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장산국이 흔쾌히 승낙했고 김정호가 기쁨을 표시했다.
자신에게 내려진 임금의 비밀스런 특명을 수행하는데 있어 중요한 첫걸음이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 * *
“높으신 어르신들은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대낮부터 술이나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도 엄청난 녹봉이 저절로 나오고 거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뇌물을 바치니까.”
“자네 미쳤나?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그래?”
손종국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눈치를 살폈다.
주변에는 신참으로 들어온 동료외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비변사에 들어왔다고 좋아했는데 저런 꼴을 보게될줄이야.”
“어차피 세상이 다 그런거 아니겠어? 그리고 우리같은 말단 병졸들은 위에서 시키는대로나 하면 되는거야.”
“알고는 있지만 말일세.”
손종국이 고개를 내저었다.
말단병졸에 불과한 동료가 어설픈 정의감을 부려봐야 바뀌는건 없다.
비변사같은 꿀보직에서 일하는 특혜만 박탈당할 뿐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비변사에 속해있는 중하급의 관원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관청이 얼마나 썩어있고 주변에서 욕을 먹고 있는지는 알고있는 편이다.
그럴것이 조선중기부터 후기까지 조선역사에서 발생한 수많은 폐단들과 부정부패가 비변사와 관련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비변사 주변에서 경비를 담당하던 말단병졸들의 불만처럼 비변사의 상급을 차지하는 관료들은 무능함을넘어 철밥통처럼 놀고 먹으면서 녹봉이나 축내는 신세였다.
“어서들 드시지요.”
“호판대감께서 귀한술을 가져오시다니 감사를 드려야 할거 같군요.”
“뭘 이런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이후에 필요한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요청을 하십시요.”
호조판서인 염상백이 크게 웃었다.
호조는 6조에서도 재정과 자금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이조판서이자 안동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에게는 오른팔과 같은 존재.
그때문에 김좌근은 자신의 수족인 염상백을 호조판서로 임명시켰고 호조의 막대한 자금과 예산들을 중간에서 착복하는 상태였다.
김좌근은 호조를 손에쥐고서 자신에게 잘보이는 관료들과 관청들에 대해서만 예산과 자금을 지원해주는 비열한 짓까지도 하였다.
이로인해 김좌근에게 아부하는걸 거부했던 예조와 공조의 경우에는 찬밥신세를 면치못했다.
의정부와 6조의 관청들이 창덕궁내에 주로 위치해있는 것에비해 비변사는 창덕궁의 외곽에 자리를 잡고있었다.
조선 초기에도 비변사는 있었지만 기능과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중기와 후기.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을 거치면서 비변사는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의정부와 6조의 기관을 넘어서는 부패한 존재로 변하였다.
“호판대감께서 귀한술도 가져오시고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을 도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병조판서와 형조판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술잔을 따르던중 형조판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런데 새임금이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거 같더이다.”
“무슨 뜻입니까?”
“얼마전 본관이 형조를 잠깐 비운사이에 새임금이 내관과함께 형조를 다녀갔더이다.”
“그것이 사실이요?”
“물론이요.”
“그러고보니 호조에도 잠깐 얼굴을 비추었다는 보고를 들었소.”
“호조에도 출두한 모양이군요.”
형조판서 최상진이 대답하며 불쾌한 표정을 유지했다.
자신이 형조를 잠깐 비웠다고 둘러댔지만 실제는 전혀다르다.
여기있는 형조판서를 포함해 부패한 신하들은 어전회의에나 잠깐 얼굴을 비출뿐 그뒤에는 자신들이 담당하는 관청에 대해서는 등한시하는게 대부분이다.
지금도 본래는 각자의 관청과 부서에서 업무지시를 하거나 많은 서류들을 처리해야함이 마땅한데 비변사에 모여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던중 임금이 내관을 포함해 소수의 수행원들만 대동하고 자신들의 부서를 방문했으니 불쾌감을 느낀것이다.
특히 형조판서는 새임금인 이원범을 깔보던 상태였기에 이것을 자신의 영역에대한 침입이라고 생각했다.
“듣보고니 이 문제에대해 이판대감에게 말을해야 할거 같소이다. 그냥 놔두면 이후에도 강화도에서온 촌놈이 6조의 관청들을 제집 드나들듯이 쑤시며 다닐거 아니요?”
“맞소이다.”
새임금이 이미 다녀간 호조와 형조의 판서들은 불만을 드러냈다.
다만 병조에는 새임금이 다녀갔다는 연락은 없었다.
그때문에 병조판서인 이규동은 두명과는 생각이 좀 달랐다.
이것은 철종 이원범의 계략이다.
국방과 군사력을 담당하는 병조까지 미리부터 들쑤셔 놓으면 상대의 경계심이 커질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안동김씨의 수장인 이조판서, 김좌근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기위해 이조에대한 방분도 생략했다.
철종 이원범이 불시에 방문한 곳은 호조와 형조, 두곳이였던 셈이다.
호조와 형조판서 두명이 대화를 할즈음 회의실로 이조판서인 김좌근이 들어왔다.
그러자 모두가 일어나서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요. 이판대감.”
“중요한 약속이있어 그것을 처리하느라 좀 늦었소이다.”
“개념치 마십시요. 어차피 우리들은 여기에서 호판대감이 가져온 감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뿐입니다.”
병조판서가 말하며 웃었다.
김좌근이 자리에 착석했고 나머지도 따라 앉았다.
호조판서가 아첨이라도 하듯이 김좌근에게 술잔을 건네었다.
김좌근이 한잔을 마시더니 칭찬을한다.
“과연 맛이 좋군요. 어디서 구하셨소?”
“이판 대감께서 마음에 들어하신다면 이후에 아랫사람을통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더 고맙군요.”
김좌근이 승자처럼 웃었다.
여기있는 호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들은 모두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6조에있는 6개의 대형 관청들중에 4곳을 자신이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의정부에있는 3정승들중에서 2명이 자신의 세력이다.
그 두명은 좌의정과 우의정이다.
영의정은 아직도 포섭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의정부에서 제대로 힘을쓰지 못하는 상황이니 크게 문제될것은 없었다.
조선의 중앙기구와 권력들이 대부분 안동김씨와 수장인 김좌근에게 집중되는 상황.
김좌근이 원하던 것이였고 이제부터는 그것을 대대손손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본관이 오기전까지 경들은 무슨 이야기를하고 있었소? 특별히 본관이 알아야할 것이라도 있습니까?”
“마침 잘 오신거 같소이다. 안그래도 호판대감, 그리고 형판대감, 병판대감등과 그 문제를 토론하던 중이였습니다.”
“어떤것인지 궁금하군요.”
“새임금이 사전에 연락도없이 호조와 형조를 방문해서 그곳에있는 중하급 관원들을 대면했다고 하더군요. 호조와 형조에는 당연히 본관인 호조판서와 그외에 형조판서, 그리고 참판과 참의들이 있는데 이들에게도 말을하지 않고 불시에 몇명의 수행원들과함께 임금이 관청을 방문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런일이 있었군요.”
김좌근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조판서와 형조판서가 이런 불만을 자신에게 털어놓는게 충분히 이해되긴 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방문한 관청들이 기껏해야 호조와 형조일 뿐이다.
만약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생각이였다면 이조부터 방문하는게 순리인데 그것은 또 아니다.
거기다 병권이나 군사분야에 욕심이 있다면 병조에도 뭔가 손을 써볼려고 했을텐데 그런 움직임도 없었다.
한동안 생각하던 김좌근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근과 채찍
“하하하! 경들이 너무 과민하신거 아니요?”
“무슨 뜻입니까?”
“애초에 우리들이 흥선군 이하응을 제외하고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이원범을 새임금으로 추대한 이유가 뭐였소?”
“그거야 당연히 이원범이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무지렁이의 수준이라서 그런것이 아닙니까?”
“제대로 보았소.”
김좌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호조판서와 형조판서의 불만을 해소할수는 없었다.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촌부라면 그것에맞게 행동하면 될것이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호조와 형조를 방문해서 들쑤셔 놓는다는 것입니까?”
“못배우고 했기때문에 그런것입니다. 또한 궁궐내의 법도를 제대로 모르는 강화도의 촌부라서 그런 행동이 나온것입니다. 만약에 제대로 배우고 궁궐의 법도를 아는 임금이라면 뭣때문에 관청을 방문해서 하찮은 아랫것들을 만나고 상대하겠습니까? 그리고 임금이 권한도없는 아랫것들을 만나봐야 변하는 것이라도 있겠소?”
“그말은 즉...”
“그렇소. 갑자기 농사나짓던 천한 신분에서 임금이 되었지만 역시나 천하디천한 마음과 행동을 버리지 못해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뒤 생각도없이 호기심으로 6조의 관청을 불시에 찾아간 것이고 말이지요.”
김좌근이 대답하며 몇차례나 웃어댔다.
지금 새임금은 어전회의에서는 자리를 지키면서 그럴듯하게 임금의 행세를 할려고 하지만 정작 관직이높은 신하들을 상대로는 제대로 말조차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만약에 임금이 김좌근의 예측과 다르게 비범하고 똑부러지는 임금이라면 벌써 이조판서인 김좌근을 단독으로 면담하고 뭔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것은 없었다.
애초부터 새임금은 자신을 무서워서 피하고 있었고 이조에는 책임자인 김좌근이 있을까봐 거기는 찾아가지도 못했다.
거기다 제대로 제왕학을 배운 임금이라면 관청의 책임자인 판서나 참판을 불러서 권위를 세우면서 방문하는게 기본이다. 그것도 못했다는것은 뻔하다.
권위를 세우지 못하는 임금의 말로가 어떤것인지를 김좌근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임금의 자리만 지키는 허수아비 신세-
김좌근이 흥선군 이하응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무참하게 짓밟으며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이원범을 새임금으로 세운 목적과 이유가 제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경들에게 한가지 말해둘것이 있소이다. 새임금은 약관도 안된 어린소년일 뿐이요. 이제 갓 새로 왕이 되었으니 호기심도 있을것이고 제딴에는 나름 의욕도 있을것이요. 하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요? 어차피 좀 지나면 현실의 벽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깨닫게 될것인데... 그뒤에는 뻔하지 않겠소? 이제까지 강화도에서는 농사나 짓는다고 제대로된 사치와 향략을 누려보지 못했지만 지금부터는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요.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혈기왕성한 청년이 사치와 향략에 빠지는건 불보듯 뻔하지 않겠소?”
“이판대감의 말씀을 듣고보니 그다지 신경쓸 일이 아니였군요.”
“맞소이다. 기껏해야 치기어린 새임금의 행동에 과민반응을 하면 아랫것들이 우리를 우습게 볼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김좌근의 설명에 나머지 3명이 동의했다.
어차피 상대는 제왕학을 제대로 배운것도 아닌 농사나짓던 촌부일 뿐이다.
그때문에 지금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까지 하고있지 않은가?
임금이라해도 과거의 임금들처럼 실권이 있는것도 아니다.
자신들을 포함해 신하들이 크게 들고 일어나면 뭔가를 할려해도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것은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촌부가 궁궐생활의 화려함과 부귀를보면 정치나 이런것보다는 다른것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다는것.
이미 역사를통해 증명된 것이다.
“과연 이판대감의 말씀대로 입니다. 쓸데없는 걱정과 근심으로 이마에 주름이 생길뻔 했소이다.”
그곳에 모인 참석자들이 광소를 터뜨렸다.
애초에 자신들이 신경써야할 부분은 농사나짓던 새임금이 아니라 지방에있는 유림들이나 사대부들중에서 안동김씨 세력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또다른 세력들이다.
지금은 이들의 세력이 미약하고 제대로 합쳐진 상태가 아니지만 항상 주시하고 위협이 될것이라 판단하면 확실하게 짓밟아야 하는 것이다.
* * *
“전하께서 명하신대로 하나도 빼먹지말고 신중을 기해야 할것이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직인들이 대답하며 비지땀을 흘렸다.
시간은 자정이 되어갈 무렵이다.
호롱불까지 켜놓고 작업을 진행중에 있었다.
기술자들을 감독하는 50대의 중인, 한기준-
표정에는 남다른 각오가 있었다.
임금이 군기시까지 시찰을 오신것은 이례적인 부분이다.
그는 임금께서 오신다는 말을듣고 너무놀랐다.
조선의 임금은 하늘같은 존재-
자신들이 군기시 소속이지만 임금을 곁에서 보필하는 관료들과는 다르다.
때문에 국왕을 눈앞에서 만나볼 기회도 별로없었다.
군기시에 속해있는 그들은 대다수가 신분이낮은 중인들이고 이렇다할 관직도 없었다.
군기시에 고용된 상황이고 대대로 무기들을 만들거나 보수하면서 일생을 지내는게 전부였다.
또한 이곳은 화약을 다루고 열악한 작업장소였다.
누구든지 오기를 꺼려하는 곳이다.
임금이 시찰을 오기에는 너무나도 누추한 곳-
여기에 새임금이 오신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어르신.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무엇인데 그러느냐?”
“전하께서는 어떻게해서 그런것들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소문에 듣기로 전하께서는 임금으로 옹립되시기 전에는 강화도에서 평부의 삶을 지내셨다고 들었다. 어쩌면 그때에 양반 사대부들이나 왕족들은 접해보지 못한 기예와 기술을 익히신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역대로 전례가없는 임금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이놈들! 전하의 말씀대로 모든것을 철저하게 해야한다. 허투르게하면 큰 사고가 생긴다. 알겠느냐?”
한기준이 호통쳤다.
이곳에는 다른 부서에서 온 기술자들도 작업을 하였다.
그들이 움직이는 작업대에는 다양한 재료들이 준비된 상태다.
비슷한 굵기의 얇은 대나무들이 수십개 있었다.
한쪽에는 수은이 들어있는 도자기병들도 보인다.
다른쪽에는 초산이 들어있는 도기들도 수십개씩 준비된 상태였다.
이제까지 흑색화약을 만드는 것에는 익숙했던 그들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만들고 제조하는 것은 처음이다.