로 성장하는 객주들이 생겼다.
이들은 조선팔도 여러지역을 대표하는 상인들이 되었다.
그들의 명성은 사농공상에서 가장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많인 이들에게 알려졌다.
“행수어르신! 이번에도 개성에서 온 상품들이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정말일세. 이것도 개성에서 여기까지 운송을 책임져준 송상의 덕분이지.”
송상은 개성을 대표하는 상인이였다.
박재천은 송상들중 하나인 임광수과 여러차례 거래를 하였다.
얼마후 송상에서 운송을 책임졌던 사내가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확인은 마치셨습니까?”
“물론이네. 여기 인수증과 확인서네.”
“감사합니다.”
“뭘 그런걸 가지고. 우리쪽에서 송상으로 상품을 보낼때에는 그쪽에서도 똑같은 절차를 거치는 것이지.”
박행수가 대답하며 웃었다.
나라가 뒤숭숭 해지는 상황이긴 했지만 조선팔도내의 거상들은 투자와 상업활동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객주에 딸려있는 수많은 식솔들을 책임지는 상황이기에 허투르게 할수는 없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일이 남았는가?”
“한가지 잊어버릴뻔 했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인데.”
사내가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저의 행수 어르신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한양에있는 경상과 그곳의 행수께서 전국에있는 거상들에게 전하라는 지시도 있었습니다. 저도 확실한 내용은 모르고 읽어보시면 아실것입니다.”
박행수가 내용을 확인했다.
몇차례 눈동자가 커지며 깊은 숨소리를 내었다.
그럴것이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고 이례적인 까닭이다.
목숨을 걸어야 할거다
“행수님. 어떤 것입니까?”
“공조판서의 지시사항이라고 하는데.”
“공판대감께서 말입니까? 조선내의 상업과 상인들에대한 규율과 관리를 담당하는것이 공조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공판대감이 우리같은 상것들에게 연락을 보낸것은 처음이지 않습니까?”
“그렇네.”
부행수의 말에 박재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조판서라고 한다면 그들이 우러러 보기도 힘든 상대다.
지금까지 조선내 거상들이 공조 관원들을 만난다해도 기껏해야 하급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서찰의 내용은 꽤나 충격이다.
그리고 조선팔도의 거상들에게 동시에 보내는 내용이다.
“다음달 한양으로 모이라는 내용이네. 그리고 장소는 공판대감의 저택인데.”
“천지가 개벽할 일이군요.”
“그것만이 아닐세. 서찰에는 조선팔도 거상들이 한양에 소집되는것 외에도 약속 장소에는 고귀한 분이 참석한다는 것일세.”
“공판대감보다 더 고귀한 분이라면 누구일까요?”
“현재로선 짐작도 안되는 상황이네. 하지만 공조에서 이렇게 연락이 왔으니 무시할수도 없는 것이지.”
“맞습니다.”
부행수가 동의했다.
자신들의 생업과 관련된 공조에서 소집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걸 무시했다가는 조선팔도의 거상이라해도 한순간에 매장될수 있었다.
왜 소집령이 떨어졌는지 그리고 사농공상의 신분질서에서 거들떠도 안봤던 자신들을 조정의 관료가 불렀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였다.
“임행수에게 내용을 확인했고, 다음달에 한양으로 갈것이라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사내가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얼마후 그는 같이온 짐꾼들과함께 떠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박재천은 턱수염을 만졌다.
무슨일이 벌어질려고 하는가?
불안감도 생겼지만 기대감도 생겼다.
최근 한양에서 들려오는 몇가지 소문들.
그중에는 새 임금이 등극하고 난뒤에 백성들 사이에서 생기가 돌고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바람이 불고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수없었다.
그때 한손에 서책을든 막내아들이 나타났다.
“아버님.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냐?”
“글공부를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습니다.”
“그렇구나. 어련히 알아서 할걸로 생각되지만 글공부에 매진을 하더라도 몸도 살펴가면서 하거라.”
“알겠습니다.”
막내아들이 인사하더니 옆에있던 하인과 걸어갔다.
뒷 모습을 바라보며 박재천은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막내 도련님이 영특해서 갈수록 학문성취가 늘어가는거 같습니다.”
“기특한 놈일세. 하지만 비천한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열심히 글공부를해도 앞으로 그뜻을 제대로 펼칠수가 없다는것이 한스럽지만 말일세.”
“.....”
조선시대 글공부하는 서생들의 큰 목표는 과거시험을 치르고 급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반 사대부에게도 쉽지않은 일이고 실력도 뛰어나야했다.
그런데 최하위 신분인 상인에게는 실력은 둘째치고 과거시험조차 제대로 보기힘들다.
이제까지 과거시험에서 개천에서 용나듯이 양반이 아닌 경우에도 급제자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상인보다는 한참이나 신분이 위에속하는 농민과 중인들이다.
하층신분인 상인에게는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박재천은 평양거상으로 수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돈 푼깨나 만지고 재산도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신분은 한없이 낮다는걸 체감하고 있었다.
* * *
“이놈들아. 더빨리 움직여라!”
공기를 찢어발기는 고함소리.
그때마다 지시를받던 병졸들은 움찔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것도 당연했다.
자신들을 가르치는 훈련교감인 강기석이 혹독하기는 했지만 정도많고 잘 챙겨주기 때문이다.
외강내유의 인물이다.
더욱이 다양한 무기술에도 능숙했고 격투술에도 뛰어났다.
어떤 경우에는 병졸들 5~6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때려눕힐 수준이다.
더 놀라운건 이처럼 무력도 상당했지만 그는 뛰어난 지휘관이였다.
부하들로부터 존경심과 신뢰를 끌어내는 솜씨가 상당했다.
한동안 병사들이 신형 보총을 다루는걸 지켜보던 그가 걸어갔다.
나머지 병졸들은 제법 능숙했는데 한명이 서툴렀던 것이다.
어쩔수 없었다.
저번달에 들어온 신입이였고 아직도 부대생활에 적응조차 못한 수준이다.
보통의 훈련교감 같으면 다그칠 것이지만 강기석은 달랐다.
“죄송합니다. 교관님.”
“너무 긴장해서 그런거야. 내가 시범을 보여줄테니까 잘 봐.”
강기석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하며 신속하게 신형보총에 화약을넣고 탄환을 장전하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 속도와 솜씨에 나머지 병졸들도 감탄했다.
몇차례 실전적인 사격을 했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반복숙달을 하는것이 중요했다.
특히 훈련교감인 강기석은 부대에 새로 지급된 신형보총에 만족했다.
이전까지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승총과는 완전히 다른 엄청난 무기였으니 말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
“으아. 드디어 살았다.”
강기석이 말하자 병졸들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주저앉았다.
그들은 아침일찍부터 온갖 훈련을 소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