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는 훌륭하군요.”
“황공하옵니다.”
한기준이 머리를 조아렸다.
양옆에서 도열한채 지켜보던 군관들도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개량된 화승총을 사격한다고 할때 무척이나 당황했다.
화승총의 반동은 제법 되었다.
잘못 사격하다가는 화약불꽃이 몸에튀거나 반동으로 팔에 부상이 생길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200발의 사격을 능숙하게 해내자 놀라는 모습이다.
군대에서 50구경인 K-6 중기관총까지 다뤄본 상태다.
따라서 개조된 화승총을 사격하는것도 처음 1~2발을 쏜뒤에는 금방 적응할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발사성능이나 장전성능은 만족할만한 수준인데, 문제는 탄착군이군.”
200발의 탄을 쏜것은 이런것 때문이다.
총의 명중률을 결정하는건 탄착군이다.
뛰어난 성능의 저격총이라해도 한발한발이 똑같은 장소에 적중하는건 아니다.
다만 조준이 정확하다면 대체로 일정한 범위를 유지하면서 탄착군이 형성된다.
이것은 화승총부터 시작해 현대적인 소총에까지 적용되는 부분이다.
이윽고 한기준, 그리고 선발된 호위청 군관들과함께 표적지로 향했다.
표적중앙을 기준으로 반지름 15cm-의 범위안에 무수히많은 탄환들이 관통해 있었다.
“몇개인가?”
“소인이 계산해보니 185개 입니다.”
“200발의 탄환을 발사해 185개가 저 범위안에 들어갔다는건 놀라운 성과로군.”
“심지를 사용하는 화승에비해 방아쇠를 당기는것과 격발이 쉬워서 그런거 같습니다.”
“제대로된 분석이네.”
한기준의 식견은 탁월했다.
심지를 사용하는 화승총의 경우에는 화약을 배합한 심지가 타들어가며 조준이 계속 흐트러진다.
그리고 언제 발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호홉도 불규칙 해진다.
이런것이 명중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개량한 화승총, 백두철탄-은 뇌홍(뇌관)을 꽃은뒤에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것이다.
조준이 빠르고 명중률도 월등하게 높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불발탄을 포함해 화승총이 갖고있던 수많은 단점들을 극복해낸 엄청난 무기가 되었다.
“자네가 개조한 백두철포는 훌륭하네. 앞으로 이정도의 품질을 유지하면서 나머지 화승총들을 개량해주게. 필요한 지원은 얼마든지 할것이네. 따라서 나를믿고 서둘러 작업을 하게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기준과 중인들이 엎드렸다.
임금의 사격솜씨와 능력을본 호위청의 군관들도 내앞에 엎드렸다.
그들은 국왕이 무인과는 멀다고 생각했지만 실력과 지식에 있어서는 월등하게 앞서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인들은 자신들보다 강하다고 생각되는 상급자에게는 목숨을 바치고 충성한다.
그들의 진심어린 신뢰감과 존경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이정도쯤은 보여줘야 하는것이다.
* * *
“역시 아침공기는 상쾌하고 좋구나.”
“전하께서 기뻐하시니 소인도 감개무량입니다.”
“어전회의는 언제나 골치가 아프지만 그거야 임금된 자로서 해야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황송하옵니다. 전하.”
종걸이가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어전회의도 유쾌한것은 아니였다.
애초부터 수렴청정이라는 제한이 걸려있다보니 내가 할수있는건 많이없었다.
어전회의의 상황은 언제나 비슷했다.
먼저 수렴청정을 맡게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임금의 자리인 용상뒤에 앉아있다.
그리고 용상에는 곤룡포를입은 내가 위치하고 그아래로 의정부와 6조, 그리고 삼사와 승정원의 신료들이 위치했다.
정식의 어전회의인 조참과 인정전에서 진행되는 경우에는 각각의 신하들이 앞에놓여진 품계석에 위치한다.
하지만 정식 어전회의인 조참은 한달에 두번정도가 고작이고 그것도 지금은 한번으로 줄어든 상태다.
때문에 어전회의는 주로 약식인 상참이고, 이것은 선정전에서 행한다.
따라서 참석하는 인원들도 각부처의 장급에 해당되는 판서나 참판들이 주를이룬다.
문제는 여기서 영의정인 정원용과 예조판서인 장우영, 그리고 공조판서인 김석민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부처장들이 대강대강 업무보고를하며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사실 수렴청정을하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어전회의에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않고 있기에 그런것도 있었다.
어차피 큰일이 생기면 알아서 보고할 것이란 기대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6조의 상부로서 많은것을 총괄하는 이조판서 김좌근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어서 일지도.
실제로 이조판서 김좌근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남동생이다.
이런 미묘한 관계때문에 김좌근은 누이이자 궁궐의 큰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를 우습게보고 있는것이다.
그녀도 일정부분 느끼고 있으면서도 눈감아주는 상황이다.
그때문에 아침에 진행되는 어전회의는 짧게끝난다.
그리고 심신이 노쇠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건강을 위해서란것이 김좌근의 설명이지만 사실은 김좌근이 의정부와 6조, 그리고 기타 중앙기구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기위한 것일뿐이다.
나로서도 꼴뵈기싫은 김좌근과 측근들을 오랜시간 보지않아도 되기에 어전회의가 짧게 끝나는것에 대해서는 불만은없다.
필요한 부분들은 나중에 예조판서와 공조판서, 그리고 나의 측근인 종걸이(송내관)을통해 알아보면 되니까 말이다.
보통 어전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희정당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오늘은 일부러 시간을내어 궁궐내의 다른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백제시대 의자왕의 삼천궁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창덕궁내에는 궁녀들의 숫자가 꽤 되었다.
조선임금은 꽃밭에 둘러쌓인 셈이다.
궁녀라고해도 모두 아리따운건 아니다.
나이든 중년의 상궁들도 있기에 할미꽃도 있고 팔팔한 장미꽃도 있고 그런 셈이다.
‘그러고보니 조선역사에서 철종은 김좌근과 안동김씨들이 정해준 여자를 중전(왕비)로 맞이했었지.’
이대로 나두면 김좌근과 안동김씨들이 나의 아내를 결정하는 부분까지 생길것이다.
그렇게까지 놔둘생각은 없고 허락할 생각도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을하고 있을때 내쪽으로 교태어린 웃음을띠며 지나가는 십여명의 여성들이 보였다.
그녀들은 임금의 행차가 지나가는줄 모르고 있었다가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었다.
“발칙한 것들. 어느 안전이라고 크게 떠들고 다니는 것이냐?”
나이지긋한 상궁이 호통을쳤다.
어린 궁녀들이 놀라면서 고개를 숙였다.
노처녀의 히스테리는 시대를 불문하고 똑같다.
나로서는 기왕 어린 여자들이 주변에 있는데 그냥 보낼수는 없지.
희정당에도 배정된 궁녀들이 있기는 한데 대체로 나이가 좀 있었고 눈에 확띄는 궁녀가 안보였다.
내가 눈이높은건 아닌데. 흠흠.
그런데 내앞에 나타난 10명의 궁녀들은 대체로 귀엽고 마음에 든다.
뭐야 이거.
예쁜 궁녀들을 임금의 숙소가있는 희정당에 배치안하고 엉뚱한 궁녀들만 둔거잖아.
이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임금의 침소가있는 희정당에 배치될 궁녀들은 대체로 경험도 있고 궁녀의 품계도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거대한 보물창고
“종걸아. 저애들을 불러오너라.”
“전하. 저들중에는 무수리들도 있고 제대로 품계도없는 궁녀들 이옵니다.”
“그것은 상관없다.”
종걸이를향해 대답했다.
무수리면 어떻고 궁녀의 품계의 높고 낮음이 뭐가 중요해?
궁녀의 중요한 핵심은 귀엽고 예쁜 얼굴아냐.
내가 장희빈같은 절세미녀의 궁녀를 원하는것도 아니고 말이야. 장희빈이 조선역사에서 악녀로 유명하지만 그녀의 미모에 대해서는 조선왕조 실록에도 몇번이나 기록될 정도로 찬사가 있었다.
악녀긴 하지만 엄청난 미인이다. 이런뜻인데.
지시를받은 종걸이가 조금전 지나갔던 궁녀들을 데려왔다.
갑자기 불려온 그녀들의 표정은 수줍음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창덕궁내의 궁녀들이 임금을 직접 마주하는 경우는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이다.
그리고 궁녀들중에는 한번의 기회에서 임금의 마음에들어 벼락출세하는 경우도 생긴다.
내앞에 불려온 궁녀들은 10대후반도 있고 많아봐야 20대초반이다.
한명씩 둘러보던중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애는 진짜로 수지의 환생인가?’
입고있는 복장이나 머리스타일은 조선궁녀의 것이지만 얼굴은 한국에있을때 좋아했던 인기 아이돌 그룹인 블루핑크(Blue Pink)의 멤버 수지와 너무나도 닮았다.
이런 우연이 존재하다니.
그래서인지 유독 한명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내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종걸이가 낮게 속삭였다.
“전하, 마음에드는 아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냥 관심이 생기는 아이가 있구나.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박소현입니다. 전하.”
나의 질문을받은 블루핑크 맴버 수지, 아니 궁녀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좀 다르지만 느낌은 상당히 비슷하다.
“송내관. 저 아이와 이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구나.”
“전하. 그말은 저 궁녀에게 성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
송내관의 말에 멈칫했다.
그러고보니 왕이 궁녀를 선택해서 희정당으로 부른다는건 뭐 뻔한것인데.
나도 모르게 실수했네.
아직 그런것을 할 준비는 안되었는데.
하지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미 저애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걸 밝혔으니 여기서 되돌릴수도 없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혈기왕성한 젊은 임금이 여자보기를 돌같이 한다면 그것도 문제다.
“과인이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구나. 송내관이 적당히 알아서 하도록.”
“황송하옵니다. 전하.”
여기까지 말했으면 눈치빠른 종걸이(송내관)도 충분히 알아들은 것이다.
어차피 임금이 궁녀중 한명에게 관심이 있다는걸 나타내면 그뒤에는 아랫것들이 일사천리로 준비를 하니까 말이다.
다만 조선내 궁궐역사에서 임금이 관심을 가졌다고해서 평범한 궁녀가 단번에 중전(왕비)이 되거나 하는건 아니다.
임금이 정말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나중에는 그 궁녀와 결혼하겠다고까지 주장해야 진정한 벼락출세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중전(왕비)까지는 못되더라도 임금의 총애를 한번이라도 받았다는건 궁녀에게 엄청난 영광이다.
그때문일까?
찰나간 내가 지목을했던 궁녀, 박소현의 주위로 다른 궁녀들이 시기와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조선에서 여자의 질투는 칠거지악에 해당될 정도로 금기시되었다.
그리고 임금앞에서 그랬다가는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직도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고개만 숙이고있던 궁녀, 박소현에게 송내관이 다가가서 뭔가를 속삭였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더니 내앞에 무릅을 꿇으면서 큰절을 올렸다.
“소녀같이 미천한 여식을향해 전하께서 관심을 가져주시다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과인이 당혹스럽구나. 그리고 어서 일어나거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녀의 양볼이 발그레하게 변하였다.
저러니까 더 귀엽네.
지금까지 김좌근이니 안동김씨니 하는것들때문에 스트레스 팍팍쌓이고 임금이된 실감조차 없었는데... 이렇게 마음에드는 귀여운 궁녀를 선택할수 있다니.
이제서야 진짜로 임금이된 느낌이 나는거 같다.
* * *
쏴아아-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갑판에있는 시필드 제이든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습기를 머금은 후덥지근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상당수 영국인들은 이런 환경과 기온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제이든에게는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럴것이 시필드 가문의 차남인 그는 오랜시간 북아프리카에서 생활하였다.
북아프리카로 떠난 이유는 크게 2가지였다.
첫번째는 가문의 차남인 그에게는 큰형인 시필드 메칸티의 그림자가 너무컸다.
두번째는 본래부터 모험을 좋아했던 그로서는 판에박힌 영국과 런던에서의 생활에서 탈출할수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큰형인 시필드 메칸티와 집안에서는 이런 제이든의 행동에대해 시간을 낭비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타박했다.
제이든은 북아프리카의 생활을통해 귀중한 경험을 하였다.
이제 그가 속해있는 시필드 가문에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위기에서 제이든은 자신이 영국과 런던에서 할수있는건 별로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대신에 자신이 잘할수있는 분야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